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27화 (100/558)

제127화

거리가 노르스름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걸까.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지만, 한낮의 소란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거 안쪽에 들여놓고.”

“이쪽 쓰레기는 한 번에 모아서 버릴 거니까 내버려 두세요.”

노점들이 하나둘씩 좌판을 정리했다. 줄줄이 늘어서 있던 입간판들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가하란이 빗질하는 남자를 멀거니 지켜볼 때였다.

“우리도 가자.”

테리가 말했다. 제니는 테리에게 업혀 잠든 지 오래였다.

“형. 안 힘들어?”

“오늘 뭘 많이 먹어서 그런지 좀 무겁긴 해.”

“내가 대신 업을까?”

“됐어. 집까지 금방이니까.”

테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근데 칼리고 아저씨는 어딜 간 거야?”

“나 찾았어?”

불쑥 솟아난 칼리고가 말했다. 가하란은 움찔하며 칼리고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뒤에 아무도 없었는데.

“잠깐 일 좀 보고 왔어. 그보다 너희들, 오늘 즐거웠니?”

가하란은 제니가 선물해준 팔찌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네. 재미있었어요.”

“잘됐네. 축제 때 즐기지 못하면 그것만큼 서글픈 일도 없거든.”

칼리고가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면 야시장 열리는데, 그것도 한 바퀴 돌아볼래? 야시장도 제법 볼만하다던데.”

테리가 잠든 제니를 슬쩍 내보이며 말했다.

“저는 얘 데리고 들어가야 해요. 내일 가게 일도 도와야 하고.”

“성실하네.”

“하루 놀았으니 열심히 일해야죠.”

색색 잠든 제니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테리가 기겁하면서 말했다.

“입 좀 닫고 자라.”

핀잔을 주면서도 제니가 깰까 봐 얌전히 서 있는 테리였다. 가하란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아저씨, 저희 먼저 가볼게요. 가하란! 내일 할 일 없으면 여관으로 와.”

“알겠어, 형.”

테리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가하란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다가 칼리고를 바라봤다.

“아저씨.”

“응?”

“전 더 놀 수 있어요.”

“그래?”

칼리고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저녁 장사를 준비 중인 음식점이 눈에 들어왔다.

“야시장 열릴 때까지 시간 남았으니까 저기서 간단히 뭐 좀 먹자.”

“안 그래도 앉고 싶었어요. 계속 걸었더니 발바닥이 저려요.”

“힘들면 아저씨가 업어줄까?”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업히는 게 싫으면 목말은 어때? 낮에 보니까 랜더 씨가 목말을 태워주던데.”

“그땐 거병을 봐야 했으니까요.”

칼리고가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그 손을 붙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칼리고가 물었다.

“뭐 먹을래?”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아무거나야. 그리고 나 같은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면 위험해.”

“왜 위험해요?”

“미치도록 매운 고추를 다져 넣은 달콤한 초코케이크 같은 걸 먹게 될 테니까.”

생각만으로도 눈이 찌푸려졌다.

“정말로 그런 음식을 시켰어요?”

“궁금하면 아무거나, 라고 다시 말해보던가.”

칼리고의 눈빛은 정말 진지했다.

“그러면 아저씨랑 같은 거로 먹을게요.”

“배 상태는 어때? 많이 먹을 수 있겠어?”

“아니요. 아까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먹었더니 엄청 배고프지는 않아요.”

칼리고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카운터로 갔다. 가하란은 식당 손님들이 먹는 음식을 살펴봤다. 다들 젓가락을 써서 면을 떠먹고 있었다.

“가게 주인이 강력하게 추천하는 걸로 주문해 놨어. 구운 생선이 올라간 국수라던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가 나왔다. 으깬 생선 살이 올라간 국수였다. 가하란은 젓가락을 어설프게 움켜쥐고 면을 떴다.

“젓가락 써 본 적 있어?”

“몇 번 있어요. 아빠가 가르쳐 줬거든요. 근데 손에 안 익어서 잘 못 해요.”

“다른 문화권에서 들어온 식기구니까. 30년 전만 해도 제국에서 이런 거 쓰는 사람 몇 없었어.”

“정말요?”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 면발을 입에 넣으며 물었다. 맑은 국물인데 향이 진했다.

“연합왕국 쪽 루간 도시였나? 그쪽에서 들어온 물건일 거야. 처음에는 귀족들 연회석에서 간간이 사용되다가 이렇게 널리 퍼졌지.”

“전 젓가락보다 포크가 편해요.”

“편한 걸 쓰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불편함을 감내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배워두면 생색낼 수 있기도 하고. 너희 아빠도 그걸 아니까 젓가락질을 가르친 거겠지.”

가하란은 포크로 눈동자를 돌렸다가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몇 번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잘하네.”

지켜보던 칼리고가 말했다.

“아저씨.”

“왜?”

“잊으신 거 하나 있는데.”

“어떤 거?”

“아저씨가 하는 일이 뭔지, 아직 안 알려주셨어요.”

칼리고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릇을 들었다.

“내가 그런 약속을 했었나?”

“거짓말하면 안 돼요.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약속했다는 증거는?”

“제 기억이요. 아저씨도 물론 기억하고 있을 거고요.”

칼리고가 그릇을 내려놓았다. 입술이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기억이란 건 굉장히 모호한 거야. 사견이 잔뜩 들어간 정보라고. 사실로서 대접받으려면 기억 같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 계약서 같은 물질적인 게 필요하지.”

가하란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칼리고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테리 형한테 아저씨가 체스 되게 못 둔다고 말할 거예요.”

“…곧바로 협박이라. 협상 테이블에서는 그거 금기야.”

칼리고가 빙긋 웃더니 품 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특수감찰단이라고 들어봤어?”

“아니요.”

“쉽게 설명하자면 남들이 꺼리는 사건을 해결하는 게 내 일이야. 비슷한 직군으로는 쓰레기 청소부가 있지.”

가하란은 기억을 더듬으며 질문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거면 좋은 일 아닌가요? 근데 아저씨는 나쁜 사람도 돕는다고 했잖아요.”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차이지. 가하란, 넌 착한 사람을 돕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

“네.”

고민할 것도 없었다. 당연한 것이니까.

“그러면 이건 어때? 정말 착한 사람 A가 배가 고픈 나머지 동화 1개짜리 빵을 훔친 거야. 빵집 주인은 너고.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용서해줄 거예요. A란 사람이 착하다는 건 이전에 그런 짓을 벌인적이 없단 뜻이잖아요?”

“그렇지. 이번이 처음이었어.”

“그러면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말해준 다음에 용서해줄래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칼리고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이번엔 B라는 사람이 있어. 동네에서 빵을 팔고 있지.”

가하란은 젓가락으로 면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A가 B의 빵집에서 빵을 훔친 건가요?”

“맞아. 만약 네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수사관이라면 어떻게 할래?”

“저라면 B한테 한 번만 용서하라고 부탁할 거예요.”

“어째서?”

“그야 빵 한 개니까요. 너무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훔친 거니까, 한 번은 용서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훔친 건 못된 짓이지만 그렇다고 용서받지 못 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면 빵 2개는?”

“2개라고 다를 건 없죠.”

“5개는?”

“…5개요? A는 정말 배가 고팠나 보네요.”

가하란은 잠깐 생각한 후 대답했다.

“5개는 많아요. A한테 빵값을 내라고 해야겠어요.”

“1개일 때는 용서할 수 있고, 5개는 안 된다는 거네?”

“네. 너무 많으니까요.”

칼리고가 손가락을 딱 튕기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엔 C라는 사람이 빵을 훔쳤다고 가정하자. 근데 이 C는 착한 사람이 아니야. 정말 악질이지. 어느 정도냐면 사람을 죽인 적도 있어.”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

“그렇지. 그런데 이 C가 똑같이 빵을 하나 훔친 거야. 이번에도 용서하라고 지시할 거니?”

가하란은 반쯤 남은 국물을 들여다봤다. 사람까지 죽인 C. 얼굴이 절로 찌푸려진다.

“C가 나쁜 사람이란 걸 제가 아나요?”

“아주 잘 알지.”

“그러면 전 빵값을 내라고 시킬래요.”

“어째서? A는 한 개를 훔쳤을 때 눈감아 줬잖아.”

“A는 착한 사람이니까요. 선한 사람이 어쩌다 한 번 실수한 거니까 용서해줘야죠.”

“그동안 개차반으로 살아온 C는 쌓아온 죄가 있으니 엄격하게 대해야 하고?”

“…네.”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뭔가를 놓친 거 같은데.

“그렇다면 빵 가게 주인, B의 입장에서 봐볼까?”

“B요?”

“그래. 네가 B가 되는 거야. 잘 봐.”

칼리고가 검지를 세웠다.

“착한 A가 빵을 훔치면 수사관이 너한테 와서 한 번은 용서하라고 할 거야. 맞지?”

“네.”

“이 경우 B는 빵 한 개만큼의 손해를 본거지?”

“…그렇게 되네요.”

가하란은 무엇을 놓쳤는지 바로 깨달았다.

“반대로 C가 빵을 훔치게 되면 빵주인은 돈을 돌려받아서 손해가 없어. 내 말이 맞지?”

“맞아요.”

“어? 이상하네. 선량한 시민 A를 도왔더니 B가 손해를 보네.”

“그건….”

칼리고가 손가락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가 하는 일은 사람을 배제하고 사건의 본질만 보는 거야. 착하고 나쁘고. 그런 건 관점에 따라 너무나도 쉽게 변해. 막말로 아까 사람을 죽인 C가 사실은 부모님의 원수를 갚은 거라면? 이러면 아주 나쁜 놈에서 덜 나쁜 놈이 되는 건가?”

가하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요.”

“물론 네 방식이 틀렸다는 건 아니야. 단지 아저씨가 일할 땐 감정이란 뜨뜻한 놈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거야. 착한 놈과 나쁜 놈은 저리 치우고, 한 놈과 안 한 놈만 남는 거지.”

가하란은 그릇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아저씨가 빵집 주인이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내가 주인이면?”

칼리고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배고프면 마음껏 가져가라고 빵을 풀겠지.”

엉뚱한 대답이었다. 가하란은 고개를 삐딱하게 하며 칼리고를 바라봤다.

“그게 뭐예요.”

“아저씬 돈이 많거든.”

“그러면 저도 배고픈 사람들한테 빵을 다 줄 거예요.”

“그건 안 돼.”

“왜요?”

“넌 돈이 없잖아. 난 부자고.”

괴상한 논리였다. 그런데 그 괴팍함이 칼리고와 잘 어울렸다.

가하란은 소리 내어 웃었다.

“아저씨랑 얘기하는 건 즐거워요.”

“나도 너랑 떠드는 게 좋다. 다른 사람들은 이 고상한 취미를 이해 못 하거든.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취미야.”

젓가락을 들어 남은 면을 떴다. 퉁퉁 불어서 잡기가 한결 쉬워졌다.

“아저씨 말대로 불편한 걸 참아내는 것도 나름 재미있네요.”

가하란은 젓가락으로 건져 올린 면을 보여줬다.

“어째 양이 모자라 보이네.”

“먹다 보니까 계속 들어가요.”

“한 그릇씩만 더 먹을까? 어차피 떠들면서 돌아다니면 소화 금방 돼.”

가하란은 식탁을 보았다. 국수 두 그릇. 생각해 보니 낮에도 이것저것 얻어먹었다. 그거 다 합하면….

“애가 돈 걱정 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말했잖아. 아저씨 부자라고. 그리고 나랑 놀아주는 값이라고 생각하면 돼.”

“놀아주는 값이요?”

“내 부하들은 나랑 잘 안 놀아주거든.”

다른 것도 주문해 올게, 칼리고가 일어서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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