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랜더란 이름에 가하란도 몸을 틀었다. 고개를 빼고 까치발까지 들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앞이 안 보였다.
‘귀족은 아니지만 돈 많은 아저씨.’ 제니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풍족한 사람은 대개 몸집이 좋았다. 보기 좋을 정도로 나온 뱃살과 둥근 체형을 상상하며 옆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사냥꾼과 부자. 특이한 조합이었다. 무슨 이유로 같이 다니는 걸까?
질문들이 또 쌓이기 시작했다.
“야, 빨리 뛰어! 지금 오고 있어!”
무리 지은 아이들이 눈앞을 지나갔다. 하마터면 치일 뻔했다. 뒤로 물러선 뒤 중앙 광장으로 향하는 길을 바라봤다.
인파가 몰리고 있었다. 축제라 안 그래도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도로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우와,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왔다. 둔에 이렇게나 사람이 많았었나? 작년 축제보다 배는 많아 보였다.
연합왕국에서 온 상단 때문인가?
“뛰지 마세요!”
치안 관리병들의 외침이 주변 소음에 묻혀 덧없이 사라졌다.
“망했는데?”
테리가 옆에 서며 말했다.
망했다. 그 말 그대로였다. 어, 하는 사이 인도와 차도가 꽉 막혔다.
“지금이라도 가자. 더 늦으면 거병 그림자도 못 보겠다.”
테리가 제니에게 손짓했다. 뒤를 돌아보니 어른들끼리 뭔가 대화 중이었다.
칼리고와 구치는 보였는데, 옆에 있는 랜더는 자세히 보지 못했다. 체형은 상상했던 것보다 말라 보이는데.
“뭐야! 사람 왜 이렇게 많아?”
제니가 광장으로 가는 길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손잡아. 절대로 떨어지지 마. 알겠지?”
테리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끼리 가자고?”
가하란은 걱정하는 투로 말하면서 그 손을 붙잡았다.
“그래서 안 갈 거야?”
“아니. 가야지.”
살짝 망설이던 제니도 테리의 손을 잡았다.
“무조건 앞만 보고 가는 거야. 중앙 광장 도착할 때까지.”
“좋아.”
무작정 움직이면 고생한다는 걸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형과 눈빛을 교환한 후 앞으로 냅다 뛰었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겹겹이 쌓인 사람의 벽을 뚫고 앞으로 조금 나아갈 때였다.
“말 정말 안 듣네.”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칼리고였다. 장난기 어린 얼굴로 손을 내민다.
“나만 잘 따라와. 이 아저씨가 길 찾는 데 선수니까.”
칼리고가 눈을 한번 씰룩이더니 왼쪽으로 움직였다. 가하란은 테리의 손을 꽉 잡았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도중에 헤어지면 한동안 찾지 못하리라.
“조심해야겠네요. 칼리고 씨!”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칼리고가 손을 들어 올렸다. 꽉 잡은 테리와 제니의 손을 보여 주는 듯했다.
방금 칼리고를 부른 사람은 랜더 같았다. 구치의 목소리는 저것보다 탁했으니까.
“저쪽으로 가면 되겠다.”
이번엔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데, 이대로만 가면 금방 중앙 광장에 도착할 것 같았다.
“손 꽉 붙잡고! 거의 다 왔으니까.”
“아저씨가 우리보다 더 신난 거 같아요.”
테리가 칼리고를 보며 말했다. 맞아, 라고 말하며 제니가 크게 웃었다.
“거병이다!”
저 먼 곳에서 뾰족한 외침이 들려왔다. 주변 사람들의 고개가 일시에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취악기의 강렬한 선율이 머리 위를 뛰어다녔다. 둥둥,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하는 북소리는 광장 바닥에 깔렸다.
혼란 속에서도 대열을 이루고 움직이던 사람들이 한순간 오른쪽으로 쏠렸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움직였다. 밀치면서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치여 발을 몇 번이나 헛디뎠다.
“가하란! 내 손 꽉 잡아!”
테리가 외쳤다. 가하란도 알겠다고 대답하며 손아귀에 힘을 줄 때였다.
누군가가 옆을 비집고 지나갔다. 어, 하는 사이 붙들고 있던 테리 손을 놓치고 말았다.
한순간에 인간의 벽이 세워졌다. 테리는 물론, 칼리고와 제니도 보이지 않았다.
“자, 잠깐만요. 잠시만요!”
힘겹게 외쳐 봤으나 소용없었다. 사람들의 귀에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산사태에 휩쓸린 양처럼 이리저리 치이며 방향감각마저 잃어갈 때였다.
-거슬리던 힘의 잔향이 저거였구나. 저런 게 이 층에 존재하고 있었어.
산페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머리를 스치듯 뻗어나가던 악기 소리도, 정신을 사납게 만들던 발소리도, 거병을 찾는 음성까지 모두 사라졌다.
거칠게 몸을 밀치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멈춘 것처럼 보였다.
가하란은 바로 옆에 있는 아이의 눈동자를 보았다. 초록색 눈동자와 그 옆으로 퍼져나간 실핏줄이 무서울 정도로 선명하게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핏줄의 개수까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래로 느릿하게 떨어지는 과자 부스러기가 보였다. 눈동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아줌마 품에 아이가 안겨 있고, 아이 손에 과자가 쥐어져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기이한 감각이었다. 세상이 느려진 건지, 아니면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산페르 아저씨라면 설명을 해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다시금 산페르의 음성이 머리를 관통했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 이 또한 과정이니까.
무슨 과정이요? 입을 열어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이 뜨이는 과정. 만약 완전히 열리게 된다면, 그때 가서 또 얘기해 줄게. 그때까지 네가 멀쩡하다면 말이야.
담담한 말투가 이상하리만치 무서웠다. 멀쩡하면, 이라니.
-한동안 대답하지 않을 거야. ‘저것’에 대해 아는 놈이 있는지 잠깐 물어보고 올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상이 본래 속도를 되찾았다.
옆을 지나치던 아이는 금세 시야 밖으로 사라졌고, 떨어지던 과자 부스러기는 이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되살아나 귀를 할퀴었다. 한꺼번에 몰아닥친 감각에 가하란이 몸을 움츠릴 때였다.
누군가가 덥석 손을 잡았다. 가하란은 움찔하며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누구지? 처음 보는 남자였다. 아빠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인다.
가하란은 남자의 손을, 그다음 눈을 바라보았다. 깊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눈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려보낼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울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이질적이었다. 수없이 봐온 사람의 눈인데, 앞에 있는 남자의 눈은 그동안 봐온 사람들과 굉장히 달라 보였다.
무엇이 다르냐고 물으면 딱히 꼽을 수 있는 건 없었다. 형태도 같고, 색깔도 많이 보던 색이니까.
그럼에도, 분명하게 달랐다.
“테리 친구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하란은 앞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이 아저씨가 랜더구나.
“칼리고 씨하고 꽤 멀어졌구나.”
남자가 말했다.
확실한 거 같았다. 한순간 안심이 됐다. 마음이 놓이자 잊고 있던 것이 번쩍 떠올랐다.
거병!
애타는 마음으로 제자리에서 뛰어봤지만, 사람들의 등만 보일 뿐이었다.
앞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아무래도 여기서 봐야겠구나.”
몸이 번쩍 들렸다. 랜더가 목말을 태워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헛숨을 들이켰지만, 금방 안정감을 찾고 앞을 내다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거병이 있었다. 황실의 상징을 높이 들어 올리며 육중한 걸음을 떼고 있었다.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다시 봐도 놀라울 뿐이었다. 작동 방식을 어설프게나마 알고 있지만, 여전히 신기할 뿐이다.
“저렇게 큰 물체가 어떻게 움직일까요?”
답을 구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 건 아니었다. 감탄의 일종이었다.
“궁금하니?”
대답이 돌아왔다. 가하란은 아래를 보았다. 여기서 아니요, 라고 말하면 아저씨가 무안해할 것이다.
“네.”
대답하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이 아저씨는 거병에 대해 잘 아는 게 아닐까?
기대감이 한껏 피어올랐다. 아직 배우지 못한 것들을 아저씨 입을 통해 알게 될지도 모른다.
잠시 고민하던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마법의 힘이겠지?”
가하란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거병의 작동 원리는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닌데.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아저씨한테 설명해주고 싶었다. 뼈대인 탈로스부터 액상근육과 오토마타, 거기에 모듈 구동계와 마력선 신경회로까지.
입이 근질거렸지만 꾹 참았다. 할아버지가 늘 해준 말이 있었다. ‘들어서 기억한 것과 이해한 것, 이 둘은 분명 다른 거란다.’
거병에 대해 조금 알고 있지만, 이건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이해하지 못한 정보를 몇 개 안다고 해서 으스대며 말하면 못난 사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네, 마법일 거예요.”라고 말하며 넘기는 것도 싫었다.
아닌 건 아닌 거니까.
“그런 간단한 원리가 아닐 거예요. 분명 다른 게 더 있을 거예요.”
말을 내뱉고 난 뒤에 헤헤 웃었다.
그사이 거병 머리가 젖혀지면서 가슴 덮개가 들렸다. 체임버 안쪽에서 제복을 입은 거병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병 기사는 날렵한 동작으로 거병 어깨에 오른 뒤, 주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작년에 본 거병 기사는 남자였는데, 올해는 여자였다.
문득 밀레나가 떠오른다. 환호를 받으며 거병에 오르는 누나를 상상해 봤다. 무척이나 멋있었다.
거병 기사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기사가 단아한 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선택받은 사람만이 될 수 있다는 거병 기사. 경외심을 담아 멍하니 바라봤다.
“너도 저런 거병 기사가 되고 싶니?”
아저씨가 질문했다. 가하란은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말했다. 기사보다는 기술자가 되고 싶다고.
“그 바람이 이루어졌으면 좋겠구나.”
가하란은 아저씨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크게 꼭 이룰 거예요, 라고 대답했다.
거병 기사가 다시 체임버 안으로 들어갔다. 은빛 거인이 기동음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깃발을 높게 든 기수들을 따라 거병이 걸음을 뗐다. 기동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듯했다.
짧은 등장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역시 거병은 멋있었다. 환상적이란 단어는 거병을 위해 생겨난 것이리라.
아쉬움을 담아 거병의 뒷모습을 쫓을 때였다. 랜더가 움직였다. 향한 곳은 칼리고 앞이었다.
“숨겨둔 자식이 있으셨군요. 미리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가하란은 작게 웃으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테리와 제니가 다가오더니 방방 뛰면서 물었다.
“거병 봤지?”
“당연히 봤지!”
테리가 감상을 쏟아냈다. 가하란도 그에 질세라 흥분하며 소감을 말했다.
테리는 거병 기사를 중점적으로 말했고, 가하란은 거병에 관해 쉼 없이 말했다.
“거병이 멋있긴 한데 그렇게 흥분할 정도는 아니던데. 오히려 그 언니가 진짜 멋있더라. 나도 거병 기사가 돼볼까?”
옆에 있던 제니가 한마디를 했다.
가하란은 제니를 붙들며 한동안 설명을 이어나갔다. 할아버지는 말을 아끼라고 했지만, 거병이 별로라는 제니의 평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알았어. 거병도 멋있어. 됐지?”
“정말 알아들은 거지?”
“…사실 난 너무 커서 무서워. 그때 보여준 조각상 정도가 딱 좋아.”
크니까 멋있는 거야, 라고 말하려다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광장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메인 이벤트가 끝났으니 다른 걸 구경하러 움직이는 것 같았다.
“너희들 마법 보러 갈래?”
칼리고가 불쑥 나타나 말했다.
“마법이요?”
거병만큼이나 관심이 가는 분야였다. 칼리고가 얼른 따라오라며 몸을 돌렸다.
“잠깐만요.”
가하란이 말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잠깐이면 돼요.”
눈앞에 보이는 노점으로 뛰어갔다. 달궈진 돌 위에서 소시지가 뒹굴고 있었다.
“핫도그 하나만 주세요.”
포장지에 싼 핫도그를 들고 랜더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이거요.”
챙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간식을 건넸다. 랜더가 웃으면서 음식을 받았다.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저 멀리 있는 칼리고와 테리, 제니가 얼른 오라며 손을 격하게 흔들고 있었다.
세 사람을 향해 뛰어갈 때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니?”
뒤에서 랜더가 질문했다. 가하란은 칼리고를 향해 뛰어가면서 크게 외쳤다.
“가하란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