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이게 바다 건너 사막 건너에서 온 아주 신기한 물건이란다. 너희들 이런 거 본 적 없을 거야.”
노점 주인이 반짝거리는 팔찌를 들어 올렸다.
“자, 봐봐. 이렇게 보면 붉게 빛나지만 이렇게 살짝 돌리면!”
팔찌가 노란색으로 빛났다. 제니가 와아, 하고 입을 벌린 채 바라봤다.
“이런 거 처음 보지?”
“네!”
“이게 원래 비싼 물건이야. 근데 이 아저씨가 여기까지 여행 오는 길에 사고를 당해서….”
주인이 팔찌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원래 제값 받고 비싸게 팔아야 하는 건데, 아저씨가 돈이 급하니까 싸게 줄게. 대신 너희들 비밀로 해야 해. 이거 싸게 판다고 소문 돌면 사람들이 너도나도 사겠다고 막 몰려들어서 난리도 아닐 테니까.”
“얼마에요?”
제니가 먼저 물었다.
가하란은 말리고 싶었지만, 한번 발동이 걸린 제니는 여간해선 말을 안 들었다.
“원래는 정말 비싼 건데, 아저씨가 인심 썼다! 이쪽에 있는 건 동화 2개, 오른쪽에 있는 건 4개. 찌그러지거나 망한 상단의 동화도 상관없어. 이 아저씨가 너희들 귀여우니까 그 정도는 이해해줄게.”
구리동전 2개란 말에 눈치를 보던 애들이 슬그머니 동전을 꺼내 들었다.
제니도 급하게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거 사려고?”
“어. 반짝거리는 게 예쁘잖아.”
“그렇긴 한데….”
동화 2개로 저걸 사는 게 맞는 건가?
“가하란. 너도 하나 사줄게.”
“난 괜찮아.”
“왜? 내가 사준다니까. 예쁘잖아.”
가하란은 제니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좀 비싼 거 같아.”
“나 돈 있어. 랜더 아저씨가 준 은화도 그대로 있고. 또 아빠가 잘 놀고 오라면서 동전 많이 줬어.”
제니가 주머니 안을 보여주며 활짝 웃었다.
“살 사람 다 샀나 보네.”
노점 주인이 제니에게 슬쩍 시선을 던졌다. 누가 봐도 꼬드기는 중이었다.
가하란은 다시금 제니를 붙잡았지만, 제니는 기어이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아저씨, 아저씨! 저 이거랑 이거 살게요.”
“아이고. 조금만 빨리 말하지. 이쪽 건 이제 안 팔아.”
“왜요?”
“물건에 문제가 있는 걸 지금 봤거든. 아저씨가 양심적인 사람이라 하자 있는 물건은 안 팔아.”
“그러면 어떻게 해요?”
“요기 있는 건 어때? 얘네는 달빛에도 반짝반짝 아주 예쁘게 빛나. 동전 4개 값은 하고도 남지. 이거 차고 애들한테 보여주면 다들 널 부러워하면서… 응? 어떠니?”
제니가 동화 4개짜리 팔찌로 시선을 돌렸다.
“아저씨가 슬슬 가봐야 해서.”
노점 주인이 보따리를 슬며시 싸매자 제니가 급하게 말했다.
“그거 2개 살게요.”
“그래?”
“네.”
주인은 오므렸던 보자기를 슬며시 풀더니 팔찌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기분이다. 두 개 해서 동화 일곱 개만 줘.”
“정말요?”
“고향에 있는 내 딸이 생각나서 싸게 주는 거야. 어디 가서 소문내지는 말고.”
노점 주인이 팔찌를 살랑살랑 흔들며 돈을 요구할 때였다.
“데옹, 여기도 일거리 있네.”
가하란은 고개를 돌렸다. 칼리고와 처음 보는 남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왜 이런 잡무까지 해야 합니까.”
“왜긴. 시민의 편의를 봐주는 게 우리 일이니까.”
“언제부터 저희가 그런 일을….”
“행정처 불쌍한 친구들이 부탁해 온 거니까 같이 해줘. 동료 좋다는 게 뭐야?”
“동료였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가 들쑤시는 바람에 업무가 많아졌고, 당연히 행정처리에 문제가 생겼고, 그걸 못 본 척하려니 양심에 찔려서….”
“단장님이 양심이요? 보나 마나 다른 거래를 하셨겠죠.”
골목 어귀에 모인 아이들을 비롯해 노점 주인까지 벙찐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가하란은 곁으로 다가온 이름 모를 남자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쳤는데 빙긋 웃어주고는 노점 주인에게 다가갔다.
“이쪽 골목은 노점 불가예요.”
“아, 그랬나요?”
“그렇게 보따리 풀고 장사하시려면 이 앞 거리에서 하셔야 해요.”
“제가 이 도시는 처음이라. 다음부턴 잘 지키겠습니다.”
멀건 웃음을 지으며 골목 안쪽으로 가려던 노점 주인을 남자가 붙들었다.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정산 제대로 하고 가셔야죠.”
노점 주인이 남자를 위아래로 살피자, 남자가 은색 배지를 보여주었다. 노점 주인 크게 웃으며 보따리를 풀었다.
“선생님 말씀대로 제가 계산을 잘못했네요. 자, 얘들아. 아저씨가 실수했단다. 자자, 이거 받고. 너도 이거 받고.”
동전을 돌려준 노점 주인이 멋쩍은 표정으로 인사한 후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수고했어.”
칼리고가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다른 곳을 살펴보겠다며 사라졌다.
“잠깐 안 보인다 싶더니, 이런 걸 사고 있었어?”
칼리고가 팔찌를 살피며 말했다. 가하란은 칼리고에게 다가가 질문했다.
“방금 그 아저씨는 누구예요?”
“내 밑에서 일하는 성실한 친구. 근데 제니야, 이거 나 주려고 산 거야? 되게 예쁜데.”
칼리고가 팔찌를 흔들며 말했다. 제니는 방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표정과 달리 단호한 말투였다. 팔찌를 넘겨받은 제니가 가하란을 바라봤다.
“이거, 선물.”
“난 괜찮은데.”
“그냥 받아. 주면 받는 거라고 아빠가 그랬잖아.”
주춤거리고 있자 기어이 손목을 낚아채 팔찌를 끼운다.
가하란은 반짝거리는 팔찌를 바라봤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부담스럽다. 애들이 보면 놀릴지도 모른다.
슬그머니 빼려고 했지만, 제니가 째려보고 있는 바람에 실패했다. 팔찌에 손을 대면 씩씩거리며 달려들 기세였다.
“테리 형은요?”
칼리고 옆에 있어야 할 테리가 보이지 않았다. 칼리고가 손가락을 들어 골목 밖을 가리켰다.
“아주 재미난 걸 구경 중이야.”
칼리고를 따라 골목 밖으로 나왔다. 길게 늘어선 노점을 훑다가 테리를 발견했다.
또래 애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이번에는 1번이야!”
“아니, 4번이 1등이야.”
뭔가 했더니 사슴벌레 레이스였다. 1등을 맞추면 커다란 사탕을 주는 것 같았다.
“형, 뭐 해.”
가하란은 테리 옆에 앉으며 물었다. 사슴벌레를 보고 있는 형의 눈이 퀭했다.
“가하란.”
“응?”
“용돈 남은 거 있어?”
“형 설마….”
“있으면 빌려주라. 이번에는 진짜 맞힐 수 있어. 5번. 5번이 확실해. 아까도 쟤가 이겼어!”
침까지 튀겨가며 왜 5번이 이기는지 설명하는 테리였다. 가하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형. 저 사탕 필요해?”
“사탕? 무슨 사탕?”
이미 상품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더 보자며 버티고 앉은 테리를 있는 힘껏 잡아끌었다.
“멍청이. 누가 돈을 그렇게 쓰냐?”
제니가 옆에서 한마디 했다. 테니가 눈을 와락 찌푸렸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넌 어려서 몰라. 어른의 놀이를 말이야.”
“그래봤자 세 살 차이면서. 너도 애야.”
“저번에 말했지? 오빠라고 하라고!”
“난 멍청한 오빠 둔 적 없는데?”
테리를 한껏 놀리며 도망치는 제니였다. 테리도 눈이 뒤집혀 제니를 쫓아갔다.
“내가 여관에 머무르면서 쟤들이 저렇게 싸우는 걸 14번은 본 것 같다.”
칼리고가 말했다.
“아저씨가 그 정도면 전 어떻겠어요.”
안 싸우면 이상할 정도라 저렇게 티격태격하는 게 오히려 안심될 정도다.
칼리고가 가하란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고생이 많았겠네.”
“저도 가끔 화나면 같이 싸우니까 괜찮아요.”
난리를 치던 남매가 어느 순간 사이좋게 사슴벌레 앞으로 갔다. 성질을 부리는 것도, 화해를 하는 것도 순식간이다.
“슬슬 여관으로 돌아가야겠다.”
칼리고가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왜요? 거병 봐야 하는데.”
“봐야지. 근데 아저씨 친구들이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그 친구들하고 같이 볼 거야.”
“아저씨 친구요?”
가하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랜더 씨하고 구치 씨. 너도 몇 번 보지 않았어? 여관에 자주 왔으니 마주쳤을 텐데.”
아, 가하란은 머쓱한 얼굴을 하며 귀 뒤쪽을 만지작거렸다.
“본 적 없어?”
“아니요. 몇 번 여관에서 봤어요. 랜더 아저씨는 못 봤지만, 구치 아저씨는….”
근데 이걸 봤다고 해야 하나. 산페르 때문에 얼굴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일 있었어?”
말끝을 흐리자 칼리고가 되물었다. 가하란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래?”
칼리고가 테리와 제니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잠깐 기다려라. 난 저 도박꾼들을 데려올 테니까.”
“네.”
칼리고가 움직였다. 가하란은 곧바로 뒤로 돌아서 작게 말했다.
“산페르 아저씨. 듣고 있죠? 듣고 있는 거 다 알아요.”
대답이 없었다.
“진짜 이럴 거예요? 요즘에 귀찮게 안 했잖아요. 대답해 주세요.”
발을 동동 구르며 산페르를 찾았다. 얼마 후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에 힘써서 상당히 피곤해.
“알아요. 저 구해 주시느라 그런 거. 그땐 정말 감사했어요.”
도깨비와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말했다.
-알면서 왜 찾아. 안 그래도 집착증이 심한 토끼 때문에 최대한 몸을 사리고 있는데.
“그게요.”
가하란은 곧 구치와 만나게 된다는 걸 알려줬다.
“저번에 아저씨한테 부탁한 거 잊지 않으셨죠?”
-네 눈을 빌리지 말라는 거?
“네! 이번에도 땅만 보고 있으면 버릇없는 애라고 혼날 거예요.”
-알겠어. 알겠으니까 나 그만 찾아. 층을 넘어서까지 네 사념이 전달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산페르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약속도 받았으니 오늘은 구치 아저씨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겠지. 매번 쭈뼛거리며 땅만 보고 있었으니 아저씨도 곤란했으리라.
“가자.”
칼리고가 돌아왔다. 오른손에 제니, 왼손에 테리를 붙잡고 있었다.
“자.”
멀거니 서 있는 가하란을 향해 테리가 손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씩 웃으며 형의 손을 잡았다.
“기동식이 시작할 때쯤에는 사람이 더 몰릴 거야. 그러니까 아저씨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 알겠지?”
“우리도 알아서 할 수 있어요.”
테리가 턱을 살짝 들며 말했다.
밀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여관 앞까지 갔다. 도로 건너편, 루드 여관이 보인다.
가하란은 여관 출입구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선이 굵은 사람이었다. 짙은 눈썹에 우묵한 눈. 팔짱을 낀 채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에서 침착함과 동시에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가하란은 남자의 신발을 보았다. 몇 번이고 본 그 부츠가 맞았다. 저 사람이 ‘구치’ 아저씨구나.
실력 좋은 사냥꾼이란 말을 들어서 그런지 관록이 느껴졌다. 다정했던 목소리와 달리 냉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구치 아저씨!”
제니가 달려 나갔다. 딱딱한 표정을 짓던 구치가 금방 웃음을 짓더니 제니를 번쩍 안아 들었다.
냉정해 보이던 얼굴이 금방 사라졌다. 위압감은 살짝 남아 있지만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른 가서 인사해야지.
물어보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다. 미개척지는 어떤지, 랍파와 여행하는 건 어떤 느낌인지, 신기한 동물을 본 적이 있는지.
들뜬 마음을 달래며 걸음을 뗄 때였다. 옆에 있던 칼리고가 몸을 틀더니 손을 위로 치켜들며 크게 외쳤다.
“랜더 씨! 빨리 오십시오. 늦장 부리다가는 좋은 자리 다 놓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