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24화 (97/558)

제124화

헌트가 품에 넣은 철제 케이스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궐련 한 개비를 남자에게 주었다.

“고맙습니다.”

남자가 담배를 물었다. 자연스럽게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세상 참 편해졌죠? 마나를 거의 다루지 못하는 자들도 이런 걸로 불을 붙일 수 있고. 기술개발국 사람들은 역시 똑똑해요.”

“세상이 좋아졌다고 한들 소통의 한계는 여전하죠.”

헌트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말이란 건 결국 허울이에요.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죠. 그러니 필요한 겁니다. 장벽을 거둬내는 과정이.”

남자가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눈에 익은 수첩이었다.

“특수감찰단이군요.”

“예. 그쪽은 둔 독립2군이고요.”

남자가 담배를 어금니에 물며 말했다. 발음이 약간 뭉개졌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등 중사 헌트. 연극단 시험을 앞둔 따님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뒷조사할 시간이 있었나 보군요.”

“이 정도는 뒷조사 축에도 못 낍니다. 업무 보면서 대강 들었죠.”

헌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층층이 쌓인 하얀 구름이 서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그쪽 이름은 뭡니까?”

“서로 이름을 알아봤자 좋을 게 있습니까?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일 텐데. 선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다음에 만나는 건, 장벽이 걷힌 후겠죠.”

남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꽁초가 날아가며 맞은편 담벼락에 부딪혔다.

“그래도 통성명을 안 하면 섭섭하겠죠? 리앙입니다. 선견자가 모든 걸 알고 있으면, 제가 여기서 이름을 밝히는 것까지 예상했겠죠.”

“선견자를 시험하는 듯한 말이군요.”

“신이잖아요, 선견자는. 모든 게 정해진 수순대로 나아간다고 공언했고. 근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분의 말을 받잡고 개미처럼 일하는 우리가 만약 배신해 버린다면?”

헌트는 반쯤 타고 남은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불똥이 리앙의 구두코 쪽으로 튀었다.

“나는 광신도처럼 믿음을 강조할 생각은 없지만, 허튼짓하는 놈을 내버려 둘 생각도 없습니다.”

허리춤에 찬 칼집에 손을 가져댔다. 리앙이 양손 손바닥을 내보였다.

“분위기 험악하게 만들지 마세요. 배신 같은 그런 거창한 걸 하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그저 살길은 찾아둬야 한다는 겁니다. 미래가 불변하고 확정된 거라면, 지금 우리의 대화도 선견자가 예측했겠죠. 예측했으니 아무 문제 없도록 조처했겠고. 결국 그런 겁니다. 정말로 선견자가 신이고, 이 세상을 바꿔버릴 수 있다면 우리의 개별적인 행동은 별 의미가 없다는 거.”

리앙이 쪽지를 내밀었다.

“확정된 예언입니다.”

쪽지를 펼쳤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읽었다.

“‘내년 3월. 성도 붕괴. 시민을 주축으로 제국 재편성.’”

“그대로 이뤄진다면 아주 볼만할 겁니다.”

“지금껏 선견자의 예측이 어긋난 적은 없습니다.”

“예, 그러니 저도 따르는 거고요. 물론 그래도 대비는 해놔야겠지만.”

헌트는 쪽지를 잘게 찢어 입에 넣고 삼켰다.

“그쪽은 어떤 일을 맡게 됐습니까?”

리앙이 물었다. 헌트는 입을 다문 채 몸을 돌렸다. 어차피 모든 건 결정돼 있었다. 의견을 주고받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약속의 날이 오면 그때 또 봅시다.”

밝은 톤의 인사가 뒤통수로 날아들었다. 헌트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골목을 빠져나왔다. 오른편에 꼬치를 파는 점포가 있었다. 꼬치 몇 개를 사 들고 다음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죄송합니다!”

헌트는 몸을 치고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바라봤다. 중앙 광장으로 몰려드는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거병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서두르는 것이다.

광장 외곽, 이름 모를 조각상 옆에 섰다. 꼬치를 한입 물며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애처럼 그런 걸 들고 있어?”

루카가 핀잔을 주며 다가왔다. 헌트는 눈웃음 지으며 꼬치를 내밀었다.

“그래서 안 먹게?”

“먹어야지.”

꼬치를 뜯으며 루카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도 총집사 곁에서 일하고 있냐?”

“이곳을 떠나실 때까지 계속 붙어 있을 것 같아.”

“이러다 세나티아 가로 차출되는 거 아냐?”

“그것도 나쁘진 않지.”

루카가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는 넌 유렐 취조부장하고 자주 만난다던데.”

“그건 또 어디서 들었대?”

“군부가 좀 좁아야지.”

“하긴. 숨어서 만난 것도 아니고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하긴 하지.”

헌트는 나무 꼬치를 바닥에 버렸다.

“센터라인에 관심이 생겨서.”

“둔 중앙부 위쪽으로 올라가고 싶다?”

“언제까지 외부로 돌아다닐 순 없잖아. 너도 알다시피 독립2군에서 현장 업무 계속 보는 사람은 없어. 다들 줄 잡아서 자리를 옮기지.”

“난 네가 데스크보다는 필드를 선호하는 줄 알았는데.”

헌트는 돼지고기 꼬치를 입에 물며 말했다.

“루카. 너나 나나 홑몸이 아니잖아. 게다가 돈 들어갈 구석은 점점 더 늘어나고.”

“딸이 위넨 극단 시험을 본다고 했었지?”

“어. 저번에도 말했지만, 연금 까먹는 것도 이제는 힘드니 내가 위로 올라가야지. 아빠 노릇하려면 돈 열심히 벌어야 해.”

씩 웃으며 대화를 끝냈다. 꼬치를 우물우물 씹던 루카가 광장 중심부를 보며 물었다.

“헌트. 저번에 말했던 거 말이야.”

“저번에? 무슨 말?”

“그 운명 어쩌고저쩌고 했던 거.”

“아, 그거.”

헌트는 별일 아니라고 대답한 뒤 말을 이었다.

“그냥 힘들어서 헛소리한 거야. 친구 놈이 아잔탄스 일에 휘말려 그렇게 가버리고, 좀 허탈해져서 그냥 해본 말이야.”

“내가 아는 헌트는 농담은 자주 해도 그런 식의 헛소리는 안 하는 친구인데.”

헌트는 슬쩍 루카를 보았다. 진중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친구, 정말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 그렇기에 푸념하듯 선견자에 관한 것을 털어놓았다.

대충 흘려듣고 넘길 친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설득하고 말려주길 원했을지도.

헌트는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정말 심각한 일 아니라니까 그러네.”

“믿어도 되는 거냐?”

“그렇다니까. 운명이고 나발이고, 돈 벌기 바빠. 정 걱정되면 좋은 건수나 찔러줘. 돈 빌려달라는 소린 안 할 테니까.”

그제야 풋 웃는 루카였다. 관찰하던 눈빛이 사라진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이상한 종교에 빠진 줄 알았어.”

“종교? 이교도로 신고해서 포상금 타려고 했냐?”

“그 정도로 되나. 잘 지켜보다가 교주 같은 거 잡아서 특진해야지.”

“그래. 나 팔아서 특진하고 잘 살아라.”

헌트는 남은 꼬치를 루카에게 주었다.

“이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대로를 이용해주세요!”

행정처 관료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인파가 몰리다 보니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올해도 몇 명 깔려 죽겠군.”

“애들이 가장 걱정이지. 거병 보겠다고 부모 손 놓고 뛰다가 넘어지면, 그 뒤론 생각하기도 싫어.”

헌트는 도로에 늘어선 짐마차를 보았다. 낯선 상단 깃발이 걸려 있었다.

“연합왕국에서 온 상단인가?”

“그런 것 같은데.”

“저걸 보니까 전쟁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나네. 근데 상인들은 가만 보면 겁이 없어. 무역협정 맺었다고 한들 제국민들이 달갑지 않게 볼 텐데.”

“선점해서 돈 벌려면 그 정도는 감내해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가 짐마차를 향해 돌을 던졌다. ‘왕국의 개들은 물러가라’, 이런 구호도 들려왔다.

출동한 경비대에게 제압돼 끌려갔지만, 처분을 받진 않을 것이다.

“아, 루카. 너희 애들도 성도로 보낼 거지?”

헌트는 슬쩍 운을 띄웠다.

“어.”

“언제쯤 보내게?”

“글쎄. 애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출발하겠다고 하거든? 시기상 지금 출발하면 늦어도 겨울 초입엔 성도에 도착할 테니까….”

헌트는 루카를 툭툭 쳤다.

“그냥 내년 봄까지 참아.”

“봄까지?”

“어. 3월 지나서 좀 따뜻해질 때즘 보네. 괜히 애들 고생시키지 말고.”

“지금 9월인데 뭘. 지금 보내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

“내 말 들어. 응? 내가 먼저 보내봐서 알잖아. 4월쯤에 애들 보네. 둔에서 성도로 가는 길목이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야. 게다가 올해 겨울은 일찍 찾아온다고 하고.”

루카가 살짝 웃었다.

“그런 소리는 또 어디서 들었어.”

“다 듣는 곳이 있어요. 아무튼 내년까지 미뤄. 그리고 애들하고 시간도 보내고. 나처럼 일찍 보내놓고 후회하지 말고. 알겠어?”

헌트는 눈웃음을 지으며 친구를 바라봤다. 여기서 더 설득하려 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선견자의 예언대로라면 내년 3월, 성도는 붕괴한다.

붕괴가 체제의 붕괴인지, 아니면 물리적인 붕괴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도는 혼돈 한 가운데로 떨어질 것이다.

그 일이 벌어질 때 성도에 있으면… 개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선배의 조언은 들어야지. 나도 애들 일찍 보내기 싫었어.”

“그래. 어릴 때 많이 봐둬야 해. 크면 소용없어.”

안도하며 루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뒤에 일정은?”

“오늘은 비번이야.”

“그러면 걸어 다니는 쇳덩이나 보러 가자고. 1년에 한 번 돈지랄하는 건데, 봐줘야지.”

웃으면서 몸을 돌리는데, 의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루카 역시 그 남자를 발견했는지 멈칫했다.

“저 양반이 왜…….”

특수감찰단 단장, 칼리고가 양손에 솜사탕을 든 채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쭉 빼 단장의 동선을 살폈다. 단장이 멈춘 곳에 아이들이 있었다.

남자애 둘과 여자애 하나.

애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저건 또 무슨 조합일까.”

루카가 물었다. 헌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인간 생각을 어찌 알겠어. 어차피 사건도 종결됐겠다, 우리가 눈치 볼 이유는 없지.”

“그래도 마주치고 싶지는 않아.”

“그건 그래.”

헌트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단장과 최대한 거리를 두면서 중앙 광장으로 이동했다.

* * *

“자, 제니는 파란색. 테리는 노란색. 가하란 넌 빨간색.”

가하란이 솜사탕을 향해 손을 뻗을 때였다. 제니가 한마디 했다.

“난 빨간색이 좋은데.”

칼리고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가하란은 빨간색 솜사탕을 제니에게 건넸다.

“자.”

“역시 가하란이 최고야!”

솜사탕을 덥석 낚아챈 제니가 곧바로 입에 가져갔다.

가하란은 솜사탕을 앞뒤로 살피며 칼리고에게 물었다.

“아저씨. 솜사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거? 뜨거운 불과 설탕이 팡! 하고 만나면 슈르륵 하고 실이 돼.”

“…네?”

“그냥 먹어. 먹을 때 그런 거 생각하면 못써. 옆에 있는 애들을 봐.”

가하란은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테리와 제니는 솜사탕을 뜯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너 이거 알아야 한다. 솜사탕은 엄청 비싸다는 걸.”

“네.”

“그러니 체스에 관한 건 비밀이다. 소문내지 마. 특히 테리한테는.”

눈을 찡긋거리는 칼리고였다. 가하란은 솜사탕을 조금 뜯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동식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돌아다니면서 구경하자. 올해는 연합왕국 상단도 들어와서 볼 게 꽤 많으니까.”

“네!”

“그러면 부하 1호, 2호, 3호는 대장인 나를 따르도록!”

칼리고가 과장된 몸짓을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