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딴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에요.”
가하란은 다시금 입맛을 다셨다. 점심을 먹고 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 맛의 여운이 입 안에 남아 있었다.
“몇 번을 먹어도 만족하는 맛이란 정말 진귀한 거지. 그런 면에서 밀리언, 그 아이는 정말 소중해. 마음 같아서는 옆에 끼고 살고 싶지만 가족이 있는 애한테 그럴 순 없지.”
다리를 쭉 뻗으며 나른한 표정을 짓는 브라인이었다.
가하란은 조심스럽게 브라인의 왼쪽 귀를 들어 올렸다. 상대적으로 짧은 털이 뻣뻣하게 뭉쳐 있었다.
빗으로 살살 긁으니 회색빛 털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거기 시원하네.”
“이쪽이요?”
“어. 살살 빗어봐.”
브라인의 지시에 따라 빗질 방향을 바꿨다.
“저기, 브라인 님.”
“꼬마야. 이 아늑한 시간을 꼭 방해해야겠니?”
“점심 먹을 때도 조용히 있으라고 했잖아요.”
“…짧게 질문해.”
가하란은 식당에서 만난 칼리고를 떠올렸다.
“칼리고 아저씨를 아세요?”
“너만큼이나 시끄러운 애라면 알고 있지.”
“아저씨가 브라인 님을 누님이라고 불렀어요.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가요?”
“어릴 때, 내 눈에는 늙어빠진 인간도 다 어려 보이지만… 아무튼 걔가 어렸을 때 안면을 텄지. 처음 만날 때부터 이상한 녀석이었어.”
“재밌는 아저씨던데요?”
“너나 재미있겠지. 동류니까. 그렇게 말 많은 녀석은 내 인생을 되돌아봐도 손에 꼽을 정도였어.”
브라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 녀석 이야기는 그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시끄러워져.”
가하란은 슬쩍 브라인 얼굴을 바라봤다.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
달싹거리는 입을 꾹 붙들어 매고 천천히, 부드럽게 빗질을 이어나갔다.
“주무시나 보네.”
정리할 것이 있다며 보관서 밖으로 나갔던 셀베이아가 다시 돌아왔다.
“깊게 잠드신 거 같아요.”
가하란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돼. 어차피 다 듣고 계시니까.”
“정말요?”
“의식을 살짝 분리해 놓으신 거야. 정말로 깊게 잠드셨다면 기록보관서가 완전히 닫혀. 캐비닛들도 멈추고.”
가하란은 어둠 속을 바삐 뛰어다니는 캐비닛을 보았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누나 말대로 깊은 잠에 빠진 건 아닌 듯했다.
“다 끝난 거야?”
“네.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가하란이 빗자루로 바닥에 떨어진 털을 모았다. 한데 그러모으니 부피가 상당했다. 툴의 절반 정도는 되겠는데?
“여기 담아.”
셀베이아가 자루를 벌려줬다. 털들을 들어 올려 자루 안에 쑤셔 넣었다.
“이거 베개로 써도 될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시내에 있는 보육원에 보내고 있어.”
“보육원이요?”
“대령님이 아주 오래전부터 관리해온 곳이야. 공동보육은 성체의 의무라고 했었나? 뭐, 그런 이유로 꾸준히 그쪽 애들을 살펴보고 계시지.”
가하란은 고개를 삐딱하게 숙인 채 잠이 든 브라인을 바라보았다.
“멋지신 분이네요.”
“멋지면서 동시에 글러 먹었지.”
셀베이아가 담요를 팡팡 턴 다음 브라인에게 다가가 덮어주었다.
“오늘은 예약 손님이 없어서 이제 할 일도 없는데, 어떻게 할래?”
“그러면 여기서 책 읽을래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나도 옆에서 같이 읽을게.”
셀베이아가 의자를 가져왔다. 브라인처럼 허공에 손짓하니 노란색 캐비닛이 성큼 다가왔다.
“누나도 조종할 수 있는 거예요?”
“이거 하나만. 대령님이 내게 허락해주신 거거든.”
“안에 뭐가 들었어요?”
“별거 없어. 최근에 읽다 만 소설이 몇 개 있지. 대령님이 모아둔 소설이 엄청 많거든. 직접 쓰신 것도 있고.”
셀베이아가 두꺼운 책을 꺼내 들었다. 화려한 색채로 그려진 꽃들이 커버를 장식했다.
“대충 이런 것들?”
“나중에 읽어봐도 되나요?”
“음, 너한테는 조금 일러. 나이가 좀 더 들면 그때 보여줄게.”
셀베이아가 소설책을 캐비닛에 집어넣었다.
“넌 뭘 보고 있었는데?”
“전 이거요.”
보다가 말았던 파일을 들어 올렸다.
“‘체구와 신체술의 상관관계.’ 신체술에 관심이 있어?”
“네. 저도 브라인 님처럼 하늘을 날 듯이 뛰고 싶어요.”
발밑으로 펼쳐진 도시 전경이 지금도 생생했다. 사람이 왜 새처럼 날고 싶어 하는지, 하늘을 동경하게 되는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대령님의 신체술은 특별하지. 마법에 가까울 정도로.”
“다른 사람은 그렇게 못 해요?”
가하란은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신체술이라고 해서 엄청 대단한 건 아니야. 대령님처럼 상식 밖의 운동능력을 보여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악력이 조금 세지거나 눈이 조금 더 밝아지는 정도니까.”
신체술을 잘 아는 듯한 말투였다. 가하란은 파일을 옆으로 치우며 물었다.
“누나. 누나도 신체술을 쓸 수 있어요?”
“쓸 수야 있지.”
“정말요? 보여줄 수 있어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아. 아까도 말했지만 대령님 같은 신체술은 아주 특이한 경우니까.”
셀베이아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내 앞으로 와볼래?”
시키는 대로 했다. 앞에 선 다음 셀베이아를 올려다봤다.
“신체술을 안 쓴 상태에서 널 들면.”
셀베이아가 가하란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들어 올렸다. 끙, 앓는 소리가 입을 비집고 나온다.
“너, 생각보다 무겁구나.”
“잘 먹어서 그런가 봐요.”
바닥에 내려왔다. 짧은 시간 사이에 셀베이아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힘을 잔뜩 준 모양이었다.
“여기서 신체술을 사용하면.”
셀베이아가 가하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조금 전과는 달리 아주 가뿐하게.
“힘이 세진 거네요?”
“육체를 강화하는 게 신체술이니까. 근데 오랫동안 유지하는 건 힘들어.”
셀베이가 작게 숨을 토해내며 가하란을 내려놓았다.
“실생활에서는 그럭저럭 편리하긴 해. 무거운 들어 올릴 때나 조금 빨리 달려야 할 때?”
“브라인 님처럼 높이 뛰는 건….”
“난 못 해.”
셀베이아가 허리를 톡톡 치면서 자리에 앉았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신체술을 사용하면 반발력이 생겨서 몸에 무리가 가.”
“오랫동안 쓰면 많이 아파요?”
“내 경우에는 3분 정도 지속하면 맥이 탁 풀려. 오랫동안 뛰다가 멈춘 것처럼 힘이 안 들어가. 그러니 장시간 유지하는 건 고된 훈련을 마친 사람들이나 가능하지.”
가하란은 셀베이아 옆에 바짝 붙었다.
“저도 배울 수 있는 건가요?”
“신체술 자체는 아주 쉬워. 훈련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다지만, 입문자들에게 가르치는 것들은 비슷해.”
“그러면….”
셀베이아가 손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가하란은 질문을 멈추고 누나의 입을 바라보았다.
“신체술을 사용하는 데 뭐가 필요한지 알아?”
“마나요.”
“그게 문제야. 신체술을 단련하는 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신체술 터득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단계, 즉 마나를 감각하는 건 그 누구도 알려줄 수 없어.”
가하란은 입을 살짝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챠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기 혹은 마나라 불리는 힘은 스스로 깨우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셀베이아가 노란 캐비닛에서 가위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 가위로 종이를 자르는 방법은 다양하겠지?”
가위가 종이를 가로질렀다. 가위질이 몇 번 이어지자 종이가 꽃 모양으로 바뀌었다.
가하란은 꽃 모양 종이를 두 손으로 받았다.
“같은 종이와 가위지만 공예가 손에 들어가면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나올 거고, 어린애 손에 들어가면 의미를 알 수 없는 종이 조각이 나오게 될 거야. 신체술도 마찬가지고.”
가하란은 셀베이아가 쥐고 있는 가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면 이 가위가 마나겠네요.”
“그렇지. 이 가위는 다른 사람이 선물해줄 수 없어. 만드는 법을 가르쳐줄 수도 없고. 자신이 발견해 내야 해.”
꽃모양 종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되물었다.
“누나는 어떤 식으로 마나를 알게 됐어요?”
“3년 전쯤이었어. 평소처럼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고 일정을 점검하고 있었지. 펜을 들고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통일감이라고 해야 하나?”
“통일감이요?”
“말로 설명하려니까 까다롭긴 하네. 내 주변 2m 정도가 마치 내 몸처럼 느껴졌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였고.”
먼지가 느껴진다는 건 대체 어떤 경험일까? 호기심이 점점 더 커진다.
“곧바로 대령님께 상담했고, 바로 알게 됐지. 마나를 느끼게 됐다는 걸.”
“누나, 누나. 마나는 어떤 느낌이에요? 차가워요? 거칠어요? 아니면 소리 같은 게 나요?”
셀베이아가 작게 웃었다.
“그것도 사람마다 달라. 난 굉장히 날카로운 물건을 만진 것처럼 따끔거렸는데, 대령님 같은 경우는 달리 느껴지는 게 없대. 어떤 군인분은 아주 차가운 바람이라고 설명했고, 또 다른 분은 불덩이를 삼키는 것 같다고 했지.”
가하란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나가 무엇인지, 체험해보고 싶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 이건 대령님께서 말씀해주신 건데,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게 좋대.”
“저도 그러고 싶은데, 이렇게 들어버린 이상 계속 생각날 것 같아요.”
나중에라도 느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평생 마나와 친해지지 못하면 어쩌지?
“누나. 마나를 못 느끼는 사람이 많나요?”
“살다 보면 다들 한 번씩은 느낄 수 있대. 근데 그걸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 나처럼 단순한 사용법 외에 마법으로 발전시키는 사람은 더더욱 적고.”
하늘을 나는 건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남겨야 하나. 실망감이 꽤 컸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가하란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셀베이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책상 쪽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다더니, 브라인이 작게 말했다.
“마나 같은 거 몰라도 세상 사는 데 아무런 문제 없어. 그러니 실망하지 마.”
캐비닛 하나가 쿵쿵 뛰면서 다가왔다.
가하란 앞에서 서랍을 하나씩 빼는데, 마치 밟고 올라가란 듯이 계단 모양을 만들었다.
셀베이아가 가하란 등을 살며시 밀었다.
“올라가 봐.”
가하란은 서랍 끝을 밟으며 캐비닛 위로 올라갔다.
“안 떨어지게 잘 잡고 있어.”
브라인의 말에 가하란은 자세를 낮추고 캐비닛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캐비닛이 둥실 떠올랐다. 꽤 빠른 속도로 주변을 날아다녔는데, 가하란은 신이 나서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들이켰다.
“질리도록 날고 와. 그리고 조용히 있어.”
밑에서 브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음기가 살짝 감돌고 있었다.
* * *
헌트는 반쯤 태운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군화로 비벼 껐다.
거리가 시끌벅적했다. 거병 기동식에 맞춰 축제가 시작되는 터라, 길거리에 점포들이 늘어섰다.
와아아, 하고 달려오는 아이들을 피해 옆으로 비켜섰다. 헌트는 웃는 눈으로 멀어지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죄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약속의 날은 반드시 이뤄져야 했다.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자가 밀지를 내려보냈다.
둔 골목을 누비며 약속된 장소로 이동했다. 오물이 쌓인 담벼락 옆에 서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 때였다.
“저도 하나 주시죠.”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 남자가 나타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