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없어요. 단 한 번도.”
칼리고가 활짝 웃었다. 어금니까지 훤히 보이는 웃음이었다.
“체스는 언제 배웠는데?”
“얼마 안 됐어요. 얼마 전에 아는 형이 체스 가르쳐준다고 했거든요? 아, 근데 테리 형 아세요? 제니 오빠인데.”
“테리 알지. 요즘 걔네랑 잘 놀고 있거든. 근데 테리가 체스에 관심을 가진 건 진짜 최근인데.”
“저도 그쯤 아빠한테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그래, 그랬구나. 그렇구나. 정말로 체스를 배운 지 얼마 안 됐구나.”
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칼리고가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흑백의 기사들이 체스보드 위에 우뚝 섰다.
“좋아. 사나이 대 사나이, 공정한 게임을 해보자. 내가 이기면 너는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거야. 지금 당장은 아니고 네가 좀 더 자라면 그때 데리러 올게.”
“제가 이기면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줄게. 그러면 초능력의 비밀도 풀릴 거야.”
“제가 손해 보는 느낌인데요.”
“알지, 알지. 그러니까 이건 어때?”
칼리고가 백색 나이트 두 개와 폰 두 개를 보드 밖으로 뺐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말을 네 개나 빼고 시작하는 거예요?”
가하란은 보드와 칼리고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기물 네 개나 빼고 하는 체스는 둬본 적이 없다. 말도 안 되게 불리할 텐데.
“테리랑 할 때도 비슷하게 했어. 어때? 나쁘지 않지?”
“정말 이대로 하는 거죠?”
“그렇다니까.”
칼리고가 손짓했다. 가하란은 의자를 당겨 체스판 옆으로 다가갔다.
체스 말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데, 보드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셀베이아였다.
“애 상대로 뭐 하시는 거죠?”
“정정당당한, 사나이들의 자존심을 건 대결 중입니다. 끼어드시면 안 돼요.”
“단장님.”
셀베이아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칼리고를 바라봤다.
“누나. 저 이 게임 할래요.”
“얼핏 들으니까 장난으로 하는 게 아니던데? 뭘 걸고 하는 거잖아.”
“괜찮아요. 아저씨 말대로 남자 대 남자의 대결이니까.”
가하란은 검은색 폰을 살며시 쥐었다.
“할게요.”
“그래야지. 역시 올란트를 닮았어.”
“제가 이기면 다 알려주셔야 해요.”
“나는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이야. 네 질문에 다 답해줄게. 대신, 너도 약속을 지켜야 해. 나중에 너희 아빠가 반대해도 내 편을 들어야 하고. 할 수 있겠어?”
“아빠는 아마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제 선택을 믿어 주시니까요.”
“좋아.”
가하란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홀 곳곳에 퍼져 있던 직원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게임이란 게 구경꾼이 많을수록 신나는 법이지. 꼬마야, 혹시 불편하지 않지?”
“괜찮아요.”
가하란은 손에 쥔 폰을 내려다보았다. 밀레나와 체스를 안 둔 지도 꽤 됐다. 오랜만에 집중하는 건데, 잘 되려나.
“단판으로 할까?”
“아저씨가 정하세요.”
“그래? 그러면 일단 둬보자. 그 뒤에 네 의견을 받아서 몇 판을 할지 정해줄게.”
“네, 그렇게 해요.”
흑과 백이 교차한 격자무늬.
네모난 칸 안에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디에 말을 올릴지, 어디서 말을 뺄지. 상대의 기물을 밀어 칠지, 아니면 끌어들일지.
맞닿은 네모 칸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구성했다.
기물 네 개나 없기 때문에 그림이 좀 더 단순해졌다. 밀레나 누나랑 뒀을 때보다 수읽기가 편하겠지.
아저씨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아빠와 비슷하다면 아마 이기기 힘들 것이다.
사실 승패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기면 좋겠지만, 져도 나쁠 건 없다.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거니까. 즐거움이 추가되는 것이다.
“먼저 둘게요.”
“천천히 둬도 돼. 많이 생각하고.”
“그럴게요.”
대답과 달리 손은 막힘없이 움직였다.
우선, 폰을 앞으로.
* * *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칼리고는 앞니 사이에 엄지를 두고 강하게 물었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다른 수는 없을 거예요.”
맞은편에 앉은 꼬마가 힘주어 말했다.
칼리고는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15년 전에 겪었던 굴욕의 순간이 떠오른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체스를 배운 지도 얼마 안 된 애한테?
칼리고는 눈을 잔뜩 찡그리며 킹을 바닥에 눕혔다. 변명할 거리가 없는 패배였다.
“핸디캡을 둘 수준이 아닌 거 같은데.”
“그러니까요.”
가게 직원들의 속삭임이 귀를 파고들었다. 칼리고는 주섬주섬 기물을 주워 담아 보드에 세웠다.
“가하란.”
“네.”
“몇 판 할 건지 아직 안 정했지? 그렇지?”
“네. 안 정했어요.”
“그래서 말인데, 단판은 너무 아쉽지 않아? 딱 세 판. 세 판 안에 결정 내자. 어때? 좋지?”
“글쎄요.”
가하란이 셀베이아를 바라본다.
“누나, 저희 돌아갈 시간이죠?”
“시간이 조금 남긴 해. 15분 정도?”
칼리고는 홀 매니저를 붙들며 말했다.
“셰프님한테 시간 얼마 남았는지 좀 확인해주세요.”
홀 매니저가 조리실에 다녀왔다.
“20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다행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가하란. 한 게임 더 하자. 어때?”
“꼭 해야 해요?”
“판수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거니까. 응? 너 약속 잘 지킨다며. 결정권을 나한테 준 거 기억하지?”
“근데 20분이면….”
“불렛룰 어때?”
칼리고는 재빨리 기물을 세웠다.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내기고 뭐고, 이대로 패배를 떠안은 채 게임을 마무리할 수 없었다.
15년 전에도 올란트한테 박살이 났는데, 그 아들한테도 혼쭐이 난다고?
그럴 수야 없지.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게다가 상대는 이제 일곱 살이었다.
물론 성도에 가면 체스마스터와 자웅을 겨루는 여섯 살 꼬맹이가 있지만, 눈앞에 있는 애가 그 꼬마는 아니지 않은가!
몇 없는 취미가 체스였다. 제법 잘 둔다는 소리도 들었다. 준 공한테도 어느 정도 인정받았고. 반쯤 어거지긴 했지만.
아무튼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불렛룰이 뭔가요?”
“생각을 짧게 하는 거야. 우린 시간이 없으니까 한 수를 두기까지 10초 정도?”
“10초 내로 다음 수를 둬야 하는 거예요?”
“그렇지. 어때? 재미있겠지?”
칼리고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가하란을 보았다.
“어려울 것 같지만… 재미있어 보이니 해볼게요.”
“그래. 탁월한 선택이야. 이 아저씨, 정말 감동했다.”
“대신 이번이 마지막 판이에요. 시간이 정말 없어요.”
“당연하지. 아저씨가 그렇게까지 구차한 사람이 아니에요.”
어디선가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도 아주 구차해 보여요.”
칼리고는 셀베이아를 째려봤다. 셀베이아는 턱을 살짝 치켜든 채 시선을 받아냈다. 냉랭하다, 냉랭해.
먼저 눈동자를 돌린 건 칼리고였다. 드잡이할 시간이 없었다.
“체스를 둔다기에 무슨 소린가 했더니.”
조리실에서 밀리언까지 나왔다.
“자자, 시간 없으니까 얼른 두자.”
슬쩍 흑색 폰을 쥐려 했지만, 내리꽂는 시선이 너무나도 따가웠다.
“이번에는 기물 안 빼요?”
셀베이아가 말했다.
“정정당당한 경기에 그런 섭섭한 말씀을.”
“아까는 뺐잖아요.”
“아까는 아까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셀베이아 씨,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일 겁니까? 우리 앞을 보며 삽시다.”
“단장님. 좀 치졸하시네요.”
일곱 살한테 져버린 시점에서 치졸이고 뭐고 없었다.
“전 상관없어요.”
가하란이 말했다. 상관없다는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지만, 그래도 웃어야 했다.
“이번엔 쉽지 않을 거야. 불렛룰은 꽤 어렵거든.”
“제가 지면 무승부네요?”
“그렇지.”
“무승부가 되면 어떻게 돼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아주 아름다운 결과가 되는 거지.”
칼리고는 슬쩍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다들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다. 애한테 져놓고 너무 뻔뻔하네, 그런 환청이 들려온다.
“근데 내가 진 상태에서 한 경기 더하는 거니까 너한테 이점이 있어야겠지?”
마침 쓸 만한 정보가 떠올랐다. 알려준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가하란이라면 기뻐할 얘기가.
“내일 거병 기동식이 있을 거야. 짜잔, 놀랐지?”
가하란은 눈만 깜빡거렸다.
“아빠가 알려줘서 알고 있었어요. 올해 취소될 뻔했는데, 기동식 하게 됐다고.”
“아, 그래? 알고 있었어?”
“네.”
“좋아! 알고 있었다니 이건 어때? 내가 내일 너랑 기동식 구경을 가줄게.”
“정말요?”
“그래! 어때? 이 정도면 한 판 더 두는 대가로 나쁘지 않지?”
“네! 사실 아빠가 일이 생겨서 내일 같이 못 가게 됐거든요.”
“그거 잘됐네. 내가 거병을 아주 가까이서 보여줄게.”
교섭도 끝났겠다, 이제 명예를 되찾는 일만 남았다.
칼리고는 체스보드를 가리켰다.
“얼른 시작할까? 시간 없으니까.”
수 읽는 시간이 짧으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어린애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자존심은 지켜야 했다.
“그러면 시작할게요.”
* * *
“저희 가볼게요. 그릇은 저녁에 돌려드리면 될까요?”
“내일 줘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요.”
셀베이아와 가하란이 멀어져간다. 몇 걸음 걷던 꼬마가 뒤돌아서서 다시 인사했다.
밀리언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살며시 흔들었다.
“셰프님. 눈에서 꿀 떨어지겠어요.”
예약 관리를 하는 네일라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안 하던 짓이라 쑥스럽긴 했다.
“애가 참 귀엽죠?”
“그러게. 귀엽네.”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얼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는 칼리고에게 다가갔다.
“단장님. 5분째 그러고 있습니다.”
“압니다.”
“슬슬 일어나시죠.”
“그래야죠.”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칼리고였다.
“저기 셰프님.”
“예.”
“오늘 일은 랜더 씨에게 비밀입니다. 아니다. 오늘 전 여기서 밥 먹은 일조차 없는 겁니다. 그냥 들러서 가볍게 인사하고 떠난 걸로 하죠.”
칼리고가 식탁을 잡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기를 당한 거예요. 이럴 순 없어요. 어떻게 아빠랑 아들, 둘 다 체스를 잘 둬요? 이게 말이 됩니까?”
“저한테 따지셔도 나오는 거 없습니다.”
“그러게요. 아, 갑자기 우울해지네요.”
터벅터벅 걸으며 입구로 향하던 칼리고가 우뚝 멈춰섰다.
“밀리언 씨.”
이름은 언급하며 간절하게 바라보는 칼리고였다. 밀리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님껜 아무 말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근데 이게 비밀로 해야 할 일입니까?”
“제 자존심입니다. 사실 랜더 씨한테 체스로 몇 번 이긴 다음 좀 놀려댔거든요. 랜더 씨가 보는 눈은 대단하지만, 체스 이해도가 없었던 터라 이길 수 있었죠.”
“업보군요.”
“그러니까 비밀로 좀 해주세요.”
칼리고가 자신의 뺨을 짝 소리 나도록 두 번 때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씰룩거리며 미소를 짓는다.
“다음에 랜더 씨와 같이 오겠습니다. 그땐 음식 대접해 주세요.”
“대장님께 그렇게 전해드리죠.”
“예? 무슨 말씀이시죠? 전 아무것도 모르겠네요. 하핫. 전 그냥 잠깐 인사차 들렀을 뿐입니다.”
실실 웃으며 돌아서는 칼리고였다.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었다.
밀리언은 흐느적거리며 가게를 나서는 칼리고를 바라보다가 직원들에게 외쳤다.
“저녁 준비하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