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아니에요. 영업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 이따가 다시 올게요. 언제쯤 다시 오면 될까요?”
“지금부터 조리해도 한 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생물을 손질해야 하는 요리가 꽤 있거든요.”
“그러면 한 시간 후에….”
밀리언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여기 계셔도 됩니다. 보시다시피 점심 예약 손님은 없으니까요.”
셀베이아가 눈동자를 살며시 굴렸다. 어찌해야 하는지 고민 중이리라.
“불편하시다면 시간 맞춰서 다시 오셔도 됩니다.”
“불편한 건 아니에요. 그저 이런 곳에 오래 있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요.”
“밥 먹는 곳이 다 똑같죠. 어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저 애처럼 편히 있어 주세요. 다른 분도 아니고 특무대령님의 단짝이시니 그래도 됩니다.”
“단짝이요?”
굳게 다물린 조개처럼 딱딱해 보이던 셀베이아의 표정이 한순간 느슨해졌다. 가하란을 다정하게 바라볼 때처럼.
“대령님께서 그런 표현을 하셨나요?”
“예. 단짝 말고도 다른 호칭이 몇 개 더 있었죠. 잔소리꾼이나….”
“그건 안 들어도 되겠네요.”
셀베이아가 칼리고 쪽을 바라보았다.
“저기 계신 분은 감찰단장님 아닌가요?”
“아시는군요.”
“사건 때문에 몇 번이나 기록보관서를 찾아오셨어요. 대령님하고도 얘기를 나누셨고.”
“아는 사이라면 합석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음. 솔직히 말하면 피하고 싶네요.”
“그 마음도 이해합니다. 그러면 편한 자리에 앉아 계시죠. 기다리시는 동안 심심하지 않게 간단한 먹거리를 내오겠습니다.”
셀베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일단 가게에 들였으면 뭐라도 드려야 속이 편합니다.”
눈인사를 남기고 조리실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꼬마가 쪼르르 따라와 옆에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빤히 지켜보다가 아차 싶었다.
잠깐 잊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 얼굴을 보면 무서워한다는 걸.
얼굴에 길게 난 흉터와 바짓단 밑으로 보이는 의족. 자신보다 몇 배나 큰 남자가 뚫어져라 바라보면 겁을 먹는 게 당연했다.
의도치 않게 아이를 울리는 경우가 많아 항상 사탕을 준비하고 다녔다. 조리복 안쪽으로 손을 넣어 사탕을 꺼내려 할 때였다.
“안녕하세요.”
아이, 가하란이 꾸벅 인사했다. 밀리언은 주춤거리며 아이를 보았다.
눈동자에 두려움이 없었다. 사탕을 주는 게 무안해질 정도였다. 그래도 손을 움직였으니 사탕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저 주시는 거예요?”
“그래.”
“감사합니다.”
사탕을 받아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 안에 넣는데, 그 안에 자그마한 간식거리가 잔뜩 있었다.
포장지가 각기 다른 걸 보면 여기저기서 선물받은 모양이다.
“저는 이거 드릴게요. 맛있어요.”
보답이라는 건가. 밀리언은 손을 뻗었다. 답례품은 살짝 녹은 초콜릿이었다. 웃음이 살며시 흘러나온다.
“잘 먹으마.”
아이한테 무언갈 받아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괜스레 먹기 아까워진다.
“이름이 가하란이라고 하던데.”
“네. 가하란 맞아요. 아저씨는 밀리언 셰프님 맞죠?”
“날 알고 있구나.”
“당연히 알죠. 둔에서 아저씨 모르는 사람 한 명도 없을걸요?”
막힘없이 말하던 아이가 돌연 눈치를 살폈다. 눈동자의 방향을 읽었다. 아이는 왼쪽 다리를 살피고 있었다.
“다리가 이상하게 생겨서 신경 쓰인 모양이구나.”
“아니요. 이상하지 않아요. 오히려 멋있어요.”
“멋있어?”
아이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저기 아저씨. 정말 죄송하지만, 의족 이음새 부분을 볼 수 있을까요?”
엉뚱한 부탁이었다. 살면서 이런 부탁을 해온 사람은 처음이었다. 의족의 이음새가 보고 싶다니.
“그게 왜 궁금하지?”
“처음 보는 형태라서요. 아빠랑 이웃분들의 의수와 의족을 점검하고 수리하는데, 이런 모양은 처음 봤거든요.”
의족을 점검하고 수리한다고?
밀리언은 아이를 내려다봤다.
키가 허리 높이에도 못 미치는 작은 아이. 젖살이 도톰하게 붙어 있어서 많아야 여덟 살 정도일 것이다.
둔에서 일곱이 넘으면 일을 시작한다고 하지만, 전문지식이 필요한 의수 점검을 아이가 할 수 있다는 건가?
아니지. 아버지와 같이 한다고 했으니 잔심부름 정도겠군.
“못 보여줄 것도 없지.”
밀리언은 바짓단을 끌어 올렸다. 가하란이 쭈그려 앉아 의족을 살폈다.
“만져 봐도 되나요?”
“그래라.”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 아이였다. 덮개를 톡톡 건드려 보더니 이음새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 눈매가 제법 진지했다.
“덮개 안쪽도 보고 싶지만 그러려면 공구가 필요할 것 같아요. 규격이 제가 못 보던 건데, 특수한 장비가 필요한 거겠죠?”
밀리언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의 느낌이 아니었다.
“나도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는 처지라 자세히는 모른다.”
가하란이 아쉽다는 듯이 주억거렸다.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워야 할 게 또 하나 늘었어요.”
독특한 애였다. 공부해야 할 게 늘었는데 저렇게 좋아하다니.
똘망똘망한 눈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곧 태어날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이런 눈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밀리언은 생각했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네가 정비사가 된다면, 내 다리를 맡기마.”
“네! 공부 많이 해서 아저씨 다리도 봐 드릴게요.”
“그래, 고맙다.”
밀리언은 조리모를 쓰며 몸을 돌렸다.
* * *
“저 아저씨가 신경질 내진 않던?”
자리로 돌아온 가하란을 향해 칼이 한 말이었다.
“그러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사탕도 주시고, 상냥하셨어요.”
“생긴 것과 달리 온순한 사람이지. 얼굴만 보면 곰도 때려잡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지, 때려잡을 순 있겠구나.”
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가하란은 조금 떨어져 앉은 셀베이아를 바라봤다. 누나도 곁에 와서 얘기하면 좋을 텐데.
“누나.”
“왜?”
“누나도 이쪽으로 와요.”
“아니야. 난 여기가 편해. 둘이서 얘기 많이 나눠.”
셀베이아가 기자를 흘깃 보더니 얼른 고개를 돌렸다. 누나는 아저씨를 싫어하는 건가?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이 아저씨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저 여성분이 나랑 좀 안 맞을 뿐이야.”
“음, 아빠가 그랬는데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할 순 없대요. 분명 이유가 있대요.”
“…없다니까 그러네. 뭐, 굳이 하나 꼽자면 저 아가씨를 붙들고 조금 길게 얘기했다는 정도? 근데 말이야, 사람이 살다 보면 길게 대화할 수도 있잖아? 어? 그게 죄는 아니잖아? 그렇지?”
“맞아요. 죄는 아니에요. 그래도 싫어하면 중간에 끊어야 해요.”
“너는 참 바른말만 하는구나.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건가.”
“저희 아빠를 아세요?”
“알지. 잘 알지.”
“어떻게요?”
“친구니까. 얼마 전에도 만나서 얘기했어.”
“정말요?”
기자 아저씨와 아빠가 친구 사이였다니. 물끄러미 칼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제 이름도 알고, 저희 아빠도 알고. 어떻게 그렇게 다 아세요?”
“아까도 말했잖아. 초능력이라고.”
“거짓말.”
“거짓말이란 증거는?”
“그건 없어요.”
“그러면 믿어.”
바닥에서 붕 뜬 발을 좌우로 교차하며 식탁보의 문양을 살필 때였다.
밀리언이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입에 맞을 거다. 매운 걸 좀 덜어냈으니까. 칼리고 씨는 취향에 맞게 맵게 만들었습니다.”
남은 그릇을 들고 셀베이아한테 걸어가는 밀리언이었다.
가하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칼을 보았다.
“저기, 아저씨.”
질문을 하기도 전에 칼이 대답했다.
“칼은 애칭 같은 거고, 내 이름은 원래 칼리고야.”
칼이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었구나.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기자 말고도 다른 일도 하고 있지.”
칼리고가 이름 모를 보라색 채소를 입에 넣었다.
“혹시 내 이름하고 내가 무슨 일 하는지 들어봤니?”
“칼리고…. 아니요. 처음 들어봐요.”
“나름 유명한데. 이거 더 노력을 해야겠구먼.”
능청스럽게 말하는 칼리고였다. 광대뼈 위 살이 씰룩거리는데, 재미있는 표정이라 보면서 작게 웃었다.
“아저씨가 무슨 일 하는지 맞혀볼래? 맞히면 초능력의 정체를 알려줄게.”
“기자요!”
“그건 알려준 거잖아.”
“범위가 너무 넓어요. 세상에는 많은 직업이 있잖아요.”
“하긴. 문제가 자비 없이 어려웠네.”
칼리고가 포크를 들고 위아래로 슥슥 그었다.
“아저씨는 말이야, 나쁜 사람을 잡아. 근데 가끔은 좋은 사람도 잡아. 어떨 때는 아주 못된 놈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어.”
“그런 직업이 있어요?”
“있어. 그게 내가 하는 일이거든.”
“못된 사람한테 도움이 되는 일이면, 안 해야 하잖아요.”
“네 말이 맞아. 안 해야지. 근데 이 일이란 걸 하다 보면… 그래! 이거처럼 꼬여 있을 때가 많아.”
칼리고가 거의 다 먹은 면 요리를 가리켰다. 이리저리 엉킨 파스타 위로 포크가 춤을 췄다.
“첫 가닥을 잡아서 사건을 풀어나가다 보면, 어라? 나쁜 놈 뒤에 더 나쁜 놈이 있네? 그렇게 또 따라가다 보면, 어쭈? 선량한 분인데 엉뚱하게 엮여 있네?”
가하란은 팔짱을 끼며 눈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알겠어?”
“네. 골목 애들끼리 싸우다 보면 이렇게 되거든요. 처음에는 쟤가 잘못했는데, 알고 보면 얘가 잘못했고. 근데 또 돌이켜 보면 다른 애가 문제였고.”
칼리고가 박수를 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가하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세상의 진리를 깨달았구나.”
“이게 진리예요?”
“그래. 그거 잘 기억해둬. 세상일이란 게 뭐 하나 단순한 게 없어. 단순해 보인다면 그건 표면일 뿐이야. 지하로 뚫고 내려가 보면 아주 환장하지. 나무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가하란은 아웃라인 바깥에서 본 나무를 떠올렸다. 엄마의 묘 옆에 있는 나무인데, 뿌리가 땅 위로 돌출돼 있었다.
“네.”
“어떻디? 곧게 뻗은 나무줄기처럼 하나였어?”
“아니요. 나뭇가지처럼 굵은 줄기에서 뻗어 나간 잔뿌리들이 엄청 많았어요.”
“바로 그거야. 단순해 보이는 사건은 나무줄기. 하지만 진실을 지면 밑에 있는 뿌리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지.”
가하란은 곰곰이 생각한 뒤에 물었다.
“그러면 모든 일을 단순하게 보지 말고 어렵게 생각해야 하나요?”
“아니. 그렇게 살면 나처럼 피곤해져. 대부분의 것들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놓아줘도 돼. 그래도 별문제 없으니까. 하지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제는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물고 늘어져야 해. 그래야만….”
툭툭, 둔탁한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칼리고도 입을 슬그머니 다물었다.
소리를 낸 사람은 셀베이아였다. 왼손에 쥔 나이프로 가져온 바구니를 툭툭 때리고 있었다.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시죠, 단장님.”
“아, 네. 그래야죠. 하하하! 세상은 아름답고, 행복하고, 환상적이니까요!”
천장을 뚫을 것처럼 높게 치솟았던 웃음소리가 금방 가라앉았다. 칼리고가 헛기침을 섞어가며 작게 말했다.
“꼬마야. 오늘 들은 건 대충 이해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말해줄 테니까.”
“알겠어요. 근데 아저씨.”
“응?”
“누나가 째려봐요.”
“아, 그렇구나.”
칼리고가 손을 비비적거리다가 기지개를 켰다. 셀베이아가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기지개를 멈추는 칼리고였다.
“아저씨.”
“응?”
“방금 누나가 단장님이라고 했잖아요.”
“아, 그거? 내 직함이야. 날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장님, 하고 부르지. 물론 날 싫어하는 사람도 그렇게 부르고.”
“혹시 연극단….”
“연극은 안 해.”
“그렇겠죠?”
헤헤 웃으면서 포크로 완자를 찍었다. 아저씨의 직업을 맞혀야지만 초능력이 뭔지 알게 될 텐데.
“상단 책임자?”
“아니. 좀 더 고민해 봐.”
가하란은 눈을 찌푸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