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그런데 혼자 오신 것 같군요.”
밀리언은 가게 입구 쪽을 바라봤다. 홀 서빙을 담당하는 직원이 문을 닫고 있었다.
“역시 혼자 오면 안 되는 거였죠? 어찌어찌 시간이 나서 혼자 몰래 온 건데. 맞다, 이런 말도 하셨구나. 랜더 씨와 같이 오지 않으면 식사를 내주지 않겠다고.”
칼리고가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밀리언은 얼굴 근육을 굳힌 채 칼리고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웃었다.
“혼자 오셔도 됩니다. 농담을 진담으로 받으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군요. 그리고 대장님이라면 아까 다녀가셨습니다.”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예, 뭐, 그렇습니다. …사실 밀리언 씨의 표정을 보고 반쯤 후회했어요. 역시 랜더 씨를 데려왔어야 했나? 괜히 온 건가? 잠깐, 랜더 씨가 이미 다녀갔다고요?”
“예.”
“조금만 빨리 올 걸 그랬네요. 그랬으면 떳떳하게 밥을 얻어먹는 건데.”
칼리고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가게를 구해주신 은인이신데 제가 푸대접하겠습니까. 말이 나온 김에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칼리고 씨 덕분에 이번 일이 무사히 해결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밀리언은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감사는요. 그냥 겸사겸사 처리한 겁니다. 본래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칼리고가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막상 찾아오고 나니까 드는 생각인데, 시간 괜찮은 겁니까? 예약이 꽉 차서 자리가 없다면 다음에 랜더 씨와 같이 오고요.”
말하던 도중 고개를 쭉 빼서 안쪽을 살피는 칼리고였다.
“그나저나 오늘은 연주자분이 안 계시네요. 바이올린을 정말 잘 켜시던데.”
밀리언은 칼리고에게 자리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일리엣 씨는 저녁에 올 겁니다. 오늘은 점심 예약 손님이 없거든요.”
“손님이 없어요? 세상에나, 요정의 안뜰에 손님이 없다니. 설마 이번 일 때문입니까? 행정처 부처장이 가게를 들쑤시고 다녀서 평판이 떨어진 거예요?”
“예약이야 내년까지 차 있습니다. 단지 오늘은 특별한 손님의 주문이 있어서 홀 예약을 안 받았을 뿐이죠.”
“특별한 손님이라. 그거 혹시 저… 는 아니겠죠. 불쑥 찾아온 불청객이니.”
칼리고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웃었다.
“웰컴 드링크를 내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죠.”
“너무 거한 건 사양입니다. 그냥 간단한 식사면 충분해요.”
“안 그래도 간단히 드릴 겁니다.”
“그래도 너무 단출하면 섭섭하니 어느 정도는 잘 맞춰서 주세요. 하하하.”
밀리언은 수셰프에게 애피타이저를 부탁한 뒤 잔에 음료를 따랐다.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는 칼리고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
“제철 과일로 만든 르깐입니다. 도수가 낮은 과일주라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대낮부터 마시는 술이야말로 인생의 낙이자 삶의 의미죠.”
칼리고가 작은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마셨다. 입을 다물고 맛을 음미하는데, 표정이 굉장히 풍부했다.
“좋네요. 잔뜩 가져다 놓고 종일 마시고 싶을 만큼 입에 맞아요.”
“한 병 챙겨드릴 테니 가져가시죠.”
“그 말씀 안 하셨으면 섭섭해서 울 뻔했습니다. 그보다 같이 앉아주세요. 제가 부끄럼을 많이 타서 혼자 식탁에 앉아 있으면 심장이 두근두근해서 밥도 잘 못 먹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홀 매니저가 내온 웰컴 디시를 가뿐하게 비우는 칼리고였다.
“이것도 맛있네요. 식감도 재미있고. 밀리언 씨, 여기 말고 성도로 가게를 이전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면 분점이라도.”
“전 이곳이 좋습니다. 아내와 같이 꾸린 이 가게에서 최대한 해보고 싶어요.”
“낭만적이네요. 그러고 보니 아내분은….”
밀리언은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오늘은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가게에 못 나올 것 같아요.”
“만삭이시니 힘드시겠죠. 에나 씨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혹시라도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요. 찝찝한 구석이 좀 남긴 했지만, 어쨌든 사건도 종결됐겠다 시간이 남거든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드릴 수 있으니 불편해하지 말고 말하세요. 랜더 씨의 지인분은 저한테도 특별하니까.”
랜더란 이름에 밀리언은 고개를 살며시 들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겐 역시 ‘랜더’보단 ‘허스’가 익숙했다.
하지만 당사자가 이름을 버렸으니 이제 허스가 아닌 랜더라 불러야 할 것이다.
“대장님께서 곧 둔을 떠나실 것 같던데.”
“예. 곧 출발할 겁니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준비를 끝내는 대로 떠날 것 같아요.”
“되도록 오래 머무시길 바랐는데, 아쉽군요.”
칼리고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워낙 공사다망하신 분이라. 아니지, 공적인 일은 이제 못 보시나? 장례식까지 치르신 분이니 공적인 일은 볼 수가 없겠네요. 참 재미있어요, 그렇죠?”
밀리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고가 쥔 포크를 보았다.
전채 요리가 꽂혀 있었다. 말하는 사이사이에 음식을 먹는 데 대화가 끊기거나 버벅댐이 전혀 없었다.
기예에 가까운 식사법이었다.
“밥 먹다가 대화가 끊기면 그것 만큼 아쉬운 것도 없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나름 열심히 연습했죠. 높으신 분들은 채신머리없다, 귀족의 명성을 떨어트린다 등등 온갖 말씀을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렇게 생겨먹은걸.”
칼리고가 바닥에 깔린 오일 소스를 푹 떠서 입에 넣었다.
“이것도 맛있네요. 한 일주일 이 가게를 대여해서 온갖 식자재로 만든 요리를 먹고 싶을 정도예요.”
“겨울쯤 대장님과 함께 오시죠. 그때 제대로 대접하겠습니다.”
“랜더 씨의 여행이 올해 마무리된다면 찾아오겠습니다. 근데 제 촉이 이렇게 속삭이네요. 이번 여행이 꽤 길어질 것 같다고.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밀리언은 대장을 떠올렸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뒤로는 소속 부하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던 자상한 사내.
“저도 그러길 빌겠습니다.”
“사실 우리뿐만 아니라 제국에 사는 모두가 빌어야죠. 부디, 그분의 여행이 별 탈 없이 끝나길. 머리꼭지가 돌아서 칼부림하는 날에는… 전 일단 연합왕국으로 망명 신청할 겁니다. 살고 봐야죠.”
대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칼리고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건 무섭군요. 대장님이 칼을 뽑아 든다라.”
“무섭죠. 정말 무섭죠. 그러니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살펴봐야 하고요. 올해 제가 처리해야 할 감찰단 일은 다 미룰 겁니다. 최우선 사항이 생겨버렸으니 어쩔 수 없죠. 휴가 중에도 일해야 하는, 아주 일복 터진 놈이에요.”
칼리고가 너스레를 떨었다. 밀리언은 양해를 구한 후 조리실로 향했다.
“예약 건 준비는?”
“다 끝내놨습니다. 1시간 40분 뒤에 찾으러 오실 테니 그때 맞춰서 남은 것들 조리하면 됩니다. 콜드섹션은 정리해서 포장해 뒀고요.”
음식 포장을 하지 않는 게 가게 방침이지만, 이번에 부탁해온 손님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절하면 일과를 미루고 가게 앞을 계속 기웃거릴 텐데,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이래저래 빚진 것도 있고.
손을 씻은 다음 칼리고에게 내어줄 파스타를 만들었다.
재료에 여유분이 있으면 더 많은 요리를 대접했겠지만, 예약제로 운영하는 가게라 남는 식자재가 거의 없었다.
그릇을 들고 홀로 나왔다. 칼리고는 그 짧은 사이에 홀 매니저를 붙들고 뭔가 떠들고 있었다.
홀 매니저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가게 마감 시간까지 웃음을 잃지 않는 굳건한 친구인데.
“저,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밀리언이 식탁으로 다가서자마자, 홀 매니저가 자리를 피했다.
“가끔 생각해요.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을.”
“이참에 격언을 실행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칼리고가 입을 씰룩이다가 이내 그건 어렵겠네요, 라고 대답했다.
“근데 음식이 계속 나오네요.”
“이거 다음에 완자가 하나 더 나올 겁니다. 더 드리고 싶은데 준비해놓은 게 없군요.”
“아이고, 그건 정말 정말 아쉽네요.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만족해서 괜찮습니다. 입이 아주 호강했어요.”
칼리고가 포크를 들어 올릴 때였다. 가게 문이 다시 열렸다. 파스타를 입에 문 칼리고가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밀리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손님이 들어왔다.
한 명은 잘 아는 얼굴이었고, 옆에 따라붙은 꼬마는 처음 본다.
“셀베이아 씨.”
“안녕하세요, 셰프님.”
밀리언은 카운터 쪽 벽면에 달린 시계를 보았다. 약속된 시간까지 아직 1시간 30분이 남았다.
“음식이 준비되려면 시간이 더 남았는데, 혹시 변경사항이 있어서 일찍 찾아오신 겁니까?”
“네?”
셀베이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후르륵, 하고 파스타 넘기는 소리가 났다. 시선이 쏠리자 칼리고가 빙긋 웃는다.
“아무래도 저희 대령님께서 수작을 부린 듯 하네요.”
셀베이아가 말했다.
수작이라. 특무대령에게 저런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둔에서 오직 그녀뿐이리라.
밀리언은 일단 자리를 권했다. 옆에 선 꼬마가 눈치를 살피더니 종종걸음으로 칼리고에게 걸어갔다.
“기자 아저씨. 저 기억하세요?”
아는 사이인가? 밀리언은 칼리고와 꼬마를 바라보았다.
“기억하지, 기억하고말고. 가하란 맞지?”
“어? 제가 이름을 말했던가요?”
“내가 초능력이 있어서 맞힌 거지. 어때? 대단하지?”
“초능력이요? 그게 뭔가요?”
“마법과도 같은 힘이지.”
킥킥 웃으며 어린애를 놀리는 칼리고였다. 일단 아는 사이 같으니 둘이 놀도록 내버려 둬도 되겠지.
밀리언은 셀베이아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대령님께서 무슨 장난을 치신 것 같은데.”
“장난보다는 회피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저와 가하란을 여기로 보낸 거예요. 아, 쟤 이름이 가하란이에요. 앞으로 종종 보게 될 수도 있으니 얼굴은 기억해 주세요.”
“종종 보게 될 수도 있다고요?”
셀베이아가 손가락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아이의 손목 쪽이었다.
“저 펜던트 보이시죠?”
“예. 낯이 익군요.”
“대령님께서 주신 거예요. 저 아이한테 권리를 행사했어요.”
“설마 대령님께서 저 아이를 곁에 뒀다는 겁니까? 사람의 아이를?”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거 놀랍군요. 대령님 곁을 지킬 사람은 셀베이아 씨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천 년을 넘게 사신 분의 속마음을 어찌 알겠어요.”
셀베이아가 가하란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여느 때와 달리 다정했다.
냉랭한 기운만 풀풀 풍기던 여자였는데. 저 아이가 셀베이아의 굳은 얼굴을 풀어준 걸까?
“그나저나 회피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대령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야 발에 챌 정도로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둔 최고사령관조차 어린아이로 여기는 대령이니까.
셀베이아가 연한 웃음을 머금었다.
“저 애가 대령님의 천적이거든요.”
“천적?”
“대령님의 잠을 방해할 수 있는 유일한 애예요. 그래서 가하란을 이곳으로 보낸 거고요. 지금쯤 대령님을 발 뻗고 자고 있겠죠. 어쩐지 점심시간이 좀 이르다고 생각했어요.”
밀리언은 가하란을 바라봤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칼리고와 얘기 중인 저 애가 특무대령의 천적이라?
세상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밀리언은 벗어둔 조리모를 챙기며 말했다.
“일단 앉아 계시죠. 서서 기다릴 수도 없으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