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오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네. 아빠랑 같이 왔거든요.”
“내일부터는 제가 마중 갈게요. 대령님하고도 얘기 끝냈으니 오전에 시간 낼 수 있어요.”
“혼자서도 괜찮은데.”
“제가 안 괜찮아요.”
가하란은 걸음을 멈추고 셀베이아를 바라봤다. 셀베이아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시선을 던졌다.
“저기, 누나.”
“왜 그러죠?”
“…아니에요. 얼른 가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다시 걸음을 뗄 때였다. 셀베이아가 아, 하면서 살며시 웃었다.
“편하게 말하기로 했지. 내가 깜빡했어.”
“누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요.”
“약속한 걸 안 지킬 수는 없지. 그리고 너랑 편하게 지내고 싶기도 하고. 앞으로 자주 봐야 하니까.”
셀베이아가 손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배시시 웃으며 손을 붙잡았다.
“지하에는 뭐가 있어요?”
가하란은 중앙계단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취조실과 병장기를 모아둔 창고를 비롯해 겉으로 드러나선 안 될 군부의 여러 시설이 있지.”
“나중에 가봐도 되나요?”
“너한테 부여된 권한이면 갈 수는 있는데, 몇몇 곳은 절차가 필요해. 하지만 거기 가지 않는 걸 추천할게.”
“왜요?”
“봐봤자 좋을 게 없거든.”
호기심이 생겼지만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어른의 충고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셀베이아와 함께 기록보관서가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저기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오전 예약자들이야. 우리 손님들이지.”
셀베이아가 걸어가자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어섰다. 군복을 갖춰 입은 사람도 있고, 넥타이를 맨 사람도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명단 확인하고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셀베이아가 접수대 앞에 섰다. 가하란은 까치발을 들고 그 옆을 기웃거렸다.
“도와드릴 거 없나요?”
“쉬고 있어도 되는데. 아니면 안에 들어가서 대령님하고 놀고 있어도 되고.”
“누나랑 같이 들어가려고요.”
셀베이아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그러면 오른쪽 캐비닛에서 초록색 박스 좀 꺼내줄래? 밑에 있어서 꺼내기 쉬울 거야.”
복도 끝에 설치된 캐비닛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고 초록색 박스를 꺼냈다. 무게가 상당해서 몸이 기우뚱했다.
“누나, 여기요.”
“고마워.”
가하란은 옆으로 비켜서서 셀베이아의 업무를 지켜봤다. 초록색 박스 안에서 서류를 꺼낸 셀베이아가 펜을 바쁘게 움직였다.
“복사 허락 기한이 지났는데, 이거 대령님께 직접 말씀드리면 처리해 주시려나?”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4별관 정보처리부에서 재발급받으신 후에 다시 예약을 잡아주세요.”
“어떻게 안 되겠나? 처리가 늦어지면 예하 부대에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에요.”
“어허이, 참. 알겠네. 접수원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 군인이었다. 그렇게 몇몇 사람이 기록보관서 앞을 떠났다.
“나머지 분들은 따라오세요. 가면서 규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보관서 문이 열렸다. 가하란은 셀베이아 옆에 나란히 섰다.
“너구나. 특무대령님께서 지목했다는 애가.”
뒤쪽에 있던 군복 차림의 여자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인사했다. 셀베이아가 앞으로 걸어갔다. 다른 손님들도 간격을 맞춰 걸음을 뗐다.
“우리 부관이 아침부터 난리였지. 특무대령님이 애를 데려왔다고 해서.”
“행정처에도 이미 소문이 퍼졌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특무대령님과 관련된 일이니까. 하루면 둔에서 일하는 모든 관료가 알고도 남을 시간이지.”
뒤따라오는 다른 손님들도 가하란을 보며 한마디씩 했다.
화제의 중심이 된 것 같아 괜스레 부끄러웠다.
“너, 이거 먹을래? 사탕인데.”
여자 군인이 포장지에 쌓인 작은 사탕을 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관료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것도 받아라. 민트맛 젤리인데, 입이 텁텁할 때 먹으면 좋아.”
“이건 초콜릿.”
하나씩 받아 보니 어느새 손안이 간식으로 가득 찼다.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나중에 내가 찾아왔을 때 대령님께 얘기 좀 잘해줘.”
“나도 부탁한다.”
어른들이 너도나도 부탁한다며 말을 걸어왔다.
“아이한테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얼른 따라오세요.”
셀베이아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뒤따라오던 어른들이 눈동자를 슬며시 돌렸다.
“얼른얼른, 후딱후딱 처리하자. 점심 먹기 전에 쉬고 좀 쉬고 싶으니까.”
눈 한번 깜빡거렸는데, 어느새 책상 앞에 도착했다. 브라인 특무대령이 손짓하자 캐비닛이 일렬로 늘어섰다.
“셀베이아, 목록 줘.”
“여기 있습니다.”
브라인이 서류를 살폈다. 축 늘어진 귀가 좌우로 살랑살랑 움직였는데, 그때마다 캐비닛들이 찾아온 손님 앞으로 이동했다.
“원하는 정보는 거기에 있으니 얼른 열람해. 셀베이아, 복사해야 하는 인간 있어?”
“없습니다.”
“그럼 됐네.”
브라인이 책상에 발을 올리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자세가 마음에 드는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가하란은 브라인 옆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너 있었구나.”
“네. 저 왔어요.”
“그래, 네가 있었지. 산페르 님께서 무슨 말씀 하셨어?”
“아니요. 아저씨는 자고 있는지 아무 말도 없어요.”
“그래? 흠, 입을 계속 다무시겠다는 건가. 가하란, 넌 그분께서 입을 여시면 나한테 꼭 전해줘.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아저씨한테 물어보고 허락하면 전해 드릴게요.”
브라인이 심드렁한 눈빛으로 가하란을 바라봤다.
“그냥 몰래 나한테 말해주면 안 돼?”
“그럴 순 없어요.”
“어째서?”
“그게 예의니까요. 남이 한 말을 멋대로 떠들고 다니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아주 도덕적이야. 바람직해. 너무 바람직해서 얄미울 정도야.”
브라인이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가하란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왜?”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뭘?”
“궁금한 거 다 물어봐도 된다고.”
“…내가 그랬나?”
“네!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앎에 대한 욕망을 해결해 주신다고.”
브라인의 귀가 나풀거렸다.
저건 신경질 난다는 뜻일까? 귀의 움직임이 뭘 의미하는지,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근데 너도 약속 안 지켰잖아.”
“무슨 약속이요?”
“산페르 님이 한 말을 나한테 전해주지 않겠다며.”
가하란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브라인 님하고 한 약속은 그게 아니었는데요. 저한테 심부름을 맡기신다고 했잖아요. 아, 빗질도. 그 대가로 궁금한 걸 알려준다고 하셨고요. 산페르 아저씨에 대한 건 약속에 없었어요.”
“기억력도 더럽게 좋네.”
“네. 저 기억력 엄청 좋아요. 그래서 골목 어른들도 저한테 거짓말 안 해요.”
“그래라. 바라라의 딸이 인간에게 한 약속을 어길 순 없지. 그래, 그래야지.”
브라인이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슬그머니 표정을 살폈는데, 정말 우울해 보였다.
“…가하란.”
“네.”
“그래도 내 수면 시간은 보장해줘. 이 할머니는 못 자면 큰일 나거든. 너도 내 나이 돼봐. 잠보다 소중한 건 없어.”
“알겠어요.”
헤헤, 웃으면서 대답했다.
“브라인 님.”
“왜?”
“빗질해 드릴까요?”
“그건 이따가 점심 먹고 나서 하고, 일단은 다른 심부름부터 해라.”
“뭘 할까요? 뭐든 말해주세요.”
“내 점심 좀 가져다줘. 셀베이아하고 같이 가면 될 거다.”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셀베이아가 입을 열었다.
“저 혼자 가도 상관없어요.”
“그러지 말고 얘도 데리고 가. 무조건 데리고 가. 항명은 받지 않아.”
셀베이아가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가하란은 기다리는 동안 손에 잡힌 파일을 들췄다. 당겼을 때 열리는 캐비닛이면 허락 없이 읽어도 된다고 했으니까.
신체술에 관한 내용이 파일 안에 들어있었다. 신체술. 밀레나가 몇 번 보여준 게 떠오른다.
하늘을 날 듯이 뛰었던 브라인 대령님도 신체술을 사용한 걸까?
달리기 기록, 높이뛰기 기록, 멀리던지기 기록. 온갖 기록이 적힌 파일이었다.
신체술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개요 같은 건 쓰여 있지 않았다.
다시금 파일 제목을 봤다. ‘신체술 사용 방법에 따른 운동능력 변화’. 페이지를 넘기며 다 훑어봤지만 사람 이름과 숫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다음.
캐비닛 위쪽으로 손을 뻗었다. 두꺼운 파일이었다. 제목은 ‘체구와 신체술의 상관관계’.
글보다 그림, 그리고 사진이 많은 파일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헐벗은 몸이 사진으로 남아 있었는데, 외설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과거 남성과 여성의 근력 차이는 유의미한 기준이 되었지만, 신체술의 발견 이후 육체의 기본적인 근력 차이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이는 참정권의 소유 이전을 야기했으며, 문화 재편성의 시작점이….
“가하란?”
목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들었다. 셀베이아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자. 점심 가지러 가야 해.”
“네.”
두꺼운 파일을 덮고 캐비닛에 넣었다. 캐비닛 문을 닫자마자, 캐비닛이 통통 튀어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오늘은 특별히 예약해 놨으니까 얼른 다녀와.”
브라인의 얼굴이 밝았다. 점심이 무척 기대되는 모양이다.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뒤에 셀베이아를 따라갔다. 용무를 마친 손님들도 발걸음을 옮겼다.
기록보관서를 나서자마자, 여자 군인이 말을 걸어왔다.
“특무대령님이 저렇게 당황하는 거 난 처음 봐. 너, 대령님의 약점을 잡은 거야?”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다시금 어른들의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셀베이아가 도중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몇십 분은 붙들려 있었을 것이다.
“이만 돌아들 가시죠. 저희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알겠어요. 꼬마야, 다음에 시간 나면 1별관 인사부로 와. 맛있는 거 많이 줄게.”
“행정처도 심심하면 오고.”
어른들이 물러가자마자 셀베이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너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람이 많을 거야. 대령님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말고.”
“네, 알겠어요.”
“귀찮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아니면 대령님께 직접 전하거나. 그러면 하루도 안 돼서 해결될 거야.”
“안 귀찮으면 말 안 해도 되는 거죠? 전 모르는 사람들하고 얘기할 수 있어서 좋거든요.”
“…넌 정말 겁이 없는 거 같아.”
“저 무서워하는 거 많아요.”
셀베이아가 어깨를 으쓱거린 다음 계단을 가리켰다.
“군부 식당으로 가는 건가요?”
“아니. 오늘 바깥으로 나갈 거야. 아까 대령님이 말씀하시는 거 들었지? 특별히 예약해 뒀다고.”
“네, 들었어요.”
“요정의 안뜰이란 가게로 갈 건데, 당연히 알겠지?”
“그럼요. 둔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이잖아요.”
“그래. 1년에 한 번도 가기 어렵다는 거기. 오늘 점심은 그곳 셰프가 준비해 줄 거야.”
요정의 안뜰 요리라니. 제니가 극찬했던 요리를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먹어볼 순 없겠죠?”
“대령님이 속이 좁은 분은 아니야. 아마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주문해 놨을걸?”
가하란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누나, 얼른 가요.”
“서두르다가 넘어지지 말고. 천천히 가.”
셀베이아가 미소를 머금었다.
* * *
“셰프! 손님이 오셨는데요.”
밀리언은 손님이란 말에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아냈다. 예약 손님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손님?”
직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핫, 2음절로 정확하게 나뉘는 독특한 웃음.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나가볼게.”
조리실을 벗어나 홀로 나갔다.
“저 왔습니다. 저번에 식사 대접해주시겠다고 하신 거, 잊지 않으셨겠죠?”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칼 님.”
칼, 아니, 특수감찰단 칼리고 단장이 손을 격하게 흔들며 안으로 들어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