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17화 (90/558)

제117화

“조종간에 손 올리고.”

의자 바로 옆에 있는 길쭉한 쇠를 움켜쥐었다.

“자, 천천히 호흡하고.”

후우, 후우. 의식적으로 호흡 속도를 늦췄다.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심박수도 정상이었고.

밀레나는 비일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긴장되나요?”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대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은 겁니다. 고소공포증 있는 생도들은 여기 올라오자마자 얼어 버리니까요.”

밀레나는 시선을 45도 정도 아래로 내렸다. 저 밑에 동기들이 보였다. 새삼 꽤 높은 곳에 앉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7m 정도 될까? 보호장구 없이 머리부터 떨어지면 세상과 작별할 높이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있는데도 이 정도 높이였다. 일어선 거병은 전고 20m. 그 고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어떨까?

“밀레나 학생.”

잡념을 날려버리며 비일을 바라봤다.

“제 질문에 빠르게 대답하세요.”

“예.”

“‘입니다’는 생략해도 됩니다. 우선 이름.”

“밀레나.”

“나이.”

“열 살.”

“숫자를 십부터 일까지 거꾸로 세보세요.”

밀레나는 시키는 대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과하게 긴장하지 말고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세요.”

비일이 체임버 입구 쪽 손잡이를 꽉 움켜쥐는 게 보였다.

“신체술을 사용해 보세요. 체내로 받아들인 마나를 전신에 퍼트리는 느낌으로.”

조종간을 붙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줬다. 내재된 마나를 전신으로 퍼트렸다. 비효율적으로 산재한 마나가 한순간 시동키와 공명했다.

“됐습니다. 오토마타와 시동키에 고유파장을 인식시켰으니 이제 기동 준비는 끝난 겁니다.”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부딪칠 때였다. 밀레나는 피아노를 치듯 조종간을 붙든 손가락을 차례대로 움직였다.

“시동어는 ‘고집불통 영감님’입니다.”

“고집불통….”

“워워! 급하기도 하셔라.”

비일이 손을 내저었다. 밀레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시동어를 말하고 나면 곧바로 감각 확장이 시작될 겁니다. 미엘 학생처럼 구토에서 끝날 수도 있고, 기절할 수도 있어요. 심신의 안전은 제가 책임질 테니 최대한 집중해 보세요.”

“버티면 거병을 움직일 수 있는 겁니까?”

“세상에는 두 가지 고통이 있죠. 버틸 수 있는 고통과 그러지 못하는 고통. 장담컨대 재능이 없다면 인지통합 시 겪는 고통은 버텨낼 수 없을 겁니다.”

재능. 이 씁쓸한 단어에 오기가 치솟는다. 밀레나는 눈에 힘을 줬다.

“버티는 재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런 각오, 아주 좋습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비일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밀레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고집불통 영감님!”

시동어를 외침과 동시에 팔목에 감긴 시동키가 꿈틀댔다. 시선을 팔목 쪽으로 돌리려 할 때였다.

“어?”

새카맣다. 아무것도 없다.

조금 전까지 얼굴로 불어오던 바람의 감촉도, 슬그머니 들려오던 비일의 숨소리도, 허벅지를 통해 전해지던 조종석의 차가움도.

감각기관이 송두리째 제거된 것처럼 아무것도 감지해내지 못했다.

고민하는 자아만이 어둠 속에서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묘하게 안심되는 구석도 있었다.

특무대령의 심상세계를 헤맨 덕분인지, 압도적인 고립감 속에서도 여유를 챙길 수 있었다.

이게 써전이 말한 신경계통 마비인가.

밀레나는 아늑한 의자를 상상했다. 기억된 감각을 총동원해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냈다.

신기하게도 상상으로 생성해낸 감각들이 하나하나 신체에 달라붙으며 실체적인 몸을 만들어냈다.

정신이 육신을 실존케 하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지평선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 밀레나는 의자에 기댄 채 시간을 보냈다.

기다림이 오래지 않아 끝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윽고 믿음은 빛과 함께 실현됐다.

정신이 한 점으로 쏠리는가 싶더니 이내 상상으로 만들어낸 몸이 길쭉하게 늘어났다. 괴이한 현상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며 기다릴 때였다.

손끝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밀레나는 옅게 웃으며 있는 힘껏 그것을 움켜쥐었다.

눈이 떠졌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정신이 육신에 안착했다. 움켜쥔 조종간을 확인한 다음 비일을 바라봤다.

“기분이 어떤가요?”

“썩 좋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면 아주 훌륭하네요. 이제 첫 단추를 끼웠으니 다음 단계로 가보죠. 이제 곧 감각 확장이 시작될 겁니다.”

숨을 고르며 변화를 기다릴 때였다. 조종간을 쥐고 있는 손에 경련이 일었다. 잔떨림을 억제하기 위해 손아귀에 힘을 줬다.

“오토마타가 생도의 마나 파장을 읽어냈어요. 이제 서포팅에 들어갈 겁니다. 신경계 합치가 시작되면 모든 감각이 달라질 테니 놀라지 마요.”

써전의 말을 새겨들으며 눈을 깜빡일 때였다. 밀레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시야가 겹쳐 보였다. 체임버 안에서 밖을 보는 시선, 그리고….

“이런 의미였군요.”

희열이 차올랐다. 거병의 눈으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야가 겹쳐 약간 어지럽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간극이 사라졌다.

이제는 체임버 안쪽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됐다. 거병의 시각 장치가 안구의 기능을 완벽하게 대신했다.

“순조롭네요. 감각 확장 2단계에서는 시계(視界)가 거병 쪽으로 이전됩니다. 거인의 시선으로 내려다본 세상은 어떻습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좀 어지럽습니다. 몸은 바닥에 붙어 있는데 눈만 하늘에 뜬 기분이거든요.”

“다들 그렇게 느끼죠. 울렁증이나 과호흡, 혹은 근육에 이상은 없나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과연 엔첸세의 이름을 이어받을 만하군요. 신경계에 이상에 없다면 오토마타가 계속 진행할 겁니다.”

비일의 말과 동시에 몸 전체에 압력이 가해졌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이 한 차례 가해지더니, 이번엔 살갗이 모두 찢겨나가는 듯한 팽창감이 몸을 휩쓸었다.

미엔이 말했던 게 이건가.

몸의 부피가 말도 안 되게 늘어난 기분이었다. 몸의 감각은 살아 있는데 손발의 위치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오토마타가 탈로스를 통해 받아들인 지각정보를 쉼 없이 전달해줄 겁니다. 땅의 감촉을 느껴 보세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찾아보세요. 온도를 느낄 수 있다면 가장 좋습니다.”

비대해진 감각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다양한 감촉이 피부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걸 분별해내기가 어려웠다.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이 제멋대로 뒤섞였다. 맛에서 무게가 느껴지고, 통증에서 소리가 들렸다.

한순간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헛구역질을 수차례 반복했다. 혀뿌리에서 시큼한 맛이 느껴졌는데, 그 불쾌한 감각이 오히려 반가웠다.

통증을 이정표 삼아 감각들을 하나하나 분리해 나갔다. 이 둔통이 올라오는 곳은 다리고, 손에서 맛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 이건 입 안이고….

푸하, 가득 차오른 숨을 격하게 토해냈다.

눈이 따가웠다. 흘러내린 땀으로 옷이 반쯤 젖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기절해버릴 것 같았다.

고르게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힘들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공기가 폐로 내려가지 못하고 입 안에서만 겉도는 기분이었다.

허겁지겁 숨을 삼켰다. 이 거대한 몸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려면 얼마나 들이켜야 하는 걸까.

“밀레나 학생, 감각 정보를 냉정하게 바라봐요. 지금 뇌로 전해지는 정보들은 오토마타가 해석한 외부 정보일 뿐이에요. 학생 몸은 지금 체임버 안에 얌전히 있는 상태고요. 이걸 반드시 기억하세요.”

“예?”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일단 대답을 했다.

“호흡을 가쁘게 하지 말아요. 학생의 몸은 커지지 않았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호흡을 과하게 할 필요가 전혀 없단 뜻이에요. 냉정하게 인식해 봐요. 비대해진 몸이 과연 자신의 몸인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전달된 정보인지.”

선뜻 이해되질 않았다. 하지만 조언은 받아들였다. 격하게 들썩이던 어깨가 서서히 운동을 멈췄다. 메마를 정도로 숨을 들이켜던 입을 잠시 다물었다.

숨을 멈췄는데 가빠 오기는커녕 오히려 안정됐다.

“거병과 나를 동일시하는 건 지금 단계에서는 힘들 겁니다. 아직 배워가는 과정이잖아요?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오토마타가 전하는 정보들을 바라보세요. 우선은 나와 거병이 다름을 인지해야 합니다. 완벽한 인지통합은 그 후에 이루어지니까요.”

몸을 휘감던 긴장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격랑 속에 내던져진 것처럼 출렁거리던 머릿속도 이제는 차분해졌다.

겹쳐졌던 시야도 다시금 분리됐다. 처음과 달라진 건 원하는 시각 정보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안구가 받아들인 정보로 체임버 안쪽과 비일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 오토마타가 전달한 외부 시각 정보로 하늘과 연병장 주변을 둘러봤다.

“일단 시각 분리는 성공한 것 같네요. 아주 훌륭해요.”

비일의 말을 들으며 오른팔을 보았다.

거병의 팔이 보인다.

팔을 움직여 보고 싶었다.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근육의 움직임을 의식하며 오른팔을 당겨 보았다.

하지만 움직이는 건 거병의 팔이 아니었다.

밀레나는 시각 정보를 자신의 눈으로 바꿨다. 어깻죽지에 붙은 팔이 허망하게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각 정보는 자유롭게 교대가 가능했다. 요령을 어느 정도 터득한 것이다.

이걸 팔에 적응하면 될 것 같은데.

“20분. 인지통합 초기 시퀀스까지 들어갔고, 정말 좋은 기록이네요. 신경계 피로도도 현저히 낮고. 테스트는 통과한 상태인데, 어떻게 할래요?”

“팔을 움직여 보고 싶습니다.”

“각 모듈을 인식하고 구동계에 힘을 전달하는 건 완벽한 인지통합 이후에나 가능해요. 하지만… 팔 정도는 약간의 편법으로도 가능하겠죠. 대신 굉장히 피곤할 수도 있는데, 해보겠어요?”

“참아 보겠습니다.”

“밀레나 학생의 도전 정신을 높게 살게요.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비일의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태연한 웃음이 몹시도 불안했다.

“그러면 이따가 보죠. 아마 기절할 테니까.”

예? 라고 반문할 사이도 없이 비일이 이어서 말했다.

“등록번호 149. 점검용 가상 신경망 연결. 우완 상부 모듈 운동력 체크. 모터 확인 3회.”

시동키에서 마나 파장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오른팔이 시큰해졌다. 얇은 얼음이 관절 사이사이에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밀레나는 오른팔을 움직였다.

거병의 팔이 서서히 들렸다. 묵직한 구동음이 체임버 안으로 전해졌다.

경이로운 감각이었다. 외부 정보가 아주 간결하게 머릿속으로 전달됐다.

강철의 팔이 마치 내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완벽한 인지통합…….

기쁨도 잠시 한순간 팔이 사라졌다.

어?

거병의 시각 정보도 끊겼다. 오토마타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됐던 모든 신경망이 차츰차츰 단절되고 있었다.

몸이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산악 행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처럼 전신이 늘어졌다. 포근한 감각이 몸을 감쌌다.

격한 고통이었다면 저항하며 참아냈을 텐데, 이 아늑함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내일 다시 봅시다. 수고했어요.”

비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 *

“기록 종료! 23분 12초! 감각 확장 4단계, 인지통합 초기 시퀀스를 완료했습니다.”

율은 고개를 들었다. 비일이 축 늘어진 밀레나를 둘러멘 채 사다리를 내려오고 있었다.

“방금 거병 오른팔이 움직였지?”

“어. 분명 움직였어.”

“역시 엔첸세는 엔첸세인가.”

브리테와 짧은 대화를 마치고 지면으로 내려온 비일에게 다가갔다.

비일이 밀레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뭔데 이렇게 만족한 표정이냐. 괜히 열 받네.”

율은 실실 웃는 얼굴로 기절한 밀레나를 내려다보았다. 괜히 심술이 나서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자, 다음 생도.”

율은 밀레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거병을 올려다보았다.

“다들 해냈는데, 나만 떨어질 수는 없지.”

성공을 다짐하며 비일 앞으로 걸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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