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본격적인 실습에 앞서 몇 가지를 설명하겠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다 아는 내용입니다만, 의무사항으로 지정된 것이니 이해해 주세요.”
비일이 거병을 가리켰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는데도 하늘을 가릴 것처럼 거대했다.
밀레나는 강철로 된 전사를 바라보며 비일의 말을 들었다.
“운동지각 보조장치, 오토마타는 여러분의 감각을 아주 예민하게 만들 겁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지각하는 영역까지 확장시키죠. 이 말을 이론 공부를 하며 정말 지겹도록 들었을 겁니다, 그렇죠?”
예, 동기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다들 뛰어난 인재인 만큼 충분히 이해했을 겁니다. 하지만 체임버에 들어가는 순간 깨달을 거예요. 내가 배운 것들이 정말 쓸모가 없었구나, 하고.”
비일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론이 아닌 현실을 알려드리죠. 체임버에 올라타서 감각 확장을 경험하는 생도는 이 중에서 절반도 안 될 겁니다.”
단언하는 말투에 밀레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표정들이 안 좋아지네요. 이해합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교육 때는 누구나 다 감각 확장을 느끼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게 기본이라고 가르치니까요. 하지만 실상은 달라요. 아마 걸음마조차 못 떼는 생도가 태반일 겁니다.”
밀레나는 휴리우스 교관을 바라봤다. 팔짱을 낀 채 나른한 얼굴로 비일을 보고 있었다.
모든 권한을 일임했다는 것인가.
“질문이 있습니다!”
동기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말씀하세요.”
비일이 발언권을 주었다.
“감각 확장은 신체술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느낄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저희가 배운 기초 이론이 잘못됐다는 건가요?”
“틀리지는 않았어요. 말이란 게 참 재미있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아주 미세하게, 정말 개미 눈물만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근데 그 정도로는 거병을 다룰 수 없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죠?”
요구하는 기준치가 예상보다 훨씬 높다는 것인가. 밀레나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거병을 올려다보았다. 침묵 중인 거인을 내가 깨울 수 있을까.
“이어서 설명하죠. 체임버에 들어가 감각 확장을 체험하게 된다면, 이어서 인지통합 시퀀스를 밟게 될 겁니다. 교육용 오토마타라 인지감도를 최저치로 낮춰둔 상태지만, 그래도 인지통합이 되는 순간 여러분은 기존과는 다른 세상을 목도하고 감각하게 될 겁니다.”
인체 신경계를 거병 신경계와 통일화하는 과정. 인지통합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인간과 거병은 하나의 개체가 된다고 배웠다.
밀레나는 강의 때 들은 정보를 되새김질하며 비일의 설명을 들었다.
“인지통합이 완료되는 순간 여러분은 한순간 신경계통의 마비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니 당황하지 마세요. 비대해진 감각을 뇌가 받아들이는 과정이니까요.”
비일이 박수를 세 번 쳤다.
“만약 생도 여러분들이 이 시퀀스까지 안전하게 마친다면, 거병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설명하던 비일이 코끝을 매만지며 웃었다.
“만약 거병을 일으키는 생도가 나온다면, 저쪽에 계신 휴리우스 교관님께서 헹가래 치며 축하해주실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침묵하던 휴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헛소리는 그 정도로 하시죠, 비일 써전님.”
비일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휴리우스 교관님께서 저한테 존칭을 사용하는 걸 보니 단단히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더 깐족거렸다가는 옛날처럼 호되게 혼날 테니 여기서 마무리하죠. 혹시 질문 있습니까?”
“없습니다!”
“모범생분들은 역시 다르네요. 그러면, 바로 가볼까요?”
비일이 손에 두르고 있던 팔찌를 푼 다음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누가 먼저 실습에 참여해 보겠습니까?”
밀레나는 살랑살랑 움직이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폭 8cm의 저 팔찌가 인지통합을 위한 도구였다.
인지통합 유도장치 부속 신경계 합치 기능장치.
널버스 볼팅(nervous bolting).
현장에서는 기나긴 학술어 대신 ‘시동키’라 부른다고 들었다.
“이 시동키 역시 교육을 위해 마력선 조정을 끝낸 상태입니다. 차기만 하면 저 체임버에 들어갈 수 있어요. 자, 누가 먼저 해보겠습니까.”
열의와 달리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이번 한 번의 기회에 너무 많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반드시 성공하리란 자신감과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걱정이 내면에서 격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긴장감을 깨고 입을 연 건 미엔이었다. 비일 앞으로 걸어가는 미엔은 전장을 목전에 둔 병사처럼 비장해 보였다.
라운지에서 율이 미엔을 보며 했던 말이 되살아났다.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야.
밀레나는 옆을 지나가는 미엔에게 한마디를 했다.
“제대로 보여줘. 너라면 할 수 있어.”
미엔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는 언제나 위대하기 마련이죠. 먼저 나선 생도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미엔입니다.”
비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동키를 내밀었다. 미엔은 차분한 손길로 시동키를 손목에 감았다.
“다른 생도분들은 실습을 지켜보면서 순번을 정해 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올라가 보죠.”
비일이 먼저 움직였다. 그물 사다리에 발을 올린 뒤 재빠르게 체임까지 올라갔다.
미엔이 그 뒤를 따랐다. 밀레나는 고개를 살짝 꺾어 저 높이 있는 체임버를 바라봤다.
안쪽으로 두 사람이 들어갔다. 거병이 상체를 숙인 상태라 체임버 안쪽 상황도 잘 보였다.
비일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식절차대로라면 체임버를 닫고 마나압을 정돈해야 하지만, 그 과정은 생략할 겁니다.”
비일은 체임버 입구 쪽 손잡이를 잡으며 몸을 지탱했고, 미엔은 조종석에 앉았다.
밀레나는 신체술을 사용해 시력을 살짝 높였다. 비일의 도움을 받으며 미엔이 안전띠를 착용하고 있었다.
“보는 내가 다 긴장되네.”
옆으로 다가온 율이 말했다.
“잘하겠지?”
“잘해야지. 누가 뭐래도 미엔은 우리 기수의 자랑이니까. 쟤가 삐끗하면 뒤의 사람들은 불안해서 못 올라가.”
고개를 든 채 상황을 지켜봤다. 안전띠 점검이 끝났는지 비일이 옆으로 비켜섰다. 체임버 밖으로 몸이 반쯤 나왔는데, 위태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역시 써전이라는 건가. 거병의 기동 점검을 맡은 전문가답게 높은 곳도 익숙한 모양이다.
“실습번호 1번. 생도 미엔. 시작합니다.”
비일이 외쳤다. 밀레나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비복과 연구복을 걸친 사람들이 보였다. 실습을 참관하러 온 기술진 같았다. 문제가 발생하면 저들이 움직일 것이다.
그 옆에 건장한 체구의 여자가 보였다. 손목을 보았다. 시동키를 두르고 있었다.
써전? 아니면 거병 기사?
알 필요가 있었다면 휴리우스 교관이 직접 소개했을 것이다.
밀레나는 다시 거병을 바라보았다. 실습이 시작되고 10여 초가 지났다.
아직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미엔은 눈을 부릅뜬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잘돼 가고 있는 건가?”
“그러게.”
동기들 사이에서 여러 말이 나왔다. 오가는 말소리가 조금씩 커질 때, 위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토사물이 쏟아졌다. 미엔의 벌어진 입을 타고 위액이 뚝뚝 떨어졌다.
수없이 봐온 광경이라 대수롭지 않았다. 고된 훈련을 겪다 보면 위아래로 쏟아내는 건 흔했으니까.
살짝 걱정되는 건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인 미엔이 속에 든 걸 게워냈다는 것 정도?
아침을 역시 굶었어야 했나.
밀레나는 양손을 목에 가져다 대며 살며시 주물렀다.
“저기.”
율이 손가락을 들었다. 침묵 중인 거인에게서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탈로스를 따라 설치된 관 중 몇 개가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액상근육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곳곳에 새겨진 마력선이 은은한 빛을 냈다. 발에서 시작된 빛이 서서히 상부를 향해 뻗어나갔다.
“된 건가?”
밀레나는 체임버 안 미엔을 보며 중얼거렸다. 미엔은 터질 듯한 얼굴을 한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인지통합 과정에서 겪는 통증이 얼마나 크기에 잘 참기로 유명한 미엔이 저런 표정을 지을까.
밀레나는 회중시계를 꺼냈다.
실습이 시작되고 8분이 지났다. 미엔은 테스트를 통과한 것일까? 아니면 실패한 것일까?
오른쪽에 모인 참관인들이 바쁘게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저들이 쓴 내용에 따라 우리들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기록 종료! 11분 42초. 감각 확장 3단계, 인지통합 시퀀스에 들어갔습니다.”
비일이 외쳤다. 참관인들의 손이 한층 더 바빠졌다.
미엔이 몸에 줄을 감은 채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도중에 크게 비틀거렸는데, 줄이 감겨 있어서 위험하지는 않아 보였다.
바닥에 내려온 미엔이 그대로 뻗어버렸다. 산발적 경련에 일어설 수가 없는 것 같았다.
휴리우스 교관이 옆에 서며 말했다.
“누워 있어라. 몇 분간 몸이 말을 안 들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말할 기운은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네. 수고했다.”
미엔이 미소 지었다.
수고했다, 교관의 이 한마디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미엔은 자격을 얻어낸 것이다.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을.
“이어서 바로 하고 싶은데, 안전띠 점검을 다시 해야 할 것 같네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비일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사이 동기들이 미엔에게 몰려갔다.
나자빠져 있는 미엔을 내려다보며 질문을 퍼부었다. 미엔이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너희들도 직접 경험해봐.”
밀레나는 쭈그려 앉으며 물었다.
“그러지 말고 뭐라도 하나만 던져줘 봐.”
“동기 사랑이 곧 나라 사랑이라고, 뭐라도 알려주고 싶은데 진짜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몸이 갑자기 말도 안 되게 부풀어버린 느낌이야. 아무튼 이건 해봐야 알아. 심장 뛰는 것까지 내가 컨트롤해야 할 것만 같은, 정말 끔찍한 감각이었어.”
식은땀까지 흘리는 미엔이었다. 밀레나는 미엔 손에 물병을 쥐여줬다.
“이거라도 마셔.”
“손이 안 움직이는데.”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네가 먹여주면….”
“응, 푹 쉬어.”
미엔의 어깨를 툭툭 쳐준 다음 일어섰다. 모여들었던 동기들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헛웃음 짓는 미엔을 바라보다가 다시 거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점검을 마친 비일이 내려오고 있었다.
“자, 다음 누가 올라갈 겁니까?”
대답 전에 일단 앞으로 나갔다. 밀레나는 곁눈질로 옆을 보았다.
브리테, 율, 로운, 이리엘데가 나란히 서 있었다.
“다섯 명이 동시에 올라갈 순 없으니, 가장 먼저 온 순서대로 합시다.”
시동키가 팔랑거리며 밀레나 눈앞으로 왔다.
“생도분, 이름은?”
“밀레나입니다.”
“좋습니다. 올라가죠.”
밀레나는 가하란이 준 스카프로 머리카락을 단단히 묶었다. 그물 사다리에 발을 올린 다음 힘차게 뻗었다.
금방 체임버 앞에 도착했다.
정교하게 제작된 조종실 안쪽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들어가 앉으세요.”
“예.”
아래로 축 늘어진 안전띠를 옆으로 치운 다음 조종석에 앉았다. 거병 상체가 앞으로 기운 탓에 위쪽 손잡이를 잡고 버터야 했다.
비일이 다가와 안전띠를 해줬다.
“훈련용으로 제작된 거라 좌석 구조가 불편할 거예요.”
“괜찮습니다.”
비일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이제 감각 확장에 들어갈 겁니다. 밑에서 말했다시피 신경계 마비가 찾아올 거예요. 숨이 잠깐 안 쉬어질 수도 있지만, 패닉에 빠지지 마요. 거기서 정신 놓아버리면 이도 저도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호흡을 조절하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이게 첫발이었다. 여기서 미끄러질 수는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