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15화 (88/558)

제115화

눈이 번쩍 뜨였다. 밀레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캐비닛은 보이지 않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제 일이 악몽처럼 머리맡을 맴돌았다. 고작 한 시간 헤맸을 뿐인데, 이렇게 후유증이 남을 줄이야.

책상에 놓인 물을 들이켠 다음 시계를 보았다.

오전 6시.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은데.”

잠이 일찍 깼지만 몸 상태가 안 좋은 건 아니었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이른 아침의 습한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어제 내린 소나기 덕인지 하늘은 쨍할 정도로 맑았다.

기분 좋게 숨을 들이켰다. 정신이 맑아지면서 달라붙어 있던 잠의 기운이 떨어져 나간다.

중요한 날인 만큼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복장을 갖추고 방문을 열었다. 1층 라운지로 내려가니 끼리끼리 모여 있는 동기들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은은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면서 옆에 섰다. 눈 밑이 거뭇한 율이었다.

“…잘 잔거지?”

율 얼굴을 보며 슬며시 물었다.

“이 얼굴을 보고도 그렇게 묻는 걸 보면, 너도 성격 참 안 좋아.”

“예의상 물어본 거지.”

율이 하품을 쩌억 했다. 대신 손을 들어 벌어진 입을 가려주었다.

“사자도 들어가겠다.”

“들어와 주면 좋지. 사자 고기가 어떤 맛인지 궁금하니까. 그보다 넌 어때? 잘 잤어?”

율의 질문에 밀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중에 깨지는 않았는데, 평소보단 일찍 일어났어.”

“너도 캐비닛한테 쫓겼어?”

“어.”

“그러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나까지 끌려가게 해.”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잖아. 이제 오지에 떨어져도 당황하지 않을 거야. 안 그래?”

“그건 그래. 세상천지에 캐비닛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곳은 없을 테니까.”

율이 힘차게 도리질을 쳤다. 어제 일은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이.

“다들 표정이 좋네.”

밀레나는 뒤를 돌아봤다. 외투를 손목에 걸친 브리테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게 좋아 보여?”

율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너는 너무 해맑아서 그 정도로 그늘진 게 밸런스가 맞아.”

“아침부터 시비 거는 거라면 받아줄 기력 없으니까 얼른 지나가.”

“나도 너하고는 드잡이하고 싶지 않아. 너랑 싸우면 그 뭐냐, 내가 한심해지거든.”

율이 째려보자 브리테가 작게 웃으며 그냥 해본 소리야, 라고 답했다.

“밀레나.”

브리테의 부름에 밀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녁에 애들끼리 모여서 한잔하기로 했는데, 시간 괜찮으며 와. 율도 오고 싶으면 오고.”

“그건 시민 측 수장으로서 제안하는 거야?”

“그럴 거였으면 말도 안 걸었지. 그냥 친구라서 초대하는 거야. 너랑 얘기해 보고 싶어 하는 애들도 늘었거든. 아, 그리고 러브레터 얘기도 궁금하고.”

“그건 잊어줘.”

밀레나는 손짓하며 웃었다.

지난번 일을 계기로 브리테와 사이가 가까워졌다. 시민 쪽 동기들과 대화하는 횟수도 늘었고.

율도 자연스럽게 같이 어울리다 보니, 율을 아니꼽게 보던 시민 측 애들도 꽤 줄었다.

본토 파벌의 주축이란 이유로 여전히 율을 싫어하는 애들도 있지만.

“내가 가면 괜히 불편해지는 거 아니야?”

율이 물었다.

“그렇게 속 좁은 놈 없어. 얘기하자고 온 애한테 눈치 줄 정도로 개차반인 놈이 있다면,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

“이야, 대장 노릇을 단단히 하네.”

“귀족분들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웃으며 얘기하던 브리테가 표정을 굳혔다.

“너희들을 더 붙잡고 있다가는 저놈한테 칼 맞을지도 모르겠다. 먼저 간다.”

브리테가 바라본 방향에 미엔과 로운이 있었다. 대놓고 노려보는 건 아니지만, 이쪽을 신경을 쓰고 있다는 티가 팍팍 났다.

“저러다 미엔 이마에 주름이 다섯 줄은 생기겠다. 쟤는 날이 가면 갈수록 얼굴이 어두워져.”

“그만큼 위에서 찍어 누르고 있다는 뜻이겠지.”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야.”

“너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닐 텐데?”

밀레나는 율을 툭 치면서 말했다.

“나야 뭐 적당히 줄타기 하다가 결혼해 버리면 되니까.”

결혼이란 말에 밀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쿠엔이 말을 꺼냈어? 결혼하자고?”

“우리 나이에 만나기로 했으면 결혼은 응당 하는 거지. 넌 어려서… 아니다. 아침부터 눈칫밥 먹긴 싫으니까 여기까지 할게.”

“어려서 뭐? 말끝까지 해보시지.”

“됐다니까 그러네. 아무튼 쿠엔하고 약혼식 올리게 되면 넌 내 그린파트너로 초대할 거니까 일정 비워둬.”

“그런 건 단짝한테 시키는 거 아니야?”

“우리 단짝 아니었어?”

율이 빙긋 웃으며 빈자리로 움직였다.

아침을 거를까 하다가 조금 먹기로 했다. 으깬 감자를 곁들인 소시지에 투란 빵. 부드러운 빵 위에 감자를 올리고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체임버에서 토하는 사람도 꽤 있다던데.”

율이 차를 마시며 말했다. 밀레나는 반쯤 베어 문 빵을 살짝 흔들었다.

“나 밥 먹고 있는 거 보이지?”

“보여. 난 차를 마시고 있고.”

눈을 살짝 찌푸리며 식사를 마저 했다.

“밀레나. 너 블루 아이에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거야?”

율이 턱을 괴며 물었다.

“정비 때 구경삼아 올라간 적은 있지. 하지만 작동할 때 타본 적은 없어. 엄마가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거든. 다른 건 몰라도 거병에 한해서는 참 삭막해.”

“노하우 좀 얻어 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밀레나는 냅킨으로 입을 훔쳤다. 적당한 포만감에 기분이 좋아진다.

“노하우도 감이 잡힌 사람들한테나 도움이 되는 거지, 우리 같은 초짜에겐 쓸모없을 거야.”

“하긴, 몸으로 겪어봐야 한다고 선배들도 말했지.”

거병의 조종실.

체임버.

이론 수업을 끝내고 마침내 실습에 들어가는 날이다. 오늘 체임버를 경험하고, 바로 내일 기동 시범을 하게 된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었다.

“‘거병 기사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거다.’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실감하겠네.”

율이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실전에 강한 아이인데도 오늘만큼은 긴장되는 모양이다.

“죽으러 가는 표정들이다.”

밀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정복을 갖춰 입은 휴리우스 교관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했다.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금일 있을 체임버 탑승은 정해진 시간 내에서 신속하게 이뤄질 거다. 생도 한 명당 15분 남짓이 되겠지. 훈련 테스트가 좋아서 반응을 더 보게 되면 30분까지 연장되겠지만, 대부분 10분 내로 끝날 거다.”

미엔이 라운지 중앙에 섰다. 동기들이 미엔 뒤쪽으로 이동해 줄을 맞췄다.

“마나응축봉이 소모되는 실습이다. 어리바리하다가 시간 허투루 보내지 마라. 두 번 다시 없을 기회고, 애원해도 돌아오지 않을 기회니까.”

10분.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것이 결정될 터였다.

이번 둔 견학의 목적을 달성하느냐, 아니면 허탈감만 안고 성도로 돌아가느냐.

밀레나는 말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목표가 드디어 눈앞으로 다가왔다.

물론 실습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고 한들 바로 거병 기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이번 실습은 어디까지나 자질을 판별하는 것이니까.

출발선에 설 자격이 있는지, 그것을 알아보는 실습이었다.

여기서 삐끗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다음에 더 잘해 보겠다는 말은 꺼낼 수 없게 되리라.

“준비는 다 되었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가보자. 너희 중 몇 명이나 둔에 남게 될지, 나도 궁금하니까.”

선두에 미엔이 섰다. 교관은 왼편에 붙어 뒷짐을 지고 이동했다.

별관을 가로지르고 중앙부를 넘어 거병관리국으로 향했다. 연구단지로 가는 길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도열한 메인 캐리어 옆을 지나쳤다. 이동하며 흘깃 트레일러를 보았다.

실습에 쓰일 거병이 보였다. 외장갑을 모두 벗겨놓은 상태라 탈로스가 외부로 노출됐다.

가슴 덮개가 하늘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데, 주변에 정비공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긴장되네.”

율이 작게 말했다. 밀레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드넓은 연병장에서 5분 정도 대기했을 때였다. 메인 캐리어 쪽에서 육중한 기동음이 들려왔다.

트레일러에 누워있던 거병이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인류가 보완하고 강화한 끝에 손에 넣은 전략병기.

외장갑이 없는 상태라 액상근육의 움직임도 눈에 들어왔다. 거피와 근육, 인대의 역할을 한다는데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건지 보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마법공학의 정수.

발목 구동계 쪽 실린더가 거친 소리를 냈다. 거병이 천천히 움직이며 곁으로 다가왔다.

거병의 발이 교차할 때마다 연병장 전체가 들썩거리는 것만 같았다.

저런 것에 올라타는구나!

긴장감보다 더 큰 희열이 온몸을 감쌌다. 밀레나는 주변 동기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열망에 찬 눈으로 거병을 보고 있었다.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온 거병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뒤이어 상체를 숙였다. 활짝 열린 가슴 덮개 사이로 조종사가 보였다.

지면과 가까워진 체임버에서 그물 사다리가 내려왔다. 이십 대 초반의 남자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살짝 기우뚱거리며 바닥에 안착한 남자는 휴리우스 교관을 보며 장난스레 경례했다.

“명받은 대로 안전하게 대령해 놓았습니다.”

“그 껄렁한 태도는 여전하구나.”

“사람이 한결같아야지, 변하면 안 되죠.”

남자가 휴리우스 옆에 섰다.

“오늘 실습을 도와줄 써전이다. 이름은 비일이고 너희 선배다.”

선배라는 말에 동기들이 각을 잡았다.

“선배는요. 저 같은 팔푼이는 스콜라 졸업생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비일이 웃으면서 생도들 앞에 섰다.

“아무튼 반갑습니다. 이름은 들었다시피 비일이고, 오늘 여러분들이 안전하게 체임버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비일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철을 손에 들었다.

“시작하기 전에 질문 몇 가지만 하죠. 오늘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못 하겠다, 있나요?”

당연히 손드는 사람은 없었다.

“좋네요. 그러면 여기 서약서에 사인부터 받겠습니다.”

서약서?

비일이 서류철에 끼워둔 종이를 빼내 동기들에게 나눠주었다.

밀레나는 종이를 받아 들고 상단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위험 고지 서약서.”

내용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축약하면 결국 이거였다.

본 실습으로 인해 사망에 이른다 해도 그 어떤 행정적 보상이나 법적 책임을 요구하지 않겠다.

“죽은 사람은 없어요. 죽은 사람은.”

비일이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여러분들은 아주 귀한 신분입니다. 다치거나 사망할 시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죠. 물론 스콜라 생도가 되기로 했을 때 이미 안전 서약은 다 했을 겁니다. 난 죽어도 괜찮다, 라고 다들 서약한 거 기억하죠?”

비일이 서약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병 관련해서 사고가 나면 항의하시는 분들이 좀 많거든요. 아무래도 이곳은 스콜라가 아닌 관리국 관할이라 책임소재가 애매하죠. 그러니 잡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간단한 서약서를 받는 겁니다. 이해하셨으면 사인하시고, 이해 못 하겠으면 돌려주세요. 대신 실습은 없습니다.”

밀레나는 비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을 들었다.

“펜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드려야죠.”

밀레나는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다른 동기들 역시 서약서에 이름을 휘갈겼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바보는 없다는 뜻이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실습을 시작해 보죠.”

비일이 서류를 챙기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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