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아빠! 하고 싶은 말이 하늘처럼 많아요.”
“알았어. 다 들어줄 테니까 너무 보채지 마. 아빠 팔 떨어지겠어.”
올란트가 가하란을 번쩍 안아 들었다. 노을빛이 번지며 두 사람을 물들였다.
아늑한 풍경이었다. 다정하게 안아주는 아빠와 품에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는 아들.
상투적이지만, 누구나 다 바라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기에 유단은 그 둘이 몹시도 불쾌했다. 이름 모를 작은 곤충이 심장과 뇌를 갉아 먹는 기분이었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가 역겨운 짓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남겨둘 뿐, 입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부러워하면서도 살짝 아련한 느낌을 담아서.
이 미소를 바라봐줄 사람이 옆에 있었다. 유단은 시선을 느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손이 다가올 때까지, 온정이 담긴 위로가 전해지기까지 모른 척 기다렸다.
이윽고 바라던 손길이 어깨에 닿았다.
“교수님.”
몰랐다는 듯이, 조금 놀라는 기색을 섞어 덴스를 보았다. 덴스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두어 번 더 두드려주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어머니께서 가끔 만들어주시던 호박 수프가 그리워요. 다 큰 놈이 참 철이 없죠?”
“철이 들어서 그런 거야. 철이 들어야 부모가 그리워지거든.”
덴스의 손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아 주었다. 잠깐이나마 아버지 노릇을 해주겠다는 듯이.
유단은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았다.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울음기를 섞어 말하는 건 아직 미숙하니, 적당히 얼버무리며 말했다.
“다음 달에 부모님을 뵈러 가도 될까요?”
“그래. 시간 내서 같이 가자. 아직은 보는 눈이 있어 묘를 이장할 순 없지만, 시간이 흘러 아잔탄스 일이 기억에서 잊히면 그땐 네 부모의 묫자리도 볕드는 곳으로 옮겨주마.”
“감사합니다.”
이쯤이면 됐다. 뒈져버린 부모로 동정심을 끌어냈다.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모자란 부모였지만, 죽어서는 그나마 쓸 만하네.
……잠깐만.
남는 장사라고?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유단은 표정 관리를 하며 휴게실로 들어갔다. 다행히 덴스가 쫓아오지는 않았다.
선반 앞으로 걸어갔다. 작은 유리병에 얼굴을 비춰봤다. 아주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 그 안에 있었다.
혼란이 찾아들었다.
뒈져버린 부모라니. 너무나도 극단적인 생각이었다. 그렇게까지 매도할 마음은 없었는데.
유단은 다시 한번 병을 들여다보았다. 병에 비친 소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한동안 병을 바라보았다. 위를 쥐어짜는 구토감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만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웃고 있는 얼굴을 계속해서 망막에 새겼다. 그러고 나서 깨달았다.
아, 그랬었지.
유단은 벽으로 걸어가 있는 힘껏 머리를 박았다. 쿵, 소리와 함께 아찔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몇 차례 더 머리를 박았다. 가슴에 남아있는 찌꺼기를 덜어내야 했다.
동경해야 할 건 오붓한 부자 관계가 아닌 정상에 오른 절대자의 모습이다.
같잖은 꿈 얘기에 빠져 벌레만도 못하게 죽은 부모를 잊어선 안 된다.
성공만이 모든 걸 관통하는 진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부차적이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것들을 벗어내야 했다. 권좌에 올라 손가락질 한 번으로 수백을 죽여 버린 그 황제처럼.
아아,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살갗이 벗겨졌다. 쓰라린 피부를 따라 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래. 이래야지.”
아주 개운해졌다. 불필요한 감정이 마침내 사라졌다.
유단은 병 앞으로 갔다. 유리에 반사된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실패하면 쓰레기. 난 버러지로 살고 싶지 않아.”
선반 끝자락을 손으로 움켜쥐고 밑으로 잡아당겼다. 못이 살짝 빠지며 선반이 기울었다.
유단은 휴게실 문을 연 다음 있는 힘껏 바닥을 향해 유리병을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유리병이 산산조각 났다.
적당히 뜸들이다가 몸을 숙여 깨진 유리 조각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휴게실 쪽으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먼저 도착한 건 비일이었다. 유단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몸으로 유리 조각을 가렸다.
비일이 재빠르게 다가와 유단의 손을 낚아챘다.
“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머리에 피도 나잖아.”
“괜찮아요.”
비일이 고개를 들었다. 기울어진 선반을 확인하고는 눈을 찌푸렸다.
“못이 빠졌네. 밑에 있다가 병에 맞은 거야?”
“저쪽에 있다가 우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얼른 달려왔는데, 조금 늦었어요.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네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뒤이어 덴스, 그리고 연구원들이 들이닥쳤다. 슬쩍 보니 가하란과 올란트도 있었다.
비일이 상황을 설명했다. 덴스가 눈 한가득 걱정을 담으며 다가왔다.
유단은 손끝에 들고 있던 유리 조각을 살며시 비틀었다. 날카로운 끝단에 손가락을 베었다.
소리는 내지 않고 눈만 살짝 찡그렸다. 덴스가 피 나는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치료부터 해야겠다. 여기 정리 좀 해줘.”
덴스가 연구원들을 보며 말했다. 유단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치울게요. 별일 아니에요.”
“별일 아니긴.”
덴스가 깨끗한 천을 유단 이마에 가져다 댔다.
“어지럽거나 속이 울렁거리지는 않고?”
“정말 괜찮아요.”
“후유증이 뒤늦게 올 수도 있으니 일단 얌전히 있어라.”
유단은 고개를 끄덕인 후 뒤로 물러섰다. 책장에 등을 대고 앉아 있자 가하란이 다가왔다.
“형, 괜찮아?”
“어. 피만 살짝 났지 크게 다친 건 아니야. 그보다 나 때문에 두 번이나 놀랐겠네. 괜히 미안해지네.”
“형이 왜 미안해.”
유단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운이 없나 보다. 낮에도 쓰러지고, 지금은 병에 맞고.”
“오늘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내일은 반드시 좋은 일이 찾아온대. 그러니까 형, 내일은 괜찮을 거야.”
유단은 가하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위로한답시고 건네는 말이 우습기만 하다.
뉘앙스만 살짝 바꾼 미소를 가하란에게 보여줬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마음이 좀 놓이네. 내일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분명 그럴 거야.”
휴게실 정리는 금방 끝났다.
올란트와 가하란은 조금 전에 떠났다.
가하란은 마지막까지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인사했다. 꼬마의 눈빛이 너무나도 역겨워서 속에 든 걸 게워낼 뻔했다.
세상을 모르기에 가질 수 있는 천연덕스러움. 방실 웃는 입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잡아 뜯어 버리고 싶었다.
유단은 격해지려는 감정을 겨우 다잡았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유독 가하란이 눈에 밟혔다.
낮에 있었던 그 일 때문이리라.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진 나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그 순간은 묘에 묻히는 그 순간까지 잊히지 않으리라.
그래도 딱 하나, 고마운 것이 있었다.
그 녀석 덕분에 눈이 뜨였다.
만약 그 녀석이 손에 책을 쥐여 주지 않았다면, 휩쓸리지 말고 버티란 말을 하지 않았다면, 시시껄렁한 인생을 살다가 패배자로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감사의 마음 역시 잊지 않을 것이다.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가다가 승리자가 되는 그날, 기꺼운 마음으로 아량을 베풀 것이다.
목숨은 살려줄 것이다. 대신, 부모의 목을 취할 것이다. 올란트는 얼굴을 봐뒀으니 됐고, 그 녀석 엄마는 따로 한번 만나 봐야겠지.
아니지.
어미는 죽었다고 했었나?
사소한 것이라 기억이 잘 안 난다. 이미 죽어 버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수고스러운 일 하나 덜었으니 오히려 다행인 건가.
“유단.”
덴스가 다가왔다. 휴게실에는 유단과 덴스뿐이었다. 유단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울음을 참아내는 척하며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덴스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옆에 와서 앉았다. 지루한 침묵이지만 필요한 과정이었다. 유단은 속으로 숫자를 셌다.
덴스가 입을 연 건 50까지 센 다음이었다.
“그동안 널 지켜보면서 참 다부진 애라고 생각했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침착하게 이겨내는 걸 보고 나보다 낫다고 여기기도 했어. 그런 내 태도가 너한테 짐을 지운 것 같구나.”
분위기가 적당히 여물었다. 덴스는 어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친구였으니 더더욱 그렇겠지.
유단은 몸을 웅크렸다. 그러면서 살짝 덴스에게 기댔다.
“가하란이 부러웠어요.”
“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분명 저에게 많은 걸 말씀해 주셨을 테죠. 치프님처럼.”
“네 아버지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널 아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제 곁에 안 계세요. 어머니도 떠나 버리셨고요.”
우는 건 아직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쥐어짜 내야 했다.
먼 미래를 상상해 봤다.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채 비루하게 늙어가는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이 온몸을 때렸다. 충격을 눈물로 환전했다. 해보니 어렵지 않았다.
이 눈물에 담긴 의미는 덴스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겠지만, 뭐 어쨌든 눈물이니까.
슬픈 것도 사실이고.
덴스가 탄식하며 유단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기댈 곳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라. 네 아버지와 난 둘도 없는 친구였으니까.”
“교수님께 민폐를 끼칠 순 없어요.”
“민폐라니. 넌 이제 정식으로 스타쥬 과정을 밟게 될 거고, 그렇게 되면 내 가족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가슴에 쌓아둔 말이 있다면, 털어놓고 싶은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하렴.”
“…감사합니다. 교수님.”
동정을 베풀며 속으로는 으스대고 있겠지? 낮은 자를 도우며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있을 덴스를 생각하니 비웃음만 나온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발판으로 이용할 것이다.
조급하게 굴면 안 된다.
성공은 서두르는 자에게 미소를 보여주지 않으니까.
“이제 가자.”
“네?”
“오늘부터는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야 하니까. 집사람에게 말해뒀으니 필요한 용품은 구비해 뒀을 거야.”
“정말로 가도 될까요?”
“그럼. 아, 집에 가게 되면 아주 귀여운 동생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 애하고도 잘 지내줬으면 해.”
“절 어려워하지 않을까요?”
“붙임성이 워낙 좋은 애라 괜찮을 거야. 길거리에 돌아다니면서 모르는 사람한테 전부 인사할 정도거든. 귀여운 공주님이지.”
유단은 맑은 미소를 지었다.
“교수님을 닮지는 않았나 보네요. 교수님은 낯을 많이 가리시잖아요.”
“그래. 날 안 닮고 아내를 닮았지. 그보다 이젠 정말 괜찮아진 것 같구나. 농담하는 걸 보면.”
유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텅 빈 연구실을 벗어났다. 연구단지 검문소를 지나 사람들이 오가는 인도로 접어들었다.
덴스는 귀족 거주지와 인접한 블록으로 걸어갔다. 둔에서 귀족 못지않게 잘사는 시민들이 이곳에 모여 산다고 들었다.
“나왔어.”
덴스가 집 문을 열면서 말했다. 유단은 따라 들어가며 눈동자를 굴렸다.
작은 여자아이가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가 단숨에 덴스에게 다가가 안겼다.
“아빠 보고 싶었어?”
딸을 안으며 반갑게 웃는 덴스였다. 유단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나씩, 하나씩.
여기 있는 것들을 재료로 삼을 것이다.
“안녕?”
유단은 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이가 수줍게 손을 흔든다.
“봐봐. 인사 잘 받아주지?”
덴스가 말했다.
“교수님 말씀대로 귀엽네요. 교수님하고는 정말 안 닮았고요.”
“그래, 안 닮았다!”
하하, 웃는 덴스였다.
유단은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며 생각했다.
가하란, 네 말대로 내일부턴 좋은 일이 가득할 것 같아.
영혼 밑바닥에서 사랑스러운 탐욕이 꿈틀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