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셀베이아는 조심스럽게 쟁반을 들어 올렸다. 조리장이 준비해준 간식을 들고 기록보관서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세상모르고 누워서 자고 있어야 할 브라인이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조는 것 같지도 않은데.
가하란은 그 옆에 있었다. 조잘조잘 뭔가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브라인의 고개가 앞뒤로 움직였다. 굉장히 기계적인 움직임이다.
“웬일로 안 주무시지.”
셀베이아는 의아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간식을 들고 갈 때는 1분 내외로 도착하니까.
“…대령님?”
책상 앞에 도착했다. 브라인은 퀭한 눈으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양옆에서 밀레나와 율이 튀어나왔다. 터벅터벅 몇 걸음 걷던 두 사람이 동시에 주저앉았다.
셀베이아는 간식이 담긴 쟁반을 책상에 내려두고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밀레나와 율, 둘 다 브라인처럼 얼빠진 눈으로 바닥만 보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토끼 인간 하나와 그냥 인간 둘. 셀베이아가 이마를 찌푸리며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힘쓸 때였다.
“이거, 먹어도 되나요?”
가하란이 간식을 보며 물었다. 유일하게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유지하고 있다.
“다른 분들은 입맛이 없는 것 같으니 우리끼리 먼저 먹죠.”
셀베이아는 구석에서 의자를 가져왔다. 무릎에 쟁반을 올리고 가하란에게 손짓했다.
“마음에 드는 걸로 가져가요. 아, 이 왼쪽에 있는 크래커는 빼고요. 이건 대령님 거라서.”
가하란이 가운데 놓인 길쭉한 과자를 잡았다. 오독오독 과자를 씹으며 눈으로는 바닥에 놓인 파일을 훑고 있다.
문서 상단의 글귀를 속으로 읽었다. 과호흡 시 응급처치법. 어린 애가 흥미를 느낄 만한 내용은 아닌데.
“그걸 왜 읽고 있죠?”
“처음 연 캐비닛에 들어 있었거든요.”
“이해할 수는 있고요?
”읽고는 있는데 어려워서 모르는 것투성이에요. 이해하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아요.”
“재미 위주의 자료라면 따로 보관돼 있어요. 대령님한테 부탁하면 아마 꺼내줄 거예요.”
“나중에 말해 볼게요. 지금은 이걸 읽고 싶어요.”
셀베이아는 조각난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이해가 안 되는 걸 계속 보고 있으면 질리지 않나요?”
“모르는 건 조금 답답하지만, 질리지는 않아요. 오히려 재미있어요. 모르는 것 자체가 너무 신나는 일이에요.”
가하란이 몸을 숙여 파일을 붙잡았다.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모르는 것들은 퍼즐 조각 같은 거라고. 지금 당장은 어디에 끼워 맞춰야 할지 몰라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퍼즐이 완성될 즘에는 필요해질 거래요.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기대돼요. 이 조각들이 언제 제 자리를 찾아 빛나게 될까.”
“퍼즐. 틀린 말은 아니네요.”
가하란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기, 셀베이아 님.”
“제 이름에 ‘님’ 자를 붙이는 사람은 오랜만이네요. 안 어울리니까 경칭은 빼주세요.”
“그러면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편하게 이름만 불러요. 셀베이아. 싫으면 아무렇게 불러도 상관없어요.”
군부에서 막 일하게 됐을 때는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다. 야, 너, 거기, 저기, 어이, 인마.
접수원이라 불러주면 고마울 정도였다. 처음에는 억울하고 화도 났지만, 사람이란 게 계속 겪다 보면 무뎌지는 법이었다.
물론 지금은 군부의 별들조차 막말하지 않게 됐다. 10년 전쯤에 대령님이 호칭을 문제 삼아 한바탕 날뛴 덕이었다.
하대와 존대를 섞은 묘한 어투지만 도구 취급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러면 편하게 불러도 돼요?”
“그렇게 하세요.”
“셀베이아 누나?”
“…그건 좀 낯간지럽네요.”
협소한 인간관계, 아니, 인간관계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알고 지내는 사람이 없었다.
대령님, 그리고 조리장 정도?
그게 불편하다거나 외롭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침묵은 나의 벗이고, 얘기하고 싶을 때는 대령님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누나’라는 살가운 호칭이 기꺼우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진다.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겠죠?”
“그러면 누나라고 부를 테니 편하게 말하면 안 돼요?”
“편하게?”
가하란이 빙긋 웃었다.
“지금처럼 말하는 게 편하면 그렇게 해주세요. 전 괜찮아요.”
“말을 놓아 본 적이 거의 없어서. 말투를 바꾸면 어색할 거 같네요.”
괜스레 입 안이 깔깔해진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목 뒤쪽에 콕콕 찍는 감촉이 느껴졌다. 놀라지는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이니까.
노란 부리 참새, 잭이었다. 그렇다는 건… 셀베이아는 슬쩍 브라인을 보았다.
새빨간 눈동자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 걸음 내딛는 것도 나쁘진 않아. 눈빛에 담긴 뜻이었다.
이럴 때만 어른인 척하는 대령이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맙다.
눈빛을 무시해도 대령은 화내지 않을 것이다. 강제성 없는 조언이니까. 마치 엄마의 잔소리처럼.
양친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가 그립지 않은 건 혈육보다 더 친근한 대령이 있기 때문이다.
“편하게 할게.”
“네?”
“네 말대로 편하게 대해볼게. 근데 나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종종 의지와 상관없이 존대가 튀어나올 수도 있어. 그게 입에 배었으니까.”
한 차례 내뱉고 나서 브라인을 바라봤다. 대령은 기분 좋게 미소 짓고 난 뒤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근데 가하란.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왜 대령님이 일어나 계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조용히 있으라고 해서 조용히 책만 읽었거든요.”
가하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브라인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놈아! 그게 조용히 있는 거야? 삐걱거리는 소리 때문에 잘 수가 없었어. 게다가 잠이 눈꺼풀 앞까지 찾아오면, 기가 막히게 나한테 말 걸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엎어지는 브라인이었다. 셀베이아는 귀를 부여잡으며 몸부림치는 대령을 보며 정말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이제야 나타났네.”
“뭐가요?”
“천적 말이야.”
“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가하란. 난 네가 꽤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가하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밀레나, 우리 돌아가야 해. 강의 시작하겠다.”
시체처럼 누워 있던 율이 흐느적거리며 일어섰다. 셀베이아는 살짝 놀라며 율을 바라봤다. 잊고 있었다. 밀레나와 율이 여기 있었다는 걸.
“맞네. 가야지.”
맥이 탁 풀리는 목소리로 밀레나가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봐도 훤했다. 심상세계에서 한 시간을 헤맸으니 진이 빠지는 것도 당연하다.
“셀베이아 씨. 저희끼리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율이 맹한 눈으로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셀베이아는 율이 손에 쥐고 있는 펜던트를 가리켰다.
“그걸 지니고 있으면 금방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고요. 대령님께서 이 공간을 허락했다는 의미니까.”
“그거 다행이네요. 더는 헤매고 싶지 않거든요.”
율이 가하란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너 거기서 어떻게 나온 거야.”
“선을 따라서 나왔어요.”
“난 그런 거 안 보이던데.”
“잘 보면 보여요.”
“…그래? 나 안경을 하나 맞춰야 하나.”
율이 한숨을 푹 내쉬며 옆으로 비켜섰다. 뒤이어 밀레나가 가하란 앞에 섰다.
“진짜로 푸른 선이 보였다고?”
“응. 누나는 안 보였어?”
“선은 둘째 치고 하늘과 땅이 제멋대로 뒤집혀서 방향조차 잡기 힘들었어.”
“아, 그거! 엄청 신기했지? 땅도 막 접히고.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나중에는 너무 재미있더라.”
“그게 재미있어? 넌… 아니다. 지금은 말할 기운도 없어.”
“누나, 많이 힘들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밀레나였다. 셀베이아는 초콜릿을 한 조각 집어 밀레나에게 건넸다.
“정신 차리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거예요.”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단 게 먹고 싶었어요. 아, 하나만 더 주실래요? 율도 먹여야 할 것 같아서요.”
“이거 다 가져가세요.”
초콜릿을 그릇에 조금 덜어내고 포장지째로 밀레나에게 주었다.
밀레나가 흐느적거리는 율을 데리고 브라인 앞으로 갔다.
“특무대령님. 강의가 있어서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갈 때 쟤도 데려가고.”
브라인이 가하란을 가리켰다.
“저 조금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이거 아직 다 못 읽었어요.”
가하란이 파일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아주 여기에 살림을 차리든지.”
“그래도 돼요?”
“…아니.”
브라안의 손짓을 받은 두 생도가 짧게 군례를 올리고 돌아섰다.
“가하란 다음에 봐.”
“잘 가, 누나! 율 누나도 조심히 가세요!”
희미하게 웃으며 돌아서는 두 사람이었다.
“맞다! 누나도 그 형 만났어?”
밀레나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형?”
“머리카락이 온통 하얀색인 형. 이름은 퀼.”
“아니, 못 만났는데. 그보다 이 밖에 사람이 있어?”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마법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있었어.”
“그래?”
밀레나는 고개를 주억거린 다음 몸을 돌렸다. 대화를 이어나갈 기운조차 없는 것 같았다.
셀베이아는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퀼비언 님을 만났나요? 아니, 만났어?”
“퀼비언? 그 형이 퀼비언이에요?”
“이 안에 있는 흰머리 남자는 그분뿐이니까.”
“제가 아는 퀼비언이 맞아요?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요.”
“맞아. 근데 안에 있는 건 퀼비언 님 본인이 아니야.”
“저랑 얘기하던 도중에 사라졌어요. 마법인 거죠?”
“그걸 마법이라고 해야 하나. 나도 잘 모르겠네. 그분께서 쓰는 마법은 보통 마법하고 다르니까. 정 궁금하면….”
셀베이아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브라인을 바라봤다.
“대령님한테 물어보는 게 어때?”
브라인이 움찔거리는 게 보인다.
“브라인 님은 아세요?”
“적어도 나보다는 많이 알고 계시지.”
가하란의 등을 살며시 밀었다.
종종걸음으로 브라인에게 다가가는데, 거리가 좁혀질수록 브라인이 몸을 움츠렸다. 여우를 피해 굴로 숨어드는 토끼처럼.
“브라인 님.”
가하란의 말문을 열자마자 대령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캐비닛을 차면서 출구 쪽으로 뛰는데, 그렇게 서두르는 대령은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셀베이아! 쟤랑 좀 놀아줘.”
“어디 가시는데요!”
“쟤 없는 곳으로!”
밀집해 있던 캐비닛들이 한순간 돌아서더니 가하란에게서 멀어졌다.
이곳은 대령님의 심상세계. 마음의 대변자인 캐비닛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셀베이아는 잘 알고 있었다.
유쾌한 웃음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가하란.”
“네?”
“앞으로도 우리 대령님을 잘 부탁할게. 네가 곁에 있으면 대령님의 게으름증도 고쳐질 거 같아.”
“저는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요.”
“그걸로 충분해.”
셀베이아는 가하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인 없는 방에 계속 있어봤자 할 것도 없고, 이만 나갈까?”
가하란이 손을 붙잡으며 네, 라고 대답했다.
당돌한 성격과는 다르게 손은 참 작았다. 아니지, 애 나이를 생각하면 작은 게 당연한 건가.
“나가서 설명해줄게. 앞으로 네가 뭘 해야 하는지. 대령님보다는 나하고 지내는 시간이 길 거야. 그래도 괜찮지?”
“전 좋아요. 근데… 책은 읽을 수 있는 거죠?”
가하란이 멀어진 캐비닛을 보며 말했다.
“그건 걱정 마. 실컷 읽을 수 있을 거야.”
셀베이아는 가하란의 손을 살며시 잡아끌며 밖으로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