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너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밀레나는 가하란에게 다가갔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펴봤는데 아픈 곳은 없어 보였다.
“응. 안 다쳤어.”
가하란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 멀건 웃음에 마음이 놓였다.
“어떻게 나온 거죠?”
셀베이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바닥에 보이는 푸른 선을 따라서 쭉 걷다 보니까 여기로 나왔어요.”
지극히 간단한 설명이었다.
밀레나는 푸른 실선 바깥, 캐비닛이 잔뜩 놓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의구심이 살짝 들었다. 셀베이아의 말대로라면 바깥으로 나간 사람은 영원한 미아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가하란은 너무나도 쉽게 이곳으로 복귀했다. 셀베이아가 겁주려고 과장해서 설명한 걸까? 쓸데없이 선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대령님께서 도와준 건가요?”
셀베이아가 브라인을 바라봤다. 브라인은 의자에 앉으며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막 깨어났는데 그런 거 신경 쓸 겨를이 있겠어?”
“그러면 어떻게 저 애가….”
“설명 들었잖아. 선을 보고 따라왔다고. 저 애, 눈이 좋네.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브라인이 길게 하품했다.
“이제 다 해결된 거지? 나 다시 자도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똑바로 앉으세요. 대령님께서 초대한 손님이잖아요.”
책상으로 꼬꾸라지려는 대령의 몸을 셀베이아가 붙잡았다.
“손님이 아니라 가족. 가족끼리 예의 차릴 필요 없잖아.”
“헛소리 그만하시고 이분들 부른 이유나 설명하세요. 그리고 2시간 뒤에 예약받은 거 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시고요.”
“인간들은 왜 이렇게 바지런한 거야.”
브라인은 자신의 수염을 두어 번 잡아당겼다. 저러면 잠이 깨는 모양이었다. 브라인의 눈동자가 조금 맑아졌다.
“밀레나하고 율. 너희 둘이 여기 왔다는 건 디온하고 얘기가 끝났다는 거겠지?”
밀레나는 예, 라고 말하며 한 걸음 다가섰다.
“좋아. 아까도 말했지만 두 사람이 할 일은 어렵지 않아. 가하란이 필요하다고 요청할 때 잠깐만 시간을 내면 돼. 군부에서 연구단지로 이동할 때나, 혹은 다른 곳을 둘러볼 때 너희 중 한 사람이 보호자가 돼줘.”
브라인이 손뼉을 쳤다. 검은 의수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이상. 혹시 질문 있어? 있어도 하지 마. 어려운 거 없었잖아.”
율이 손을 들어 올렸다. 브라인이 한숨을 내쉬며 지목했다.
“뭔데?”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했습니다. 다만 요청이 있을 때 시간을 내라고 하셨는데, 연락은 어떻게 주고받나요?”
“그건 말이지.”
브라인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쿠르릉 소리와 함께 브라인 뒤쪽으로 검은 캐비닛이 늘어섰다.
“하나씩 받아.”
가운데 있는 캐비닛 문이 열리면서 펜던트 두 개가 튀어나왔다. 밀레나는 빠른 속도로 날아든 펜던트를 오른손으로 낚아챘다.
“그걸 지니고 있으면 돼. 퍼밀리어의 표식이니까.”
“퍼밀리어요?”
동물과 교감하는 특수한 마법. 밀레나는 펜던트를 내려다보았다. 이름 모를 노란 보색이 반짝이고 있었다.
브라인이 다시 손짓했다. 저 멀리서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부리가 샛노란 참새 한 마리가 브라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이름은 잭. 얘가 연락책을 맡을 거야. 펜던트가 있어야지만 이 녀석이 다가가니까 항상 소지하고 있어.”
날개를 펴며 날아오른 참새가 율의 머리 위를 지나 밀레나 곁으로 다가왔다. 검지를 펴서 앞으로 내밀었다. 잭이 손가락 위에 앉았다.
“퍼밀리어는 주인 외에 다룰 수 없다고 들었는데, 신기하네요.”
“내 전용 마법이라 일반적인 퍼밀리어하고는 달라. 아무튼 이걸로 궁금증은 다 해결됐지?”
브라인은 만사가 귀찮은 것 같았다. 얼른 자고 싶어 안달 난 얼굴이다.
“대령님.”
밀레나가 운을 떼기 무섭게 브라인이 책상에 엎어졌다. 그러고는 한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괴롭혀야 속이 시원하겠어. 인간 놈들은 정말 사악해. 내가 많은 걸 바랐나? 그냥 좀 자겠다는데 그걸 안 도와주네.”
“…아닙니다. 질문 없습니다.”
당혹스러운 투정에 질문이 쏙 들어갔다. 늙으면 애가 된다는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질문이 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 드릴게요.”
셀베이아가 말했다. 엎어져서 투덜대는 브라인을 쓰다듬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이질감이 없었다.
“선 밖으로 잠깐 나가 봐도 될까요?”
심상세계가 구현된 공간이 어떤 느낌일지, 한번 체험해보고 싶었다.
가하란이 금방 돌아온 걸 보면 그렇게 위험한 것 같지도 않고.
엎어져 있던 브라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좋아. 딱 한 시간만 안에서 놀고 있어. 나는 그동안 푹 잘 테니까.”
다음 수업까지 여유가 있으니 한 시간 정도면 괜찮았다.
“그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한 시간 뒤에 내가 꺼내줄 테니까 염려 말고.”
브라인이 손을 흔들었다.
“잘 헤매다가 와. 지치면 제자리에 앉아 있고.”
얌전히 있던 율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저도 가는 건가요?”
“둘이 짝이잖아. 너도 가야지.”
“저는….”
율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브라인의 손이 움직였다.
검은 의수가 책상을 세 번 내리쳤다. 약간의 어지럼증이 찾아오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밀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런 느낌이구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주변에 보이는 건 알록달록한 캐비닛뿐. 밀레나는 풀어놓은 머리카락을 한데 질끈 묶었다.
“율!”
주변을 둘러보며 힘껏 외쳐봤다. 대답은 없었다. 아무래도 멀리 떨어진 것 같다.
좋아, 금방 돌아가 보겠어.
가하란이 해냈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 * *
“이제야 좀 조용하네.”
브라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인간족들은 하여간 말이 많아서 탈이다. 궁금한 게 뭐 그리 많은지.
방대한 호기심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낮잠을 방해하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물론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를 끼칠 생각은 없지만.
“셀베이아, 한 시간 뒤에 깨워줘. 그리고 간식도 준비해주고. 초콜릿을 듬뿍 올린 크래커가 좋겠어.”
“두 시간 뒤에 예약 있다는 거 잊지 마세요. 아시겠죠?”
“알겠어. 알겠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누가 보면 내 엄마인 줄 알겠어.”
손을 휘휘 저은 다음 캐비닛에서 푹신한 이불을 꺼냈다.
바닥에 깔고 그대로 누웠다. 예정에도 없던 도깨비 때문에 낮잠을 걸렀다. 거기다 뛰어다니기까지 했고.
마음 같아서는 예약이고 뭐고 다 미루고 이틀 정도 잠만 자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셀베이아가 사흘 내내 잔소리를 늘어놓을 터였다.
어릴 땐 참 귀여웠는데.
경외심을 섞어 수줍게 바라보던 귀여운 아이는 어디 가고, 잔소리 못 해 안달이 난 억척스러운 큰딸만 남은 건지.
세월이 야속하다, 야속해.
눈을 지그시 감고 잠의 낙원으로 떠나려 할 때였다. 자박거리는 소리에 눈을 슬그머니 떴다.
“…왜?”
가하란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인 님.”
“그니까 왜.”
“저 뭐 하면 될까요?”
“할 거 없어. 산페르 님도 지금은 조용히 계시잖아. 너도 그냥 조용히 있으면 돼.”
“조용히 있으면 되나요?”
“그래. 조용히, 아주 조용히.”
셀베이아가 한 시간 뒤에 오겠다며 영역 바깥으로 나갔다. 잔소리꾼들이 모두 사라졌다.
기분 좋은 적막감에 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꿀맛 같은 단잠으로….
귀가 움찔거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 브라인은 귀를 끌어당겨 소리를 차단했다.
이제 정말로….
“저기, 브라인 님.”
못 들은 척하자.
“브라인 님?”
가하란이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춰서 말했다. 귀가 간지러울 정도였다.
“브라인….”
“왜! 왜!”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 여기에 있는 것들 읽어도 되나요? 조용히 있고 싶은데 너무 심심해서요.”
가하란이 주변 캐비닛을 가리켰다. 브라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싸맸다. 의수의 차가운 감촉에 잠이 살짝 달아나려 했다. 안 돼, 이러면 안 되지.
“열리는 건 봐도 돼. 안 열리는 건 보면 안 되고. 알겠어?”
“열리는 것만 봐라. 네, 알겠어요.”
“이제 정말 조용히 하는 거다. 가하란, 넌 착한 아이니까 내 말 들을 거지?”
“네. 정말로 조용히 할게요.”
“그래. 이 할머니의 마지막 부탁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반쯤 도망쳤던 잠의 기운이 스멀스멀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마음을 누그러트리는 나른함에 입가가 절로 씰룩였다.
‘그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분명 잠이 들었을 것이다.
끼기기긱, 끼긱. 녹슨 철제문이 기분 나쁜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래된 캐비닛을 안 버린 내 잘못이지. 그럼, 내 죄가 크지. 브라인은 귀를 틀어막으며 무시했다.
어떻게서든 자고 말 것이다.
바라라의 딸이 고작 인간 꼬마 따위에게 굴복할 수 없지. 그럼, 그렇고말고.
“브라인 님. 이거 열리는 건가요, 아니면 안 열리는 건가요?”
오, 신이시여.
* * *
밀레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향감각 따윈 도움이 안 되는 세계였다.
적색 캐비닛을 목표 삼아 걷고 있었는데, 어느새 등 뒤에 빨간 캐비닛이 있었다.
분명 한 방향으로만 걸었는데 아까 본 캐비닛이 옆에 있었다.
이정표 삼을 만한 것도 없고, 설령 고정된 물체를 목적지로 정한다 해도 방향이 제멋대로 바뀌어 버리니 의미가 없었다.
여기서 자력으로 탈출하는 게 정말 가능한 걸까? 가하란은 대체 어떻게 나간 거지?
브라인은 가하란의 눈이 좋다고 말했다. 시력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나?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황망하게 만드는 캐비닛만 잔뜩 놓여 있을 뿐.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간을 보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한 시간은 헤맨 것 같았는데 20분도 채 안 지나 있었다.
시간을 지각하는 감각에도 뭔가 이상이 생긴 모양이다. 영원한 미아. 그 말이 가슴에 확 와닿았다.
“…그래도 도움은 되겠어.”
이제 오지에 떨어져도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적지에 홀로 낙오됐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끝까지 해볼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빠져나가리라.
* * *
율은 회중시계를 멍하니 바라봤다. 50분이 지났다. 시계에서 눈을 떼고 오른쪽을 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된 캐비닛들이 차례차례 검은 웅덩이로 뛰어들고 있었다. 끼긱끼긱, 날이 선 소리가 마치 유언처럼 들렸다.
왜? 갑자기?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곳이지?
“좀 꺼내줘요!”
검은 하늘을 향해 힘껏 외쳤다.
아쉽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가하란.”
“네?”
“여기 있는 거 재미없지? 그냥 돌아갈래? 아니, 그냥 돌아가라. 응? 산페르 님은 나중에 내가 다시 만나면 되니까. 한 100년 뒤에.”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여기 있는 거 되게 즐거워요.”
가하란은 캐비닛을 열며 대답했다. 읽을 거리가 한가득이었다. 비싸서 못 사는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매일 찾아와서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신이시여.”
가하란은 파일을 들추면서 브라인을 흘깃 바라봤다. 특무대령은 아까 전부터 계속 신을 찾았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조용히 하라고 했으니 말을 붙이진 않았다. 대신 다른 캐비닛을 뒤적거렸다. 조금 녹슬어서 그런지 잡아당겨도 잘 열리지 않았다.
끼긱끼긱 소리에 살짝 손을 놓았다. 뒤를 돌아보니 브라인이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하란은 살며시 웃은 다음 조심스럽게 캐비닛 문을 당겼다.
“신이시여.”
다시금 브라인이 신을 찾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