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가하란은 밑을 내려다봤다. 종이들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코 고는 소리에 맞춰 땅 전체가 흔들렸다.
“…브라인 님?”
심상세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재채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곳 전체가 뒤집혀 버릴 것이다.
캄캄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고래고래 소리치면 브라인에게 목소리가 닿을까?
“저 여기 있어요!”
화답하듯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돌아왔다. 몸이 휘청거렸다. 발밑을 지탱하던 종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가하란은 언덕 밑을 내려다보았다. 늪처럼 변한 땅이 종이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재빨리 몸을 돌렸다. 쏟아지는 종이 더미를 밟으며 위로, 위로 올라갔다.
몇 번 자빠질 뻔했지만 겨우 중심을 잡고 나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사방이 조용해졌다. 가하란은 가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눈사태처럼 흘러내리던 종이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다 끝난 걸까?
“어어!”
안심하던 찰나, 세상이 접혔다. 평평했던 바닥이 수직으로 꺾였다.
몸이 둥실 떠올랐다. 코앞에 생긴 절벽 끝자락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추락이 좀 더 빨랐다. 종이로 된 절벽 끝에 손가락이 스쳤다.
큰일이다. 발밑에 아무것도 없었다. 끝없는 어둠만이 꾸역꾸역 주변 모든 것을 삼키고 있었다. 저곳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잡아.”
눈앞에 붉은 천이 드리워졌다. 가하란은 주저 없이 양손으로 천을 붙잡았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거세게 때렸다. 천에 매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팔랑거리며 떨어진 종이 한 개가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식은땀이 비죽 솟았다.
“꽉 잡고 있어. 끌어 올려 줄 테니까.”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쳐들었다. 절벽 끝에 사람이 있었다. 누군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목소리는 남자였다.
손목에 천을 휘감고 발등과 발바닥 사이에 천을 교차시켰다. 이러면 떨어질 염려가 없다. 테리 형이 알려준 줄 타는 방법이 이럴 때 도움 될 줄이야.
천이 움직였다. 절벽 끝에서 남자가 손을 내밀어 주었다. 가하란은 손을 붙잡고 위로 올라섰다.
“고, 고맙습니다.”
참았던 숨이 뿜어져 나왔다. 몸이 파르르 떨렸다. 고개를 들 힘도 없어서 바닥에 엎어진 채 종이로 된 땅만 바라봤다.
“나이도 어린 게 왜 이런 델 어슬렁거려. 브라인 아줌마한테 밉보인 거 있어?”
브라인이란 말에 간신히 머리를 들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 끌었다.
남자의 나이는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아니, 어떻게 보면 아빠와 동년배로 보이고, 또다시 보면 루카 아저씨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어쩌면 그보다 많을지도 모르고.
가하란은 눈을 깜빡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얼굴은 분명 십 대 후반인데, 왜 보면 볼수록 나이가 지긋한 어른처럼 느껴질까.
“뭘 그렇게 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게 봐? 말해봐.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라 뭐가 됐든 재미있게 들어줄 테니까.”
“…형, 아니, 아저씨는 몇 살인가요?”
“보자마자 나이부터 묻는 거야?”
남자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나이 먹으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한다는 건 알고 있지?”
“네.”
“그러면 내가 몇 살쯤 됐을까?”
“솔직히 모르겠어요. 동네 아는 형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고?”
남자가 웃으면서 되물었다.
“할아버지처럼 보이기도 해요.”
“눈썰미가 좋네. 제대로 봤어. 내가 일단 백 살은 넘겼거든.”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아닌데. 진짜야.”
가하란이 눈을 씰룩이며 바라보자 남자가 크게 웃었다.
“농담이야. 이 얼굴로 어떻게 백 살을 넘겼겠어. 머리가 하얗게 세니까 나이 들어 보이는 거야.”
남자가 곁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붉은 천을 돗자리처럼 바닥에 깔아놓았다.
일어서서 가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슬금슬금 기어서 남자 곁으로 갔다.
“만났으니 이름을 알아야겠지? 난 퀼. 넌 이름이 뭐냐?”
퀼. 쪽지에서 본 이름이었다. 가하란은 남자의 흰색 머리를 보며 말했다.
“전 가하란이에요.”
“가하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네. 뭐, 아무래도 좋아. 여길 어떻게 오게 된 건지 그거나 말해봐.”
천연덕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묻는 퀼이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왜 이런 곳에서 혼자 있는 걸까.
“저기….”
“질문은 내가 먼저 했잖아. 그거부터 대답해봐.”
퀼이 코를 훌쩍거렸다. 가하란은 잠깐 동안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브라인과 만나게 됐고, 기록보관서에 들어와 움직이던 차에 캐비닛에 휩쓸려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그 아줌마 아직도 그러니? 정리 좀 하고 살라니까 말을 더럽게 안 들어요.”
“브라인 님을 잘 아세요?”
“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그냥 사이 안 좋은 이웃 정도로 하자.”
코를 부여잡으며 계속 훌쩍거리는 퀼이었다. 감기인가? 가하란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조금 더럽지만, 이거 쓰실래요?”
“괜찮아.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진짜로 코를 흘리는 것도 아니고.”
진짜로 흘리는 게 아니라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까 뭐 물어보려고 했어?”
“…형은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나는 너처럼 휩쓸려 들어온 건 아니야. 여기가 내 사무실 중 하나거든. 임대라 처우가 그리 좋지는 않지만.”
퀼이 손가락으로 투명한 상자들을 가리켰다.
“저게 뭔지 알아?”
“아니요.”
“너 잭 오 랜턴이라고 들어봤어?”
“알아요. 도깨비불. 무덤에서 자주 보인다고 했어요.”
“그래, 그 도깨비. 저것들은 다 도깨비야.”
가하란은 상자 안 생명체를 보며 물었다.
“살아 있는 건가요?”
“‘살아 있다’의 정의가 뭔데?”
“어… 움직이는 거?”
“그러면 구르는 바퀴도 구르는 동안에는 살아 있는 거야?”
“피가 흐르는 거요! 숨도 쉬고.”
“산 깊숙한 곳에 숨도 안 쉬고, 피도 안 흐르는 괴물이 있는데 그건 죽었다고 해야 하나? 이상하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어려워요.”
“잘 생각해봐.”
이상한 곳에 표류했다는 것도 잊은 채 가하란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한참을 생각한 뒤에 입술을 뗐다.
“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 이게 살아 있다는 건가요?”
“좋은 대답이야.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것들은 어떨까?”
상자 안에 든 도깨비가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모르겠어요. 쟤들한테도 마음이 있나요?”
“있는 놈도 있고 없는 놈도 있어. 사람하고 비슷하지.”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아니, 있어. 마음을 죽이고 살아가는 사람은 꽤 많아. 그런 인간은 아주 무섭지.”
퀼이 일어서더니 고개를 들었다.
“이 아줌마, 아주 단잠에 빠졌네.”
드르렁거리는 소리가 우렁차게 하늘을 채워 나갔다. 가하란은 귀를 막으며 일어섰다. 이제는 몸을 가눌 수 있었다.
“형.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알아요?”
“미안하지만 그건 나도 몰라.”
“아까는 휩쓸려 들어온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맞아. 내 의지로 여기에 있는 거야. 하지만 지금의 내 상태로는 여기서 나갈 방법을 찾아낼 수 없어. 이 정신체는 아주 한정적인 자원으로 운용되고 있거든.”
“네?”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퀼이 바닥에 깔아둔 붉은 천을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알려주지 않아도 넌 쉽게 나갈 수 있을 거야.”
“제가요?”
“네 눈은 아주 특별해. 그러니 잘 살펴봐. 네 눈은 세상을 온전한 정보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퀼이 서랍장 쪽으로 걸어갔다.
“아가야, 만나서 즐거웠다. 그러면 조심해서 가라.”
형, 하고 부르기도 전에 퀼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옅은 보랏빛으로 물든 퀼의 몸이 한순간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다는 듯이 아주 깔끔하게.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반쯤 열린 서랍 안에 은은하게 빛나는 쪽지가 보였다.
“…마법?”
가하란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천이 감겨 있던 손은 여전히 얼얼했다. 환상은 아닌데.
한동안 멍하니 서랍장을 보다가 짧게 숨을 토해냈다. 그런 다음 쪽지를 향해 말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해볼게요.”
퀼이 해준 말 때문일까?
희한하게도 자신감이 생겼다.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폈다. 종이로 만들어진 언덕 아래를 살피고, 검은 천장을 바라본 뒤 언덕 너머로 시선을 던질 때였다.
“이런 게 있었나?”
발밑에 푸른 실선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이다.
원래 있었던 걸까, 아니면 지금 막 생겨난 걸까.
푸른 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언덕 너머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렇다 할 표시는 찾지 못했다. 유일한 길잡이인 푸른 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종 땅이 출렁거리고, 머리 위로 캐비닛이 날아들었지만 적응하고 나니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다.
“저녁 먹기 전까지 나갈 수 있으려나.”
가하란은 코 고는 소리에 맞춰 걸음을 뗐다.
* * *
“특무대령….”
밀레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셀베이아가 특무대령에게 뛰어갔다.
“일어나요!”
셀베이아가 브라인의 귀 한쪽을 들어 올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브라인이 허우적거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밀레나는 삐거덕대는 의자와 넘어져 끙 앓는 브라인을 바라보았다. 위급한 상황인 건 알겠는데, 그것과 별개로 저렇게 해도 되는 건가?
“뭐야?”
브라인이 졸린 눈으로 되물었다.
“뭐겠어요. 대령님이 말씀하신 손님들이지. 어떻게 그새를 못 참고 잘 수가 있어요?”
“털갈이할 때는 잠 많아진다는 거 알잖아.”
“경우라는 게 있죠.”
셀베이아가 노려보자 브라인이 구시렁거리며 눈을 돌렸다.
“깼으면 빨리 아이나 찾아오세요.”
“아이라니?”
“가하란이요. 그 애가 캐비닛에 떠밀려서 선 밖으로 나갔어요. 대령님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얼른 다녀오세요. 귀찮다는 말 하지 말고.”
“…맞네. 내가 초대했었지.”
하품을 크게 하며 일어서는 특무대령이었다.
“얼른 움직이세요. 애 혼자 얼마나 무섭겠어요.”
“보채지 마. 그리고 무섭게 째려보지도 말고. 너 그러다 주름 생긴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브라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셀베이아가 브라인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려친 것이다.
밀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금 저래도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알았어. 무슨 애가 날이 가면 갈수록 손이 매워져. 난 널 그렇게 안 키웠다.”
“이제 와서 부모 노릇 할 생각 말고 얼른 찾기나 하세요.”
둘 사이에 뭔가 사연이 많은 것 같았다. 율이 곁으로 다가와 작게 말했다.
“보통 친한 게 아닌가 봐.”
“그러게.”
브라인이 늘어진 귀를 쓱쓱 문지르며 푸른 선으로 걸어갈 때였다. 돌연 멈춰 서더니 등 뒤를 돌아본다.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하나.”
“얼른 안 가고 뭐 하세요?”
접수원이 도끼눈을 뜨자 특무대령이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 의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밀레나도 시선을 옮겼다.
푸른 실선 너머, 검은 안개 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브라인이 히죽 웃더니 넘어진 의자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갈 필요 없겠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어둠을 뚫고 가하란이 튀어나왔다.
가하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이내 해맑게 웃었다.
“저 왔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