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광량이 한순간 줄었다.
밀레나는 뒤를 돌아봤다. 소리도 없이 문이 닫혀 있었다.
“다 들어오셨죠?”
접수원 셀베이아가 말했다. 가하란과 율이 네, 라고 활기차게 대답했다.
“밀레나 씨?”
“저도 있습니다.”
“불편하겠지만 제가 호명하면 대답해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알겠어요.”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 왜 이렇게 조심스러운 걸까. 의구심을 품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캐비닛, 그리고 또 캐비닛. 가구거리에서 만들어진 모든 캐비닛이 이곳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수백, 어쩌면 수천 년의 기록이 보관된 장소. 경이로움을 느껴야 하건만, 눈에 들어오는 게 캐비닛뿐이라 별 감흥이 안 생겼다.
“이제 움직일게요. 천천히 따라오세요.”
셀베이아가 앞으로 나아갔다. 손에 든 마법등이 은은한 빛을 뿌렸다.
“근데 생각보다 좁네.”
율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밀레나도 같은 생각 중이었다. 자료를 보관하는 장소가 따로 있는 걸까?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뺐다. 율 너머로 셀베이아가 보였고, 그 앞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특무대령이 있었다.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 세상 모르게 자고 있다. 군부에서 가장 한가로운 사람을 뽑으라면 특무대령이 아닐까?
아니지, 사람은 아니구나.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푸른 실선이 눈에 들어온다. 나가면 죽을 때까지 미아가 된다라. 이 선 밖으로 나가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며 선을 훑던 중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이 시야에 걸렸다. 가하란이었다. 선 밖으로 손을 내밀려 하다가 잽싸게 거둔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아마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가하란, 엉뚱한 짓 하면 안 돼.”
밀레나가 말했다. 가하란이 슬그머니 돌아보며 어설픈 미소를 짓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공간. 위험 요소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잠깐만.
밀레나는 다시 앞을 보았다. 여전히 졸고 있는 특무대령이 보였다.
거리는 대략 20미터 남짓.
“율.”
“나도 너랑 같은 생각 중이야. 거리가 안 줄어들어.”
1분 넘게 걸었다. 꽤 오래 걸은 것이다. 이 정도면 별관 끝에서 끝까지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밀레나는 왼쪽을 보았다. 캐비닛들이 시야 뒤쪽으로 밀려나는 중이었다. 제자리걸음 하는 건 아니었다.
“여긴 특무대령님의 심상세계가 구현된 공간입니다. 물리적인 거리감으로 여길 재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셀베이아가 입을 떼며 걸음을 멈췄다.
“잠시 대기하세요. 그리고, 놀라지 마시고요.”
긴장감이 찾아들었다. 곁눈질로 주변을 살필 때였다. 그르릉, 묵직한 마찰음이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소음이 점차 가까워지고, 이내 소리의 원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캐비닛이었다. 수레를 한없이 길게 이어놓은 것처럼, 한데 엮인 캐비닛들이 줄지어 눈앞을 지나갔다.
그 속도가 꽤 빨랐다. 치이면 타박상에서 끝나지 않으리라.
쿠그그그, 캐비닛이 왼편으로 사라졌다. 소음이 점점 옅어지다가 이내 침묵이 찾아왔다.
“방금 그거 뭐예요? 따라가도 되는 건가요?”
가하란이 캐비닛이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쭉 빼며 질문했다.
“문서 정리 중입니다. 특무대령님께선 수면 중에 이곳을 정리하시죠.”
셀베이아가 가하란의 옷깃을 엄지와 검지로 꼬집으며 뒤로 잡아당겼다.
“따라가면 안 됩니다. 물리적 거리를 잴 수 없다고는 하지만, 물리적 실체가 없는 건 아닙니다. 캐비닛 열차에 치이면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 절대 가까이 가지 마세요.”
가시죠, 셀베이아가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눈앞에서 캐비닛이 춤을 추든, 달리기하든 별 상관없다는 듯이.
“저기, 셀베이아 씨.”
율이 말했다.
“왜 그러시죠?”
“여기서 일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15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정식채용 이전까지 하면, 20년은 됐겠네요.”
셀베이아는 스무 살 중반으로 보였다. 그런데 경력이 20년이라니.
특무대령만큼이나 비밀이 많아 보이는 접수원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여전히 특무대령과의 거리는 20미터였다. 거리가 줄어들기는 하는 걸까?
“때에 따라서 달라요. 특무대령님께서 저흴 배려해주면 10분 남짓 걸릴 테고, 나 몰라라 하면 3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제멋대로인 곳이네요.”
“그럴 수밖에요. 특무대령님을 닮은 곳이니.”
셀베이아가 뒤를 돌아봤다.
“그러니 이곳을 방문하실 땐 예약을 잡으셔야 합니다. 운이 좋아서 대령님과 함께 들어가면 몇 초 만에 저 끝에 도착하니까요.”
“꼭 그래야겠네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줄지어 이동하는 캐비닛을 두 번 만났을 때였다.
삐걱, 삐걱, 삐걱. 사방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밀레나는 반사적으로 앞을 보았다.
특무대령의 머리가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앉아 있는 등받이 의자 역시 앞뒤로 삐거덕거렸다.
“저기, 이거 괜찮은 거 맞죠?”
걱정을 담아 셀베이아에게 물었다. 셀베이아가 마법등을 내리며 말했다.
“좋지 않네요. 망할 분께서 저희가 여기 올 거란 걸 잊으신 모양입니다.”
망할 분? 감정이 듬뿍 담긴 언어였다. 셀베이아가 자세를 낮췄다.
“선 안쪽은 덜 출렁거릴 겁니다. 최대한 자세 낮추세요. 머리 위로 캐비닛이 지나갈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예? 머리 위로요?”
되묻자마자 캐비닛 하나가 꾸물꾸물 다가왔다. 속도가 느려서 위험하지는 않았다.
자세를 낮추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특무대령님을 깨울 방법은 없나요?”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면 되겠지만, 여기선 답이 없네요.”
“아하.”
시원시원한 대답이었다. 좌우로 정렬된 캐비닛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이 달린 것처럼 쿵쿵거리며 날뛰질 않나, 바다에 던져진 것처럼 출렁거리며 허공을 누비질 않나.
“문서 정리하는 거 맞죠?”
질문을 던질 때였다. 쾅, 소리가 바로 옆에서 났다.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낡은 캐비닛이 두 개가 서로 부딪치더니 수축을 시작했다. 우그러진 캐비닛은 점점 작아지다가 이내 주먹만 한 크기의 쇳덩이가 됐다.
저 사이에 사람이 끼어 있었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래도 엄청 위험하지는….”
율이 입을 열 때였다. 바닥이 푹 꺼졌다. 어, 하는 사이에 몸이 붕 뜨고 곧바로 추락했다.
아래를 보았다. 다행히 지면이 보였다. 높이도 그리 높지 않고.
당황했어도 대처가 늦지는 않았다. 이 정도 일에 허둥댈 정도면 스콜라 생도가 될 수 없다.
자세를 가다듬으며 바닥에 안착했다. 동시에 율과 셀베이아가 내려왔다.
“다들 무사하시죠?”
“예. 괜찮아요.”
대답하고 나서 불길함에 고개를 휙 들었다. 가하란이 공중에 떠 있었다. 왜 저기에, 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였다.
옆에서 밀려온 캐비닛에 가하란이 휩쓸렸다. 곧바로 도약하려 했으나 셀베이아가 붙잡았다.
“늦었어요.”
밀레나는 떨리는 눈으로 위를 바라봤다. 숨 막히는 적막이 찾아들었다.
바닥이 다시 꿈틀대더니, 푹 꺼졌던 땅이 본래 높이로 돌아왔다.
가하란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밀레나는 왼쪽으로 몸을 틀어 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다시금 셀베이아가 옷을 붙들었다.
“놔요!”
“진정하세요. 선 바깥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나가 봤자 쫓아갈 수 없어요.”
“그렇다고….”
“지금은 최대한 빨리 특무대령님 곁으로 가죠. 그러면 해결될 겁니다.”
침착하게 말하는 셀베이아였다.
“열차에 떠밀린 거지 치인 건 아니라 다치지 않았을 거예요.”
밀레나는 푸른 실선을 노려보다가 몸을 틀었다.
“알겠어요. 일단 특무대령님에게 가죠.”
작전 수행 중 멋대로 개인행동을 하면 피해가 확산된다. 이곳 책임자인 셀베이아를 따라 움직이는 게 현명했다.
밀레나는 가하란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한 다음 걸음을 옮겼다.
* * *
“와아.”
가하란은 옷을 털면서 일어났다. 공중에 떠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이 캐비닛에 떠밀려 버렸다. 아차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신이 나기도 했다.
선 바깥세상을 탐험해 보고 싶었으니까.
“아무도 없나요?”
입가에 손을 대고 크게 외쳤다.
드넓은 공간으로 목소리가 뻗어나갔다. 메아리는 없었다. 대체 얼마나 넓은 거지?
선 바깥으로 나오니 끝없는 평지가 펼쳐졌다.
건물 안에 이런 장소가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심상세계는 정말 신비한 곳이었다.
살짝 겁이 났지만, 두려움보다는 모험심이 조금 더 컸다.
층층이 쌓인 캐비닛을 따라 움직였다. 방금 만든 것처럼 윤이 나는 캐비닛이 있는가 하면, 녹슬어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캐비닛도 있었다.
조심스럽게 캐비닛을 만져봤다. 딱딱하고 매끈한 쇠의 질감이었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려 했으나, 열리지 않았다.
“저 여기 있어요.”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자리를 옮길 때마다 크게 소리를 냈다.
“산페르 아저씨. 있어요?”
어디서든 대답해주던 산페르도 지금은 조용했다. 혼자라는 걸 재차 실감했다.
캐비닛으로 된 벽을 왼손으로 짚어가며 걸을 때였다. 풍경이 바뀌었다.
평지가 아닌 언덕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찢어진 종이가 수북했는데, 읽을 수 없는 글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가하란은 종이로 된 언덕을 올라갔다.
“이건….”
캐비닛 대신 투명한 상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안에는 기괴한 생물들이 보관돼 있었다. 어떤 건 바짝 말랐고, 어떤 건 금방 잡아 넣은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가까이 다가갔다. 죽은 줄 알았던 생물이 눈을 번쩍 뜨더니 상자 안에서 날뛰었다.
가하란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눈은 세 쌍, 털이 돋아난 다리는 네 쌍. 몸통은 사마귀를 닮았지만 머리 부분이 이상할 정도로 길다.
가장 먼저 정령이 떠올랐다. 정령세계에서 본 정령 중에는 기괴하게 생긴 것도 많았으니까.
동시에 도깨비도 생각났다. 섬뜩한 생김새가 공방에서 마주친 도깨비와 비슷했다.
날뛰던 생물이 다시 얌전해졌다.
일단 투명한 상자는 내구성이 좋아 보였다. 안전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살펴볼 시간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언덕 위 공간을 탐험할 때였다. 낡은 서랍장이 보였다. 캐비닛과 달리 서랍이 반쯤 열려 있었다.
다가가 안을 들여다봤다. 파일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는데,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조합 연혁표』, 『청형 개별구분』.”
이게 뭐지. 파일의 내용도 보고 싶었지만 맞물린 덮개가 열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허락을 받아야 읽을 수 있는 것 같았다. 꺼낸 파일을 다시 돌려놓을 때였다.
쪽지 하나가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하란은 몸을 숙여 쪽지를 쥐었다.
-아줌마. 정리 좀 하고 살자. 매번 이게 뭐야.
날렵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오른쪽 밑 귀퉁이를 보았다. ‘퀼’. 아무래도 메모를 남긴 사람의 이름 같았다.
쪽지를 접어 파일 사이에 끼워놓을 때였다.
드르렁, 하고 코 고는 소리가 천둥처럼 사방에서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