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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09화 (82/558)

제109화

문이 닫히는 게 왜 이렇게 느리게 느껴질까. 밀레나는 간신히 사령관실 문을 닫고 허리를 숙였다. 몸이 휘청거렸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괜찮아?”

율이 팔을 붙잡아주며 물었다. 얼굴에 걱정이 묻어난다.

“잠깐만.”

숨을 고르고 허벅지에 힘을 줬다. 사령관의 공허한 눈동자가 다시금 떠올랐다. 살을 에는 두려움이란 게 무엇인지, 오래간만에 깨달았다.

“이제 괜찮아.”

몸을 곧게 폈다. 방황하던 정신도 제자리를 찾았다. 밀레나는 흐트러진 복장을 재점검했다.

“어때?”

율한테 상태를 물었다.

“약간 얼빠져 보이긴 하지만 나쁘진 않아.”

“그러면 됐어. 얼른 내려가자.”

문 너머에 괴물이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빠르게, 하지만 품위는 지키며 중앙계단으로 향했다.

“면담은 끝난 겁니까?”

수석부관과 만났다. 밀레나는 옅게 웃으며 예, 라고 대답했다.

“먼저 온 손님은 기록보관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군례를 올리려 하자 수석부관은 됐다는 눈짓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오찬에서 우리가 봤던 사람은 대체 누구였지? 그때 본 사령관님하고 저기 계신 분하고 동일인물이라는 게 믿기질 않네.”

율이 입을 열었다.

“봤어?”

밀레나는 함축적인 질문을 던졌다. 율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끄덕였다.

“너 나올 때 나도 살짝 봤지. 사령관님께서 하신 말씀도 들었고. 순종적이라… 다음에 뵙게 되면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이렇게 될 거란 거 짐작했잖아. 왜 같이하겠다고 한 거야?”

율은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사령관이 노골적으로 의도를 내비쳤는데 결과를 예측 못 했을 리가 없다.

“거절하려고 했어. 근데, 네 표정을 보니까 차마 말을 못 하겠더라.”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율이 버럭 화를 냈다.

“오히려 내가 궁금하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왜 덥석 한다고 말해버린 거야? 단어만 살짝 바꾸면 항명 수준이었어. 사령관님이 아주 대놓고 거절하란 눈치까지 줬는데.”

“알아. 바보가 아닌 이상 알지. ……그래서 사령관님 말에 따를 수가 없었어.”

율이 팔짱을 꼈다.

“너한테 그 꼬마가 그 정도의 의미였어?”

“나도 몰라.”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령관실에서는 시원하게 대들었지만, 계단을 내려오면서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 일인데.

사령관한테 밉보여봤자 득 될 것도 없는데.

게다가 모레 기동 시범까지 있고!

득과 실을 따지고 보면 손해만 본 대답이었다. 바보 같다는 말을 들어도 반박할 수가 없을 정도다.

“내가 안 한다고 하면 사령관님은 분명 측근을 붙였을 거야. 가하란을 아주 집요하게 관찰했겠지.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어.”

“너 그거 뭐 하나 증명할 길 없는, 직감뿐인 이야기란 거 알고 있지? 괜한 오지랖으로 사령관님한테 찍혔을 수도 있어.”

“‘찍혔을 수도 있어’가 아니라 이미 찍혔지. 아아, 왜 그랬을까.”

율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이씨, 이제 와서 후회하면 나는 어쩌라고.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잘못했다고 빌래? 특무대령님이 맡긴 일을 안 하겠다고 할래?”

밀레나는 눈을 찡그리며 도리질을 쳤다. 율이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댔다.

“이유나 말해줘. 사령관님을 개무시하면서까지 가하란 옆을 지킨 이유를.”

“아까도 말했잖아. 모른다고.”

“모르는데 그런 결정을 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아는 밀레나는 그런 애가 아니야.”

밀레나는 마른세수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결정은 감정적이었지만, 감정에도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걜 만나고 나서 꽤 즐거웠거든.”

“즐거웠다? 그래서 둔 군부 통수권자에게 한 방 먹였다?”

“먹였다는 표현은 좀 그렇네. 그냥 예의 바르게 거절한 거지.”

둔에 오기 전까지, 훈련 외에는 모든 게 따분했다. 파벌을 나누어 정치 싸움하는 동기들은 우습기만 했고, 같이 어울리라며 강요하는 애들이 지겹기만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선을 긋지 못하고 그 무리에 섞여 둥둥 떠다니는 나 자신이 가장 답답하고 무료했다.

그러다 가하란을 만났다. 세상에 관해 아무것도 모를 꼬마 애라 생각했는데, 말을 섞어 보니 의외로 아는 게 많았다.

머리에 든 게 많으면 득실을 따지기 마련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랬다. 나 자신조차도.

하지만 그 애는 계산하지 않았다. 이해타산을 뒤로 물리고 정말 사소한 얘기들로 시간을 채워나갔다.

한 번 웃고 나면 끝인, 인생에 별 도움도 안 될 이야기들을 수없이 나누었다. 훗날 돌이켜 보면 기억조차 안 날 그런 잡담들이었다.

“그냥, 그냥 걔한테 별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멍청한 이유네.”

“알아. 내가 왜 그랬는지 지금 살짝 후회 중이니까 너무 그러지 마.”

“더 후회하기 전에 다시 돌아가서 말할 수도 있어. 사령관님. 저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라고.”

“그건…….”

두서없이 말하는 걸 싫어하고, 말끝을 흐리는 건 더더욱 싫어하는데 지금은 명쾌한 답이 안 나왔다.

우물쭈물하자 율이 고개를 비스듬히 하며 말했다.

“널 처음 봤을 때는 이런 꼬마도 스콜라 생도가 되는구나, 하고 한숨이 나왔어. 이렇게 작은 애가 훈련을 버틸 수가 있을까? 뒤치다꺼리할 일만 생기는 게 아닐까?”

밀레나가 인상을 쓰며 바라보자, 율이 고개를 틀었다. 계단 위쪽을 바라보며 율이 말을 이었다.

“물론 정식 훈련이 시작되고 나서는 너에 대한 인상이 싹 바뀌었지. 나이와 체구는 중요한 게 아니었어. 육체의 부족함은 마나로 다스리면 될 뿐, 중요한 건 정신력이었지. 그런 점에서 넌 동기 중 누구보다 어른이었고.”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해.”

율이 씩 웃었다.

“근데 오늘 보니까 또 애다운 면이 있어서 새롭다고.”

“누구 보고 애래.”

“너 말이야, 너.”

율이 벽에서 등을 뗐다.

“내려가자.”

“지금도 안 늦었어. 너라도 돌아가서 안 하겠다고 해.”

“싫어.”

“왜?”

“왜겠어. 네가 그 애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거지.”

율이 눈웃음을 지었다. 보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솔직한 표정이었다.

“나도 네가 별일 없었으면 좋겠어. 만약 별일이 생긴다면, 어쩔 수 없이 같이 겪어내야지. 혼자보단 둘이 나을 테니까.”

“너한테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어.”

“그러는 넌 이번 장사에서 이득을 챙겼고? 손해만 잔뜩 봤잖아. 똑같은 거야.”

율이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두어 칸 내려간 율이 뒤를 돌아봤다.

“좋든 싫든 친구라는 게 그런 거 아니야?”

“……나중에 원망하지 마.”

“싫은데. 원망할 건데. 그때 왜 사령관님한테 대들어서 나까지 똥 밟게 했냐고 따질 거야.”

밀레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도 안 고마워. 고맙다는 말 죽어도 안 할 거야.”

“나도 말로 퉁치는 거 질색이야. 요번에 휴만 갤러리에서 오론 작가의 작품이 공개될 예정이야. 그거 하나만 선물해줘.”

“그거 말도 안 되게 비싸잖아.”

“그 정도는 해줘야지! 친구 사이에.”

“야! 너 그냥 돌아가서 안 하겠다고 해. 나 혼자 할 테니까.”

“싫다고, 싫어, 싫어.”

귀를 막으며 내려가는 율이었다. 밀레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작게, 정말 작게 말했다.

“……고마워.”

모퉁이로 사라졌던 율이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뭐라고?”

“아니야.”

“고맙다는 말 잘 들었어. 그래도 신작 선물은 받을 거야. 그래야 수지가 맞으니까.”

율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면서 얼른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밀레나는 양손으로 볼을 지그시 눌렀다. 표정을 다잡고 자세도 바르게 했다.

“이제야 밀레나 엔첸세답네. 얼른 와. 꼬마가 기다리고 있어.”

“갈게.”

계단을 내려가 3층에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율이 조용히 물었다.

“정말 혹시나 해서 그런 건데, 쟤를 좋아하는 거야?”

율이 손가락을 들었다. 복도 끝에 가하란이 보였다. 밀레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좋아해.”

“뭐?”

“강아지 정도로.”

“아하.”

“귀여운 동생이야. 실력 좋은 체스 선생이기도 하고.”

가하란이 손을 흔든다.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긋 웃고 있었다.

“귀엽긴 하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호위를 맡게 됐으니 알아둘 필요가 있겠지? 쟤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해?”

“글쎄. 일단 싫어하는 건 잘 모르겠고, 좋아하는 건 하나 알아.”

“그게 뭔데?”

“거병.”

“남자애 중에 거병 싫어하는 애도 있어?”

“자세한 건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 근데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애한테 말을 거는데 각오까지야.”

밀레나는 풋, 하고 작게 웃은 다음에 말했다.

“뭐든 겪어봐야 아는 거지.”

“뭐야. 그 의미심장한 웃음은.”

“친해져 봐. 그러면 알게 될 거야. 질문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

뚱한 표정을 짓는 율을 뒤로 한 채 가하란에게 다가갔다.

“다 오셨나요?”

가하란에게 말을 붙이려 할 때였다. 문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안경테가 눈에 들어왔다.

“더 올 사람 없죠?”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군부 내에 있으면서도 견장이나 계급 표시가 없었다.

잡무를 맡은 시민인가?

“제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여기 계신 세 분은 기록보관서를 처음 방문하신 것 같네요. 맞나요?”

“네! 처음 와봐요.”

가하란이 대답했다.

“대답 고마워요.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해 드릴게요.”

안경 쓴 여자가 기록보관서 문을 열었다. 어두침침한 내부가 드러났다. 무수히 많은 캐비닛 사이로 일직선으로 그어진 푸른 선이 보였다.

“가장 중요한 걸 알려 드릴게요. 저 선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나가면 어떻게 되나요?”

가하란의 물음에 여자는 친절한 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죽을 때까지 미아가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절대 벗어나지 마세요. 알겠죠?”

안경알 너머에 있는 눈동자가 앞에 선 세 사람을 훑었다. 밀레나는 살짝 긴장하며 여자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전 기록보관서의 접수원이자, 안내를 맡은 셀베이아입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특무대령님 앞까지 안전하게 모실 테니, 부디 제 말을 잘 따라주세요.”

접수원이 몸을 돌렸다.

“다시 한번 말할게요. 절대로 선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그리고 저보다 앞서 나가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기다리세요.”

놀라지 말고 기다려라?

밀레나는 보관서 안쪽을 살폈다. 방 끝에서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특무대령이 보였다. 그리 멀지도 않았다. 마음먹고 뛰면 5초도 안 돼서 닿을 거리였다.

캐비닛만 잔뜩 놓인 이 방이 그렇게도 위험한 걸까?

“갈게요. 제 뒤에 붙어서 따라와 주세요.”

접수원이 안으로 들어갔다. 율이 가하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누나랑 같이 가자.”

가하란을 밀며 안으로 들어가는 율이었다.

밀레나는 괜히 주변을 살핀 다음, 보관서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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