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즐겨 마시는 차가 있다면 말해주게.”
취향을 고백할 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았다. 율도 비슷한 심정인지 어설픈 미소를 지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호박꽃벌의 꿀로 만든 차도 있나요?”
밀레나는 슬그머니 오른쪽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가하란이 한껏 기대한 눈초리로 디온 사령관을 보고 있었다.
아이고야, 다시금 배가 아려온다. 얌전히 있으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령관이 대답했다.
“호박꽃벌의 꿀. 그거 맛있지.”
“할아버지도 그 꿀을 좋아하시나요?”
세상에, 할아버지라니. 친근함과 불손함 사이를 오가는 호칭에 밀레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이의 말버릇을 문제 삼을 정도로 속 좁은 사령관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밀레나는 가하란을 톡 친 다음 잔뜩 찡그린 미소를 보여줬다. 부디 얌전히 있어 달라는 의미를 가득 담아서.
“좋아는 하지만 자주 마시지는 못한단다. 양봉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숲에서 직접 찾아야 하는 건가요?”
“그렇지. 근데 실력 좋은 채집꾼도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꼭꼭 숨겨져 있다는구나.”
다행히 대화가 부드럽게 진행됐다. 밀레나는 약간 안심하며 율을 보았다.
율은 바짝 얼은 채 정면만 보고 있었다. 누가 살짝 건드리면 쨍그랑하고 깨져버릴 것 같다.
“벌꿀은 없지만 대신 이걸 주마.”
사령관이 가져온 건 말린 과일이었다.
“자네들도 한 잔씩 타줄 테니 맛봐보게. 마음에 들걸세.”
“감사합니다!”
허리를 곧게 펴며 대답했다. 얌전히 앉아있던 가하란이 사령관 곁으로 다가갔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말려야겠다는 생각도 못 했다.
“할아버지. 제가 할게요.”
“물이 뜨거울 텐데. 괜찮겠냐?”
“네.”
“그럼 한번 해봐라.”
흐뭇하게 웃는 디온 사령관이었다.
집무실이 두 공간으로 나뉜 느낌이었다. 저 건너편은 조손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보기 좋고, 이쪽은….
“이럴 줄 알았으면 얌전히 강의실에 있는 거였는데.”
율이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어.”
“다른 분도 아니고 디온 사령관님이라고. 잘못 보이면 거병 기사고 뭐고 없어. 아직은 생도 신분이라 괜찮겠지만 나중에 군부로 옮기면….”
“자꾸 그러지 마. 나까지 불안해지잖아.”
“소문 들어서 너도 잘 알잖아. 워낙 깐깐하신 분이라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걸.”
율이 입술을 붙였다. 사령관과 가하란이 찻잔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뜨거울 테니 조심들 하게.”
사령관이 맞은편에 앉았다.
“이거 맛있어요. 누나도 빨리 마셔봐.”
방긋 웃으며 보채는 가하란이었다. 밀레나는 율과 시선을 주고 받은 후 찻잔을 들었다. 향을 느낄 새도 없이 일단 마셨다.
“그러다 입 안이 다 헐겠군. 천천히 마시게.”
사령관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나갔다.
“죄송할 것까지야.”
디온은 느긋하게 차향을 즐긴 후 입을 열었다.
“대령님께서 권리를 사용한 게 70년 전이라고 들었는데, 내 세대 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디온이 가하란을 바라봤다.
“앞으로 넌 군부는 물론 둔 내부 시설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될 거다. 물론 가선 안 될 곳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갈 수 있으니 상관없겠지.”
“제철소랑 연구실도 매일 갈 수 있다고 했어요. 정말 가도 되나요?”
가하란이 기대에 찬 눈으로 말했다.
“방문 전에 얘기만 해놓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지. 급한 일이 있다면 얘기하지 않고도 갈 수 있고. 대령님께서 권리를 행사했으니 그정도는 쉽지.”
사령관이 밀레나와 율을 번갈아 보았다.
“자네들은 특무대령의 권리라는 걸 들어보았나?”
“처음 듣습니다.”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네. 특무대령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사람을 지목해 통행의 자유를 부여할 수 있지. 보안등급으로 따지면 1급에 준하고.”
보안등급 1급이란 말에 헛바람을 삼켰다. 어지간한 기밀을 다 들춰볼 수 있는 등급이 1급이었다.
1등 귀족조차 1급 보안등급을 얻어내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밀레나는 근심과 걱정을 담아 가하란을 보았다.
“좋은 건가요?”
보안등급 1급이란 말이 생소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하란이었다. 사령관이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나쁠 건 없지.”
디온이 수석부관을 불렀다. 문을 열고 들어온 부관에게 사령관이 눈짓했다.
“이 아이를 기록보관서로 데려가게.”
“접수원에게 인도하고 오겠습니다.”
“그러면 되겠군.”
디온이 가하란을 바라봤다.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이 두 사람도 보내주마.”
“네, 할아버지.”
의자에서 일어나 부관에게 걸어가던 가하란을 사령관이 불러세웠다.
“가져가서 먹어라. 손녀가 참 좋아하는 건데, 네 입에도 맞을 거다.”
사령관 손을 통해 전해진 건 작은 초콜릿 같았다. 어렴풋이 봐서 다른 음식일 수도 있지만.
가하란이 부관과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방 안 온도가 갑자기 내려간 기분이 들었다.
밀레나는 겨드랑이를 바짝 붙이고 발가락에 힘을 준 다음,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사령관을 보았다.
“그 아이가 자네를 누나라고 부르더군. 친분이 있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밀레나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대령님께서 인간 아이에게 관심을 보였어. 정말 이례적인 일이지. 이유가 짐작이 가는가?”
“죄송합니다. 저희도 아는 사실이 없습니다.”
사령관실까지 오게 된 경위를 짧게 설명했다. 디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즉흥적인 분이라 그냥 데려온 거였군.”
말 그대로 별안간 벌어진 일이라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밀레나는 눈치를 살피며 식은 차를 마셨다.
“생각이 깊으신 분이니 다른 이유가 있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두 사람 의견은 어떤가?”
“차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령관이 소파에 기대며 끄덕였다.
“자네들은 군부 소속이 아니니 내게 강제할 권한이 없네. 뭐, 생도를 졸업하고 나면 보게 될 수도 있겠지만.”
눈앞의 디온 사령관이 미래의 상급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생도 신분을 벗어나면 군부에 몸담을 예정이니까.
“정확히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이번 질문은 율이 했다.
“대령님께서 말씀하셨듯 상시 대기하는 일은 아닐세. 말 그대로 짬짬이 시간을 내서 그 아이를 보호하면 되겠지. 물론 보호라고 해도 거창한 일은 아니지. 여기가 격전지도 아니고, 그냥 애를 데리고 다니면서 넘어지지 않게 살피는 정도겠지.”
“그런 거라면….”
율이 고민하는 눈치였다.
밀레나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 업무 강도는 약하다. 그리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 가하란이었다. 거기에 요청자가 특무대령이고.
“만약 하게 된다면 내 개인적인 부탁도 들어줬으면 하네.”
긍정적인 대답을 내뱉기 직전에 디온이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부탁이란 말이 굉장히 거슬렸다.
“어려운 부탁은 아닐세. 그냥 곁에서 지켜보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하면 내게 말해주면 되네. 둔 군부의 책임자로서 사소한 것도 놓칠 수 없으니.”
사령관이 찻잔을 들어 올리다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밀레나와 율을 응시했다.
“근데 자네들 곧 실습이 있지 않던가? 거병 연습기가 가동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예. 그렇습니다.”
“허, 이거 참 귀중한 시간을 빼앗을 뻔했군. 거병 기사를 꿈꾸는 자네들에게 첫 기동 시범은 정말로 중요하지. 자네들도 알겠지만 첫 기동에서 이론을 체화하지 못한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격차가 벌어지니까.”
밀레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첫 기동 시범의 중요성은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으니까.
“자네들처럼 유능한 인재일수록 첫 기동 시범에서 능력을 발휘해야지. 싹이 안 보인다고 위에서 판단한 순간, 거병에 올라탈 수조차 없게 되니까.”
디온 사령관이 안쓰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기동 시범이 정확히 언제인가?”
“내일 체임버에 들어가고, 모레 기동 시범입니다.”
“자네들한테 정말 중요한 시기군. 이럴 때일수록 육체와 정신, 둘 다 집중해서 보살펴야지.”
다시금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옳은 말이었다.
“겪어봐서 알겠지만, 브라인 특무대령님은 예측할 수 없는 분이지. 내일 갑자기 자네들을 호출할 수도 있네.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부르겠다고 하셨지만, 과연 지키실지는 의문이군. 오늘만 봐도 자네들을 데리고 예정도 없이 이곳을 찾아오셨으니.”
사령관이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차 마시는 소리와 옅은 호흡 소리가 방 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대령님을 돕고 싶지만, 사령관님 말씀대로 기동 시범이 신경 쓰입니다.”
율이 말했다. 율은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다른 일에 신경 쓰는 것보다는 당장 내일 있을 탑승식에 집중하는 걸로.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면서 사령관을 슬쩍 볼 때였다. 디온의 입매가 눈에 들어왔다.
사령관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봤던 그 웃음이었다. 편안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웃음. 그야말로 강자의 표본 같은 미소였다.
그런데 지금, 아늑한 미소가 들여다봐선 안 될 문처럼 느껴졌다.
잘못된 대답을 하는 순간 저 문이 비틀리면서 열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끔찍한 것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잘못된 대답이 무엇일까.
맥락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령관님은 우리가 거절하길 바라고 계신다.
“부담 느낄 필요 없네. 자네들한테는 정말 중요한 시기니까. 그 아이를 돌보는 것쯤이야 다른 사람을 통하면….”
거기까지 듣고 나서, 밀레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하겠다고?”
“예. 가하란하고 친분도 있으니 이 일은 제가 맡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상관없지만, 괜찮겠나? 기동 시범 때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괜찮습니다.”
답하고 나서 확신이 들었다. 이건 사령관이 원하던 대답이 아니라는 걸.
디온 사령관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저 웃음마저 두렵게 다가온다.
“저, 저도 하겠습니다.”
율이 대답했다. 밀레나는 눈짓을 주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하지만 율은 대답을 번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뜻이 그렇다면야.”
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3층으로 가보게. 기록보관서에서 대령님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밀레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군례를 올렸다. 사령관이 고갯짓으로 군례를 받아주었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게. 나중에 시간 나면 또 찾아오고. 자네들이 좋아할 만한 차를 준비해 놓을 테니.”
“알겠습니다.”
긴장감이 드러나지 않도록 힘있게 대답한 후 뒤로 돌아섰다. 안도하며 문밖으로 한 발 내밀 때였다.
“밀레나 엔첸세.”
사령관이 이름을 불렀다. 먼저 밖으로 나간 율을 바라본 후, 뒤로 돌아섰다.
창가에 서 있는 사령관이 보였다.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다. 무료한 눈으로 바깥을 살피던 디온이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사령관이 짓던 표정이 자신과 닮았다고 밀레나는 생각했다. 모든 게 따분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
눈이 마주쳤을 때, 사령관은 다시 웃고 있었다. 그게 오히려 무서웠다.
“다음에 볼 땐 좀 더 순종적이었으면 좋겠군. 물론, 내 개인적인 바람일세. 아직은 군부의 사람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허허, 웃으면서 가보라고 손짓하는 사령관이었다.
밀레나는 바르르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부여잡으며 뒤로 돌아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