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07화 (80/558)

제107화

별관 계단을 내려가다가 몸을 틀었다. 1층 출입구로 나가면 늦을 것 같았다.

밀레나는 3층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마주 오는 병사들을 피해 일직선으로 달린 후 채광용 창 앞에 섰다.

별관 지붕을 밟으며 중앙부로 향하는 특무대령이 보였다.

“밀레나!”

뒤따라온 율이 짧게 숨을 토해냈다. 밀레나는 율에게 눈짓을 준 뒤 닫힌 창을 열었다.

“뭐하게?”

“휴식 시간이잖아. 잠깐만 다녀오게.”

창틀에 발을 올렸다. 심호흡을 잠깐 한 후, 그대로 발을 굴렀다.

건물 앞 나무까지 뛴 다음 굵은 나뭇가지를 밟았다. 우직, 소리가 살짝 거슬리긴 했지만 부러지진 않았다.

시야를 옮겨 발 디딜 만한 곳을 찾았다. 맞은편에 담이 보였다. 지체하지 않고 다시 뛰었다.

신체술이 발현된 육체는 상상한 것을 그대로 실현해줬다.

안전하게 착지를 마친 밀레나는 군복에 달라붙은 나뭇잎 하나를 떼어냈다.

“멀쩡한 정문을 내버려 두고 왜… 야! 말 좀 들어라!”

율이 씩씩거리며 계속 따라왔다.

“어디 가는 건데?”

“아까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간 애 있잖아.”

“특무대령님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애? 걔가 왜?”

“내가 아는 애야.”

“아는 애? 누구?”

“그때 한번 말해줬잖아. 체스로 날 이긴 애.”

율이 아하, 하면서 옆에 섰다.

중앙부로 향하는 길. 계급이 높은 군관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중앙부 앞을 달리는 게 군법 위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 편히 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찬 때 봤던 분들이 여기 다 계시네.”

율이 작게 속삭였다.

중앙부로 이어지는 긴 계단을 밟으며 나아갈 때였다. 계단 위에서 해맑게 손을 흔드는 아이가 보였다.

“잘못 본 게 아니었어.”

가하란이었다. 옆에는 브라인 특무대령이 붙어 있었다. 주변을 지나치는 군관들이 특무대령을 향해 연이어 군례를 올리고 있었다.

“누나.”

계단을 몇 칸 내려온 가하란이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밀레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너 여기 어떻게 온 거야.”

“브라인 님하고 같이 왔어.”

“그건 봐서 아는데, 왜 온 건지….”

가하란의 어깨 너머를 슬쩍 보았다. 브라인 특무대령이 수염을 매만지며 다가오고 있었다.

옆구리를 푹 찌르는 손가락에 고개를 틀었다. 율이 브라인을 가리키며 턱짓했다.

“네가 경례 올려.”

브라인이 코앞에 왔을 때 뒷짐을 지며 군례를 올렸다. 스콜라 생도가 둔 군부 소속은 아니나, 일정 계급 이상에게는 예의를 갖춰야 했다.

특무대령이면 말할 것도 없고.

“안녕하십니까, 브라인 특무대령님!”

“이번에 거병 기사 견습으로 왔다는 스콜라 생도들이네.”

브라인이 밀레나를 바라봤다.

“밀레나 엔첸세입니다.”

이어서 율이 대답했다.

“율 카르벤입니다.”

브라인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내면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붉은 눈동자에 밀레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엔첸세. 내가 아는 엔첸세는 아주 많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필렌인데.”

“제 어머니이십니다.”

“아하. 네가 그 필렌의 딸이구나. 닮은 구석이 얼핏 보이는 것 같네.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어?”

“최근 연락을 받지 못했으나 아마 잘 지내고 계실 겁니다!”

“맞아. 잘 지내고 있겠지. 아무것도 없는 오지에 혼자 버려져도 떵떵거리며 잘 살 아이니까.”

브라인이 가하란을 내려다보았다.

“꼬마야. 이 아이한테 인사하려던 거 맞아?”

“네, 맞아요.”

“둘이 친하니?”

“친구예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슬쩍 밀레나를 보는 가하란이었다. 밀레나는 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라. 그럼 그쪽은?”

특무대령의 지목을 받은 율이 크게 대답했다.

“전 밀레나와 동기입니다! …친구기도 하고요.”

“그렇단 말이지. 그럼 잘됐네. 두 사람도 따라와.”

브라인이 크게 하품하면서 돌아섰다. 잠깐만, 따라오라니?

“멍하게 있지 말고 얼른 와. 나 진짜 졸려. 이러다가 길바닥에 쓰러질지도 몰라.”

특무대령의 명령이라면 일단 따르고 봐야 했다. 가하란과 나란히 서서 중앙부 입구로 향했다.

“가하란, 어떻게 된 거야?”

“브라인 님 밑에서 일하게 됐어.”

“일? 무슨 일?”

“일단 기본은 털을 빗겨주는 거. 그다음에는 잔심부름하면 된다고 했어.”

털 빗기? 잔심부름? 듣고 나서도 당혹감만 늘어날 뿐이었다.

중앙부 경비대가 옆으로 비켜섰다. 검문대 역시 그냥 통과해 버리는 특무대령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뒤따라가던 밀레나는 검문대 앞에서 붙들렸다. 그러자 특무대령이 한마디 했다.

“내가 데려온 애들이야. 검사는 필요 없어.”

사나운 인상의 검문관이 고개를 끄덕인 뒤 들어가라는 눈짓을 주었다.

중앙부 지하실에서 폭발 사건이 일어난 직후라 장성급 군관을 제외하고는 전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특무대령의 권한은 장성급을 웃도는 모양이었다. 하긴, 나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살아온 분에게 인간의 규칙을 들이밀 수는 없지.

“가하란이라고 했지?”

율에 가하란에게 말을 걸었다.

“네. 맞아요.”

“귀엽게 생겼네. 근데 말이야, 네가 정말 밀레나한테 체스를 이겼어?”

“몇 번 이긴 거예요. 누나가 훨씬 잘 둬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승패만 놓고 본다면 아직은 밀레나가 앞섰다. 하지만 최근 전적은 절망적이었다.

4연패 중이었지?

예상하건대 앞으로는 한 게임도 못 따낼 것이다. 가하란의 수를 읽어내는 실력은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었으니까.

율이 재차 질문했다.

“근데 특무대령님하고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예전부터 친했어?”

“아니요. 오늘 알게 됐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죄송해요. 이건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뭔데? 굉장히 궁금한데.”

율이 손가락으로 가하란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가하란이 걸으면서 목을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본 율이 방긋 웃었다.

“밀레나, 얘 되게 귀엽다. 내 동생 삼을까?”

“헛소리 그만하고 앞이나 봐. 2층부터는 장성급들도 많이 돌아다닐 테니까.”

“별들에게 찍힐 수는 없지.”

율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중앙 계단을 계속 밟으며 올라갔다. 2층을 지나 3층에 도착했다.

“기록보관서는 3층에 있다고 했지?”

율이 물었다.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무대령의 집무실이나 다름없는 기록보관서. 들어가 본 적은 없고 전에 중앙부에 왔을 때 명패만 보고 지나갔다.

브라인이 복도 쪽으론 시선도 안 주고 다시 계단에 발을 올렸다. 율이 층계참에 오르며 작게 말했다.

“뭐야. 왜 3층을 지나쳐?”

“그러게.”

그때 가운데 서 있던 가하란이 말했다.

“사령관님 만나러 간다고 했어요.”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다. 밀레나는 잠시 멈춰 서서 가하란을 보았다.

“누구?”

“사령관.”

“디온 사령관님을 말하는 거야?”

“이름은 모르겠고, 아무튼 사령관이라고 했어.”

세상에. 밀레나는 율을 바라보았다. 율이 굳은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나 급한 일이 생긴 거 같아. 먼저 돌아갈게.”

“대령님 명령을 무시하시겠다?”

“아니, 그건 아니고.”

사령관이란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둔 군부의 정점.

디온 사령관.

다른 곳도 아니고 둔 군부의 최고사령관 위치를 십 년 넘게 유지해 왔다는 것에서 설명이 필요 없는 권력가였다.

정치계에서 매번 이름이 거론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둔 사령관이 황가와 의회, 어느 쪽에 힘을 실어주느냐에 따라 판도가 바뀔 거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나왔고.

“오찬 때 그분하고 눈만 마주쳤는데 배가 아프더라. 나하고는 진짜 안 맞아.”

율이 울상을 지었다. 밀레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거기서 노닥거리지 말고 얼른 와.”

위에서 브라인이 말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순진무구한 얼굴로 왜 그러냐고 묻는 가하란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설명한 뒤 걸음을 뗐다.

온갖 상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사령관실 앞이었다.

“특무대령님. 어쩐 일이십니까?”

수석부관이 브라인 앞에 섰다.

“디온 만나러 왔어. 안에 있지?”

“예, 계십니다.”

냉정하기로 소문난 수석부관조차 살짝 당황해하며 사령실 문을 열었다.

“사령관님, 브라인 특무대령께서 오셨습니다.”

브라인이 앞장서며 들어갔다. 밀레나는 주저하다가 겨우 몸을 움직였다.

사령관실 안은 단출했다. 은은한 차향이 도는 방. 오찬 때 봤던 것과 달리 인자한 얼굴을 한 디온이 특무대령을 맞이했다.

“내년에는 좋은 일이 생기려나 봅니다. 대령님께서 이곳을 찾아주시고.”

“여기 올 일이 별로 없으니까. 올라오는 것도 귀찮고. 그리고 디온은 알아서 잘하는 아이니까 내가 신경 쓸 것도 없지.”

“전 항상 브라인 님의 조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언제든 찾아오시죠.”

“막상 오면 불편할걸?”

디온이 자리를 권했다. 너털너털 움직여 의자에 앉는 브라인이었다.

“뒤에 있는 저 친구들은….”

“오늘 여기에 온 목적. 가하란, 이쪽으로 와.”

밀레나는 재빨리 가하란의 등을 밀었다. 앞으로 살짝 밀려난 가하란이 종종걸음으로 사령관 앞에 섰다.

“얘 이름은 가하란. 알고 있어?”

“예, 알고 있습니다.”

밀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령관이 어떻게 가하란을 알고 있지?

잊고 있던 첼 총집사와의 관계가 다시금 떠올랐다. 가하란, 그리고 올란트는 보통 귀족이 아닌 걸까?

“오랜만에 내게 부여된 권리를 쓰고 싶은데. 혹시 기억해?”

“권리라면… 지정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디온이 가하란을 보며 말했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 있지만, 안에 담긴 눈빛은 날카로웠다.

“기억하네. 이 애한테 특무대령의 지정권한을 사용할 거야. 혹시 문제 될 게 있나?”

“없습니다. 대령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권리니까요. 단지, 이 아이는 너무 어리군요.”

“그래서 뒤에 저 아이들을 데려왔어. 스콜라 생도들인데, 알고 있어?”

디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오찬 때 봤습니다. 밀레나, 율 생도. 맞나?”

맞습니다, 밀레나와 율이 동시에 대답했다.

“나도 따로 사람을 붙여서 가하란을 보호하긴 할 건데, 인원이 부족할 수도 있잖아. 그래서 저 둘을 따로 차출하고 싶은데. 물론 교육 목적으로 둔을 방문한 친구들이니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건 제가 명령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군요. 자네들, 이 얘기를 사전에 들었나? 허락한 거고?”

밀레나는 뒷짐을 지며 대답했다.

“지금 막 들었습니다.”

“그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군. 대령님, 저 친구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

“만사가 귀찮은데.”

“하하, 주무실 시간이군요. 그러면 한숨 주무시고 나서 얘기를 남김없이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 디온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브라인이 먼저 내려가 있겠다며 사령관실을 빠져나갔다. 밀레나는 멀거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사령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자네들도 당혹스럽겠군. 워낙 제멋대로인 분이시라 이런 일이 종종 있네.”

디온이 미소를 머금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일단 앉게. 마침 차 마실 시간이니.”

괜찮습니다, 라는 말은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배탈이 날 것처럼 아려오는 배에 힘을 꽉 주고 소파로 걸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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