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커피와 차, 어떤 걸로 드시겠습니까?”
덴스의 물음에 브라인이 손을 내저었다.
“마시고 갈 정도로 오래 있을 건 아니라서. 올란트에게 허락만 받고 바로 갈 거야. 허락한다면 사령관도 만나러 가야 하니까.”
사령관? 가하란이 의문을 담아 브라인을 바라봤다. 브라인은 기다리면 알게 될 거야, 라고 말한 후 올란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설명은 이 정도면 된 것 같으니 이제 허락해 줬으면 하는데.”
가하란은 아빠를 바라봤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쉽게 허락할 일은 아니었다. 고민이 길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아빠의 입은 금방 열렸다.
“그렇게 하시죠.”
가하란은 반색하며 되물었다.
“아빠. 정말 가도 되는 거예요?”
“네가 결정한 일이니까 아빠는 막을 생각 없어. 아니면 말려주길 바라는 거야?”
“아니요. 전 하고 싶어요.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거든요.”
올라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브라인을 응시했다.
“아들의 안전은 보장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군부 내에서 심부름하는 걸테니 위험하지도 않겠지만.”
“사람을 붙여서 위험하지 않게 관리할 테니 안심해. 밑으로 들인 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이름에 흠집이 나는 거니까.”
“특무대령님께서 확답해 주셨으니 믿고 맡기겠습니다.”
“털털하네. 인간족의 문화로 봤을 때 일곱 살은 아직 보호해야 할 단계일 텐데. 쉽게 허락했어.”
“가하란은 말과 행동의 무게를 아니까요. 전 제 아들을 믿습니다.”
“끈끈한 부자지간이네. 보기 좋아. 유산 문제로 다투는 것보다야 화목한 게 좋지.”
브라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세한 건 네 아들을 통해서 전달할게. 사령관을 만나서 말해야 할 것도 있고, 얘를 인사시켜야 하는 곳도 있으니까.”
“지금 바로 가실 겁니까?”
“난 기다리는 거 싫어. 그리고 덴스.”
브라인이 검은 의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번에도 완벽해. 날이 갈수록 마음에 들어.”
“사용하시다가 불편하거나 개선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찾아와 주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할게. 아, 다음에 올 때는 선물 하나 들고 올게. 받기만 하면 미안하잖아?”
가자, 꼬마야. 브라인이 가하란의 머리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특무대령님. 아들과 잠깐만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가족 간의 대화를 막을 수야 없지. 그래도 짧게 해줘. 나 슬슬 졸리거든.”
하품을 크게 하며 밖으로 나가는 브라인이었다.
“어쩌다 보니 제철소가 아니라 군부에서 일하게 됐구나.”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되세요?”
“조금. 아예 안 된다면 그것도 거짓말이겠지.”
“조심할게요. 다치지 않고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바로 말해야 한다. 특무대령님께서 어지간한 건 다 해결해 주시겠지만.”
올란트가 자세를 낮췄다. 아빠의 탁한 하늘색 눈동자가 일직선상에 놓였다.
“심부름이라고는 하지만 정식으로 고용된 거야. 일곱 살이 되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 너한테도 찾아온 거고. 직업은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될 수도 있고, 너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어.”
가하란은 아빠의 말을 새겨들으며 천천히 턱을 당겼다.
“이 일이 너한테 좋은 경험이 됐으면 좋겠다.”
“많은 걸 배울게요. 물론 아빠한테도 배울 거예요. 전 여전히….”
가하란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구실 밖에 누워 있는 거병을 보며 말을 이었다.
“기술자가 꿈이니까요.”
“그래. 아빠도 네 궁금증을 다 풀어줄 수 있도록 노력할게. 많을 걸 보고 느끼고 배우렴.”
내 아들이라면 다 할 수 있어, 올란트가 가하란을 가볍게 안으며 말했다.
“그리고 고용됐으면 똑 부러지게 네 몫을 챙겨야 한다. 말 안 해도 알지?”
“그럼요.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아라. 그게 한 사람의 몫을 증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잊지 않고 있어요.”
가하란의 볼을 가볍게 당기며 웃는 올란트였다.
“가 봐.”
“다녀오겠습니다.”
뒤로 돌아서는데 유단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들어 인사했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유단은 눈을 흘기며 몸을 틀었다.
못 본 건가. 다가가서 말을 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유단이 휴게실로 들어간 것이다.
“꼬마야!”
“지금 갈게요.”
덴스와 아빠를 다시금 바라본 뒤 연구실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다 끝났지?”
“네. 근데 이제 어디로 가요?”
“사령관 보러 가야 해.”
“또 뛰어서 가는 거예요?”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다시 한번 하늘을 날아보고 싶었다.
“원한다면야.”
브라인이 가하란을 번쩍 들었다. 옆구리에 밀착한 채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번엔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볼 것이다.
하늘도 완전히 개었다. 아까처럼 높이 뛰어오르면 둔 성벽 너머까지 보이리라.
“준비됐지?”
“네!”
“목소리 시원해서 좋네. 그러면 간다.”
브라인이 발을 굴렀다.
* * *
“이론 수업도 이걸로 어느 정도 마무리됐고, 드디어 내일 거병 체임버에 들어가 보겠네.”
율이 몸을 비틀며 말했다. 밀레나는 쥐고 있던 펜을 놓으며 창밖을 보았다.
신나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푸른 하늘이 내비치고 있었다.
“율. 바람 좀 쐬고 올까?”
“좋지.”
임시 강의실로 쓰이는 회의실에서 나왔다. 다른 동기들도 찌뿌드드한 몸을 풀러 바깥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밀레나는 눈을 살짝 치켜떴다. 율의 팔이 정수리에 올랐다.
“이러고 걸으면 너무 편해. 밀레나, 너 키 크면 안 된다. 지금이 제일 좋아.”
“맞기 싫으면 얼른 내리지?”
협박조로 말해도 별 소용은 없었다. 한숨을 작게 내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신흥 귀족과 시민 쪽 애들은 우측 난간에, 본토 귀족 동기들은 좌측 난간에 모여 있었다.
보안 단계가 1단계로 낮아지고 둔이 정상화되면서 수업도 재개됐다.
골이 파일 대로 파여서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대던 동기들도, 고된 수업이 연이어 이어지자 암묵적 휴전에 돌입했다.
밀레나는 왼쪽을 바라봤다. 미엔과 로운이 손을 들며 아는체했다.
이번엔 반대쪽을 보았다. 브리테와 눈이 마주치자 희미한 미소로 인사해왔다.
밀레나는 양측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중앙 난간으로 걸어갔다. 율이 따라오며 말했다.
“양쪽에서 구애의 시선을 받는 기분은 어때?”
“이젠 감흥이랄 것도 없어. 쟤네들은 대체 언제 철이 들까?”
“철이 들어서 이런 거잖아. 뭣 모르는 애로 남아 있었다면, 이렇게 대치할 이유도 없고. 알면서 왜 그럴까?”
밀레나는 방긋방긋 웃는 율을 올려다봤다.
“그래, 알면서 말해봤다. 근데 넌 왜 여기에 있어. 본토 쪽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아?”
“난 네 옆이 좋아. 물론 내 동기들도 좋지만, 내 연애 상담을 해준 친구 곁이 편하지.”
“그런 거 해준 적 없는데.”
밀레나는 픽 웃으면서 대답했다.
“율.”
“왜?”
“사랑의 힘이 대체 뭘까?”
밀레나는 특수감찰단 단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대한 수단. 그게 사랑의 힘이라니.
수다를 사랑하는 율이 아무 말도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율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의 종말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밀레나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내리며 앞을 보았다.
“됐어. 아무 말도 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말라니.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 버렸는데. 사랑의 힘이라니? 네 입에서 그런 말이 왜 나와? 설마! 쿠엔과 내가 사귀는 걸 보면서 드디어 관심을 두게 된 거야? 연정을 품게 된 거야? 상대는? 누구? 내가 아는 사람?”
딱따구리처럼 입술이 툭 튀어나온 율이었다. 밀레나는 친구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때렸다.
말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으니 율이 조용히 얘기했다.
“나한테 말해서 문제 될 것 같으면 하지 마. 친구로서 아쉽기는 하지만, 건드려선 안 될 영역이 있는 거니까.”
“그런 거창한 거 아니야.”
“그러면 얘기해 줘! 누구야? 설마 브리테?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귀족이 아니라….”
멋대로 상상하기 전에 그냥 말해줘야 할 것 같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살짝 드러낸 다음 간략하게 설명했다.
“엄마처럼 정치계에서 중립을 유지하면 그에 걸맞은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게 힘들잖아. 그래서 처신을 어찌해야 할지 물어봤어. 실버 룻에 참여하기 전에 정하고 싶었거든. 근데 대답이 사랑의 힘이었어.”
“뭐야. 그런 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이상한 단장님 입에서 나온 거잖아.”
이상한 단장님. 밀레나는 소리 죽여 웃었다.
“신흥 쪽에서 그 단장님을 선망하던 애들도 꽤 있었잖아? 그런데 저번 면담 이후로 입장을 싹 바꿨어. 그 사람하고 다시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지.”
율은 그때만 생각하면 기운이 빠진다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긴, 모듈 탈취 건 때문에 면담한다고 했으면서 자기 얘기만 몇십 분 늘어놓았으니 애들이 질릴 수밖에.
율이 난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꼭 너희 어머니처럼 될 필요가 있나? 힘들면 적당히 타협해도 되잖아. 본토든, 신흥이든. 아니면 시민이든. 편한 곳으로 가서 지내.”
“말이야 쉽지. 그렇게 하면 본토 어른들이 날 붙잡아다가 훈계를 할 거야.”
“그 정도는 참아야지. 정 힘들면 그땐 나도 옆에서 같이 들어줄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눈물 나게 고마운 말이네.”
“물론 도중에 도망칠 거지만.”
킥킥 웃으면서 말하던 율이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밀레나.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무슨 소리?”
“비명 같았는데.”
“군부 중심지에서 누가 비명을….”
그때였다. 율의 말대로 어렴풋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비명 같지는 않았다. 무서워서 지른다기엔 뭔가 들떠 보이는데….
잠깐 동안 신체술을 사용했다.
감각이 확장되며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해진다.
“여자애? 아니, 남자애 목소리 같은데. 그것도 어린….”
동기들도 소리를 감지했는지 다들 서쪽을 바라보았다. 관리국과 연구단지가 있는 곳이다.
그 순간, 시야에 무엇인가가 잡혔다. 새는 아니었다. 새가 위아래로 요동치며 날 리는 없으니까.
작게 보이던 물체가 순식간에 별관 옥상과 가까워졌다.
밀레나는 이마에 손을 대며 고개를 들었다. 강렬한 햇살을 뚫고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다.
“와아아아!”
유쾌한 소리가 머리를 위를 가로질렀다.
“…가하란?”
똑똑히 보았다. 길쭉한 귀를 펄럭이며 하늘을 가로지른 토끼 인간과 그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작은 아이를.
“누나! 안녕!”
저만치 멀어진 가하란 입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거리가 꽤 되는데도 귀에 쏙 박힌다.
“저 복장에 바라라족이면 군부에 계신 특무대령님 같은데. 대낮에 애를 납치했을 리는… 없겠지?”
“율, 잠깐만!”
“어디가!”
밀레나는 저 멀리 뛰어가는 토끼 인간을 바라보며 열심히 발을 놀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