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검은 손가락 끝에 걸린 컵이 위태롭게 움직였다.
“타인의 영혼 자료에 접근하는 순간 용량 초과로 머리가 터져버릴 거야. 운이 정말로 좋으면 미치는 거고, 보통은 죽겠지.”
브라인이 컵을 내려놓았다.
가하란은 빗질하던 손을 잠시 멈췄다. 엄마와 만나는 건 불가능한 걸까.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브라인이 물었다.
“엄마요.”
“아까 엄마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하지 않았어?”
“묘비를 찾아간 거예요.”
“그래? 뿌리로 돌아간 거구나.”
브라인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마주한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엄마가 그리운 거니?”
“음, 잘 모르겠어요. 그립다는 표현은 좀 안 맞는 거 같아요. 전 엄마 얼굴을 제대로 본 적도 없거든요. 사진으로만 봤을 뿐이고.”
가하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한 번은 만나 보고 싶어요. 꿈에서 종종 자장가 소리를 들었거든요. 그게 엄마의 목소린지도 궁금하고.”
가하란은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빠져야 할 털은 다 빠졌는지, 빗살이 훑고 가도 바닥에 떨어지는 털은 적었다.
“이럴 때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하는지 난 잘 모르겠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봐. 인간의 문화는 매번 바뀌어서 이럴 때 웃어야 하는지, 아니면 같이 울어야 하는지 헷갈려.”
브라인이 일어나서 몸을 돌렸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제스처가 있지. 천 년 전에도 지금도.”
브라인이 천천히 다가와 가하란을 안아주었다. 가하란은 얼굴을 간지럽히는 털의 감촉에 잠시 웃다가, 이내 코를 훌쩍거렸다.
괜찮은 척 말했던 것과 달리 속은 서글펐다. 아빠가 곁에 없을 때는 몇 번이고 엄마를 찾았다. 어떨 때는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고 떠난 엄마가 밉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티 낸 적은 없었다. 특히나 아빠 앞에선 엄마 얘기가 나올 땐 반사적으로 웃었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품고 있는 슬픔의 크기가 나와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걸. 그 앞에서 투정을 부릴 수 없었다.
눈물이 찔끔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낸 다음 품에서 빠져나왔다. 몸을 감싼 온기가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가하란은 찡한 코끝을 괜스레 문지르며 말했다.
“천 년 전에도 안아주는 건 친근함의 표시였나 봐요.”
“친밀함을 표현하는 가장 오래된 수단이지. 일단 양손에 널 해칠 무기가 없다는 걸 보여주면서 서로에게 접근하는 거잖아. 물론 심리적 사각을 이용해 살해 수단으로도 자주 애용됐지만.”
곁에 듣고 있던 엔엔이 끼어들었다.
“어린 인간한테는 부적절한 얘기 같아요.”
“액면가가 무슨 소용이야. 얘는 내가 보기에 어린애가 아니야. 그릇이 크거든. 수용 못 할 아이한테 나도 이런 농담 안 해.”
브라인이 검은 의수로 귀와 머리 쪽을 매만졌다.
“잘 빗었네. 소질이 있어.”
가하란은 부드럽게 움직이는 검은 의수를 바라봤다. 바라라족을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의수. 실제로 사용하는 걸 보니 놀라울 뿐이었다.
“너, 이런 거에 관심이 많구나?”
“네. 그래서 공부 중이에요.”
“공부라.”
브라인이 가하란와 빗을 번갈아 바라봤다.
“엔엔이 따로 초대했을 리는 없고, 견학차 연구단지에 들어온 거겠지?”
“맞아요. 아빠를 따라서 왔어요.”
“아빠? 이름이 어떻게 돼?”
“올란트요.”
브라인의 귀가 좌우로 살랑살랑 움직였다.
“이번에 치프로 올라간 애구나. 기록한 기억이 있어. 인간들의 재능은 대물림된다더니, 둘 다 머리가 좋네.”
브라인이 한 걸음 다가왔다.
“꼬마야. 내 옆에서 심부름할래?”
“심부름이요?”
“기본은 빗질해주기. 난 네 손길이 마음에 들었어. 그 외에는 정말 자잘한 심부름을 맡길 거야. 자료 정리, 혹은 배달. 내가 일이 있어서 틀어박힐 때는 밖으로 잘 안 나가거든.”
엔엔이 슬쩍 한마디 했다.
“그게 아니라 산페르 님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 거겠죠.”
“그것도 어느 정도 있어. 근데 엔엔. 너 안 바빠?”
브라인이 손을 휘휘 저었다. 엔엔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제 공방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네. 아무튼 꼬마야, 아니, 가하란. 내 옆에서 잔심부름해주면 나도 네가 바라는 걸 들어줄게.”
“제가 바라는 거요?”
“앎에 대한 욕망. 너의 무궁무진한 호기심을 다 해결해줄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는 해소해줄 수 있어. 게다가 내 옆에서 일하면 특권이 하나 생겨.”
브라인이 양손을 대각으로 곧게 뻗었다.
“관리국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게 해줄게. 견학 같은 게 아니라 영구히 지속되는 통행권을 발급해줄 수 있어.”
“그게 정말인가요? 그러면 내일도 올 수 있는 거예요? 매일 거병을 볼 수 있는 거예요?”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신비로운 것들로 가득한 관리국을 매일 찾아올 수 있다니.
“가하란.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해요. 대령님은 정말 귀찮은 존재예요. 잔심부름 정도로 끝나지 않아요. 언젠가는 밥도 먹여달라고 할 거예요.”
엔엔이 아주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거기, 상관없는 늑대 아줌마는 조용히 해.”
“전 늑대가 아닙니다. 토끼 할머니.”
“나도 토끼가 아니고 할머니는 더더욱 아니야.”
엔엔이 코를 씰룩거리며 다가왔다.
“가하란. 특무대령님은 악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선하지도 않지만, 치명적인 해악을 끼칠 분은 아니죠. 하지만 정말 귀찮을 거예요. 정말로. 정말로!”
가하란의 양팔을 붙들며 앞뒤로 흔드는 엔엔이었다. 힘 실린 말투에서 일말의 억울함까지 엿보였다. 엔엔은 과거에 무슨 일을 겪은 걸까?
“전 배우고 싶어요. 궁금한 게 너무 많거든요. 그리고 심부름 같은 거 저 잘해요.”
가하란은 시선을 브라인 쪽으로 던졌다.
“질문 많이 해도 되는 거죠?”
“마음껏 해. 물론 내가 일할 때는 조용히 있어 줬으면 하지만, 인간의 질문 정도야 일하면서도 충분히 대답해 줄 수 있지.”
“좋아요! 브라인 님의 심부름을 제가 할게요.”
“탁월한 선택이야. 네 짧은 인생에서 이보다 좋은 선택은 아마 없었을 거다.”
대화가 끝나자마자 엔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 로안을 영원한 친구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가하란도 친근하게 느껴지고요. 만약 특무대령님이 도를 넘는 부탁을 해온다면 절 찾아와요. 이 도시에서 대령님을 설득할 수 있는 자는 절 포함해서 몇 없으니까요. 아시겠어요?”
“네, 기억해 둘게요.”
“좋아요.”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뒤로 한걸음 물러서는 엔엔이었다.
“브라인 님. 근데 전 하고 싶어도 아빠가 허락 안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아빠한테 물어봐야 해요.”
“인간은 자립하기 전에 부모한테 의지하는 경향이 강하지. 그 문화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니까, 일단 허락을 맡으러 가야겠네.”
브라인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가하란은 의자에서 내려왔다. 지금 보니 바닥에 깔린 털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청소해야겠는데요?”
“여기 정리는 엔엔한테 맡겨. 자기 텃밭이라잖아.”
“그럴 순 없어요.”
가하란은 엔엔을 보며 빗자루를 달라고 말했다. 엔엔이 고개를 저었다.
“여긴 제가 치울 테니까 대령님 따라가세요.”
엔엔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 번 두들겼다. 그러자 작업실 구석에서 한 뼘 크기의 인형들이 걸어 나왔다.
막대기를 이어 붙여서 만든 듯한 인형들이 길고 가느다란 팔을 움직여 주변을 청소했다.
발치로 다가온 인형이 가하란 발에 툭 부딪혔다. 넘어진 인형을 붙잡아 일으켜 세워줬다.
“이것도 마법공학품인가요?”
“아니요. 이건 제 마법이에요. 퍼밀리어와 비슷하죠. 무생물에게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약간 다르지만.”
바지런히 움직이는 인형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엔엔이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심해서 가요. 나중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 오고요. 다음에 올 때는 바깥에 있는 종을 칠 필요 없어요. 전 가하란을 친구로서 맞이할 테니.”
“다음에 올 땐 할아버지의 일지를 가져올게요. 호박꽃벌은 그때 알려주세요.”
“그게 남아 있었죠. 좋아요. 다음에 오면 가르쳐 줄게요.”
가까이 다가온 엔엔이 코끝으로 가하란의 목덜미를 톡톡 건드렸다. 칼랑족의 인사법 같았다.
“얼른 나와.”
브라인이 밖에서 보챘다. 가하란은 엔엔의 눈을 보며 인사했다. 조만간 다시 오겠다고.
작업실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 매섭게 쏟아지던 비가 그새 그쳤다. 먹구름도 서서히 밀려가는 중이었다.
“올란트는 어디에 있지?”
“연구실이요. 덴스 아저씨의 연구실에 있어요. 어디쯤이냐면….”
“설명은 됐어. 거기라면 나도 몇 번 가봤으니까.”
가하란은 검은 의수를 보며 말했다.
“덴스 아저씨가 그 의수를 고쳤어요.”
“맞아. 내가 그 아이한테 부탁했어. 손재주가 좋거든. 내 취향도 잘 맞춰 주고.”
브라인이 옆으로 다가왔다. 빤히 내려다보다가 가하란을 번쩍 들어 올렸다.
헛바람을 내쉬며 균형을 잡았다.
“떨어트리지 않을 거니까 얌전하게 있어. 발버둥 치지만 않으면 아무도 안 다쳐.”
브라인이 가하란을 옆구리에 안으며 말했다.
“네?”
“바람도 약간 불 거야. 숨을 못 쉴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하지는 말고. 내가 다 알아서 조절해 줄게.”
그게 무슨 말이냐며 되묻기도 전이었다. 몸이 붕 떠올랐다. 어, 하는 사이 연구실 지붕 위였다.
“진흙이 발바닥에 묻는 건 싫거든. 급하게 오느라 군화도 안 신었고.”
그렇게 말하며 껑충 뛰어오르는 브라인이었다. 지붕과 지붕 사이를 아주 가볍게 건넜다.
10여 미터는 떨어져 있는데,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말이다.
“으아악!”
첫마디로 튀어나오는 비명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이 위아래로 출렁거리면서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쏴아악, 묵직한 바람 소리가 연신 귀를 때렸다. 가하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정령세계와 달리 온몸으로 느껴지는 압박감에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없었다. 그래도 점차 적응해서 눈을 가냘프게 뜬 채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비에 젖은 연구단지가 발아래 놓였다. 저 멀리 관리국과 시내를 경계 짓는 철조망이 보이고, 그 너머의 군부 건물도 눈에 들어왔다.
“시원해. 비 온 뒤 날씨는 이래서 좋아.”
브라인이 말했다.
하늘에서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가하란은 눈을 크게 떴다. 먹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햇빛이 온 세계를 비췄다.
눈에 들어온 전경은 정령세계에서 본 형형색색의 하늘만큼이나 멋졌다.
“와아아아!”
비명은 어느새 감탄으로 바뀌었다. 얼굴을 때리던 바람의 압력도, 떨어질 것만 같은 불안한 부유감도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쫙 뻗었다.
“신나지?”
“네!”
“근데 몇 번 더하면 토할 수도 있어. 인간은 대부분 그러더라.”
그 말과 동시에 몸이 쑥 아래로 꺼졌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단단히 붙들어 주는 팔이 있으니까.
속이 약간 불편한 것 같지만, 그래도 좋았다.
“토할 거 같으면 말해. 내 털에 뿌리진 말고.”
“네, 네!”
“어. 할 거 같아?”
“조, 조금요.”
브라인이 그건 곤란하지, 하면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새가 된 기분이었다.
두 다리에 바닥에 닿자마자 불편했던 속이 진정됐다. 귀가 먹먹하고 눈이 살짝 어지럽지만 금방 괜찮아지리라.
“여기에 있는 거 맞지?”
브라인이 연구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연구실 문이 열리며 아빠가 걸어 나왔다.
“…방금 네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린 거 같았는데.”
올란트가 가하란을 보며 말했다. 가하란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날아왔거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