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가하란은 간질거리는 코끝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일어나고 싶었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몽롱하기도 하고.
“누워 있어. 안원에 다녀온 모양인데, 괜히 억지로 일어서다가 다칠 수가 있으니까.”
푹신한 게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뭐지, 하며 눈동자를 치켜올렸다. 도톰한 발이었다. 아니, 손인가.
가하란은 무심결에 손을 움직였다. 이마에 닿은 브라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털이 뻣뻣해요.”
복슬복슬한 엔엔의 털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감촉이 재미있어서 넋 놓고 쓰다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을 얼른 치우며 말했다.
“죄송해요.”
그러자 브라인이 웃었다.
“엔엔 말대로 특이한 애네. 안원에 다녀오고도 멀쩡한 데다가, 표리영역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 손을 멋대로 만지는 용기까지.”
폭신한 앞발이 가하란의 이마를 연신 두드렸다.
“어린 인간의 용기는 언제 봐도 놀랍다니까. 근데 왜 나이를 먹으면 쪼그라드는 걸까. 볼품없게 말이야.”
발소리가 났다. 고개를 살짝 들었다. 엔엔이 잔을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네요.”
잔이 머리맡에 놓였다. 향긋한 향이 올라왔다. 흐리멍덩한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괜찮은 거 같아요.”
브라인에게 말했다. 천천히 일어나보라는 말에 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세웠다. 어지럼증이 잠깐 찾아왔다. 흐느적거리는 시야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마셔요. 좀 나아질 테니까.”
잔을 받았다. 단숨에 마셔도 될 정도로 적당히 따뜻했다. 한 모금 마신 뒤,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마나 기절한 건가요?”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대답은 브라인이 해줬다.
“30분? 얼마 안 됐어. 심상세계가 엉망이 된 줄 알고 좀 걱정했는데, 들여다보니까 그게 아니라 안원으로 튕겨 나간 거더라.”
“안원. 정령세계를 부르는 말이죠?”
“맞아, 정령세계. 그렇게도 불렀지. 가하란이라고 했나?”
“네.”
“너 이번이 처음 아니지? 몇 번이나 안원에 다녀온 거야?”
가하란은 눈가를 비비며 말했다.
“세 번째예요.”
“세 번이라.”
브라인이 말없이 엔엔을 바라봤다. 심각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엔엔이 다그치듯 말했다.
“등 떠밀려서 가게 된 건가요? 만약 그런 거라면 지금이라도 말해요. 강제로 눈을 뜨게 하는 건 저질러선 안 될 짓이니까.”
뭔가 오해가 생긴 것 같았다. 가하란은 고개를 저은 후 차분하게 설명했다.
타챠와 만난 순간부터 정령세계에 두 번째로 발을 디뎠을 때까지.
“억지로 잡아끈 게 아니라 스스로 열었다는 거네? 게다가 산의 전사가 들고 다니는 제구(祭具)와 교감까지 하고. 재미난 표본이네.”
브라인이 두 손으로 가하란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물건을 감별하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살폈다.
“요즘 기록할 게 별로 없어서 적적했는데, 새로운 일거리가 생겼어.”
브라인이 손을 뗐다. 가하란은 손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회색 털이 잔뜩 묻어났다.
“미안. 내가 털갈이 중이거든.”
털갈이란 말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툴도 털갈이할 때는 이렇게 빠지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털을 뿌리고 다녔다.
“네가 기르는 개를 생각하고 있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엔엔한테 들었어. 들은 걸 바탕으로 널 이해해보는 중이라 이 정도는 쉽게 유추할 수 있지.”
대화가 끝나자 엔엔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검사 몇 가지만 간단히 할게요.”
엔엔의 말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손가락을 따라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여 보기도 하고, 이름과 사는 곳을 말하기도 했다. 한 발로 서서 몇 초간 버티기까지 하자 그제야 됐다면서 의자를 권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상할 정도로 배가 고파졌다.
“허기가 지겠지. 체력 소모도 심했을 테니까. 일단 이거라도 먹어.”
브라인이 네모난 건빵을 던져줬다.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묻고 싶은 게 몇 개 있어. 대답해줄 수 있을까?”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어 대답하고 싶었는데, 건빵이 아직 남아 있었다.
“먹은 다음에 말해.”
물과 함께 건빵을 삼킨 후 브라인을 바라봤다.
“안원에 관한 건 이해했어. 그 나이에 눈이 반쯤 뜨인 건 놀랍긴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분이 곁에 있는 건… 내 이해력을 한참 넘어서는 일이야. 그분과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그분이요?”
“‘바다를 품은 혼’ 말이야. 널 구해주신 분.”
“아, 산페르 말인가요?”
반쯤 접혀 있던 브라인의 귀가 활짝 펴졌다. 동그란 눈이 배는 커졌다. 옆에 있는 엔엔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이름을 알아? 어떻게?”
“알려 주셨어요. 산페르 아저씨가.”
“그분이 너한테 이름을 허락했다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가하란은 조금 물러서며 말했다.
“이름을 알면 안 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야. 알 수도 있지. 하지만 내 기록 창고에 의하면 그분께서 이름을 허락한 경우는 극히 드물어. ‘세상을 덮는 새’와 ‘대지를 받치는 영령’과는 다르게 말이야.”
세상을 덮는 새, 대지를 받치는 영령. 앞에 이름은 들어도 감이 안 잡혔으나, 뒤에 이름은 듣자마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영롱하게 빛나던 붉은 눈동자. 산보다 더 거대했던 쥐. 타챠도 산테를 가리켜 위대한 영령이라고 불렀다.
“대지를 받치는 영령은 산테를 말하는 건가요?”
“그분의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아?”
“처음 정령세계에 갔을 때 만났어요. 절 구해주신 분이에요.”
“아하! 그래서 첫 방문 때 무사히 돌아왔구나. 하긴… 그분은 인간을 사랑하니까. 오롯한 존재를 그 나이에 두 분이나 만나다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재수가 엄청 없다고 해야 하나.”
재미있는 수준이 아니라 곁에 두고 관찰하고 싶은 표본인걸? 브라인이 눈가를 씰룩이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만난 건데?”
“엄마와 아는 사이셨어요. 근데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요.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에 정신 차리고 보니, 산페르 아저씨가 곁에 있었어요.”
“뭐,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분이니까. 혹시 그분과 대화할 수 있어?”
“산페르 아저씨요?”
“어. 가능하다면 오랜만에 인사를 올리고 싶은데.”
“잠깐만요.”
가하란은 마음속으로 산페르를 불러봤다. 아저씨, 아저씨 하고 몇 번 외치자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저 귀찮은 것 하고 말 섞기 싫어. 저 여잔 내가 뭐만 하면 다 기록하려 들거든.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해도 되잖아요.”
작게 목소리를 냈다.
-싫어. 그냥 별일 없고 앞으로도 별일 없을 예정이라고만 전해.
“아저씨.”
대답이 없었다. 브라인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대충 감이 오네. 또 귀찮다고 하시지?”
“……네.”
“됐어. 어쩔 수 없지. 300년 전에도 간신히 대화했거든. 혹시 나한테 전하라는 말은 없었어?”
“별일 없을 거고, 앞으로도 별일 없을 예정이라고 했어요.”
“그거면 됐어. 대해가 잔잔하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테니까. 그거면 족하지.”
양손을 들어 올리며 기지개를 켜던 브라인이 머리를 사정없이 털었다. 털들이 한가득 뿜어져 나온다.
“여길 털 바다로 만들진 말아 주세요.”
엔엔이 손을 휘휘 저으며 뭔가를 내밀었다. 자세히 보니 길쭉한 빗이었다.
“미안. 근데 어쩔 수 없잖아. 계절이 이런걸.”
브라인이 빗으로 앞머리를 훑었다. 털이 한 움큼 빠졌다.
“저기….”
가하란은 엔엔과 브라인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왜?”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내 질문에 답해줬으니 나도 말해줄게. 근데 말이야, 그냥 얘기하면 심심하잖아?”
브라인이 빗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멍하니 빗을 건네받았다.
“강아지 털갈이할 때 빗겨준 적 있지?”
“네. 안 그러면 집 안이 온통 털로 뒤덮여서요.”
“잘됐네. 나 뒤에 좀 빗어줄래? 손이 닿기는 하는데, 내가 하면 결이 안 살아. 제대로 빗어야 윤도 나거든.”
“할게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촉감이 궁금하던 차였다. 브라인 뒤에 의자를 놓고 밟고 올라갔다.
“귀부터 부탁해. 빗으면서 궁금한 거 물어보고.”
가하란은 브라인의 귀를 살짝 들어서 빗기 시작했다. 빗이 닿자마자 털이 우수수 뽑히는데, 제법 재미가 있었다.
“아까 그 괴물들은 뭐였나요? 그게 마수인가요? 도깨비라고 부르시는 걸 듣긴 했는데.”
“모르는 애가 보면 마수로 착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마수랑 도깨비는 달라. 마수는 이 층에서 나돌아다니는 불쌍한 괴물이고, 도깨비는 층과 층 사이에서 서식하는 놈들이거든.”
층? 떠버리 정령들이 자주 했던 말이다. 이 층의 법칙에 따라 인간은 죽어야 한다고 말했었던가? 섭리, 구조, 법칙도 언급했었다.
“저기, 층이 뭔가요?”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구나. 어, 얘기가 길어지겠네.”
브라인이 다리를 까닥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층은 현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세계야. 안원에 가봤으니까 이해하기 쉽겠네. 거기서 불타는 산을 봤지?”
“네! 봤어요.”
“그런 게 이쪽 세계에 존재할까?”
“없을 거 같아요.”
“그런 거야. 서로 다른 층은 서로 다른 구조로 되어 있어. 이곳에서 통하는 지식이, 그쪽으로 넘어가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가하란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사는 이곳과 정령세계, 이렇게 두 개의 층인가요?”
브라인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귀도 좌우로 움직인다. 가하란은 이동하는 귀를 따라 빗질을 이어갔다.
“층이 정확히 몇 개인지는 누구도 몰라. 미지의 영역이니까. 대신 확실하게 밝혀진 건 몇 개 있지. 우선 우리가 사는 이곳. 그다음은 안원.”
브라인이 손가락으로 머리와 가슴을 번갈이 지목했다.
“그다음이 개인 모두가 지닌 심상세계.”
“마음속도 층인 건가요?”
“각 개체는 하나의 우주야. 작아 보이지만 거대하지.”
개체는 하나의 우주. 불현듯 생각나는 게 있었다.
“마법의 수는 마법사의 숫자와 같다는 것도….”
“이해력이 좋네. 마법은 심상세계의 발현이야. 비슷한 형태가 있을 순 있지만, 아예 똑같은 건 없어. 그렇기에 심상세계라 뭉뚱그려 말하지만, 사실 셀 수 없이 많은 층이 존재하는 거지.”
브라인이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리고 가장 기이한 층으로 꼽을 수 있는 게 영혼세계야. 몸은 죽어 거대한 뿌리로 돌아가지만, 정신은 영혼세계를 방랑하지.”
“죽은 사람들은 전부 그곳에 있나요?”
“그게 미묘해. 있다고 해야 하는지, 없다고 해야 하는지. 영혼세계는 규명하기가 어려워. 접근하는 방법조차 극히 한정적이거든.”
가하란은 엄마의 사진을 떠올리며 물었다.
“한정적이란 건 그래도 갈 수 있다는 거네요?”
“네 말대로 접근할 수는 있지. 초록 눈을 지닌 미식가에게 부탁하면 되긴 해. 근데 갔다가 돌아올 수는 없을 거야. 영혼은 모든 곳에,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자료거든. 그것과 마주한다는 건….”
브라인이 빈 잔을 들어 올렸다.
“이 컵에 바닷물 전부를 담아 보겠다고 설치는 꼴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