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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03화 (76/558)

제103화

바라라족. 천 년을 넘게 살아왔다는 신비로운 생명체.

가하란은 경이로움을 담아 브라인 특무대령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비켜섰다.

“엔엔. 상충이 일어나서 여기 물건 몇 개가 망가질 수도 있어. 알지?”

“괜찮습니다. 어차피 검수를 끝낸 것들이라 망가져도 됩니다.”

“잔소리 들을 일 없으니 마음껏 해도 되겠네.”

엔엔과 브라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어도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얌전히 서 있을 때였다. 엔엔이 곁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대피하는 것보다 제 옆에 있는 게 안전할 겁니다.”

엔엔이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위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두려움과 함께 미지에 대한 동경이 샘솟았다.

브라인은 작업실로 들어오며 ‘표리영역’이라고 외쳤다. 그러면서 ‘더러운 것’이 나타날 거라고 예고했고.

꽉 막힌 이 작업실에 누가 침범하는 걸까? 표리영역은 또 무엇일까?

“대령님. 인간족 아이는 제가 돌볼 테니 처리는 맡기겠습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인간이라고 해도 어린애가 휩쓸려 죽으면 입맛이 쓰거든.”

이 상황이 즐거운지, 특무대령은 눈웃음 짓고 있었다. 옆으로 뻗은 수염이 살랑살랑 움직인다.

“온다.”

브라인이 양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검은 의수가 활짝 펴짐과 동시에 기이한 감각이 몸을 휩쓸었다.

가하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전신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신음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어깨를 잡아주었다.

“곧 어지럼증이 찾아올 겁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일시적인 현상일 테니까.”

엔엔이었다.

“숨을 천천히 쉬세요. 감았던 눈을 뜨면 세상이 바뀌어 있을 겁니다. 놀라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세상이 바뀌어 있어? 문득 정령세계가 떠올랐다. 불길한 생각을 덜어내며 슬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길쭉한 테이블이 그대로 있었다. 잡동사니도 여전했고. 달리진 게 없다고 생각할 때였다.

주변이 일렁거렸다. 아지랑이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테이블이 출렁거리고 벽이 흐느적거렸다.

“어떻게 된 거죠?”

가하란은 침착하게 말했다. 이미 다른 세계를 경험해본 바가 있었다. 이 정도로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가하란은 적응력이 좋네요. 이곳에 처음 발을 들인 인간이라면 이성이 마비돼야 정상인데.”

“여기와 닮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른 세계에 가본 적이 있거든요.”

“다른 세계?”

엔엔이 의문을 담아 물어볼 때였다.

“엔엔! 일단 한 마리인 거 같아. 하지만 기척을 숨기고 있는 녀석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주변을 살펴줘.”

“알겠습니다.”

브라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엔엔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엔엔이 손가락을 들었다.

“대령님, 저기!”

“알았어!”

특무대령이 몸을 웅크렸다가 뛰어 올랐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도약력이었다.

잠깐만, 가하란은 눈을 크게 떴다.

천장이 높아지고 있었다. 저 정도로 높이 뛰었으면 천장과 부딪쳐야 하는데.

공간이 제멋대로 변하고 있었다.

바닥으로 내려온 브라인이 날카로운 의수를 앞세워 주변을 휘저었다.

일렁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브라인 주변 공간이 휘고 있었다.

특무대령 손이 테이블에 닿았는데도, 테이블 위 물건은 얌전히 제자리를 지켰다.

모든 게 허상처럼 느껴졌다. 설마 꿈꾸고 있는 건가?

손으로 겨드랑이 안쪽을 세게 꼬집었다. 윽,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팠다. 세계는 여전히 비틀리고 있었고 엔엔도 곁에 있었다. 꿈은 아니었다.

엔엔은 브라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상상력을 총동원하며 눈앞에 벌어진 일을 해석하려 할 때였다.

끼긱, 끼긱, 끼긱.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하란은 뒤를 돌아봤다. 저 먼 곳, 어둠 속에서 그 인형이 나타났다.

기괴한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이번엔 정말 무서웠다. 엔엔의 곁으로 바짝 다가가 멜빵바지를 붙잡았다.

“왜 그러….”

엔엔이 말끝을 흐렸다. 인형을 발견한 모양이다.

“대령님. 여기도 한 마리 있네요.”

제 뒤에 서세요, 엔엔이 말했다.

“위험한 거야?”

“그렇지는 않아요. 근데 좀 성가셔 보이네요. 지성이 있는 듯해요.”

“그래? 잠깐만, 이쪽도 슬슬 끄집어낼 수 있을 거 같아!”

서로 등진 채 대화를 이어나가는 엔엔과 브라인이었다. 가하란은 징그럽게 쳐다보는 인형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뒤쪽을 보니 브라인이 공간을 찢어내고 있었다. 벽면이 너덜너덜해지더니, 안쪽에서 괴상한 게 튀어나왔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서는 형태였다. 움직이는 걸 보면 살아있는 동물인데, 생긴 건 썩은 쥐 같았다.

주둥이가 반쯤 뭉개져 있고 꼬리는 다섯 개가 넘었다. 재빠르게 움직여서 눈으로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바닥을 기던 괴생물이 이젠 벽을 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발을 붙이더니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뛰어다녔다.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에 들어오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머릿속에 저장했다.

“잡았다!”

얌전히 서 있던 브라인이 왼쪽으로 움직이더니 팔을 휘둘렀다. 검은 의수에 괴생물이 걸려들었다.

파드득거리며 오른쪽 의수 안에서 날뛰는 괴생물이었다.

설마, 저게 이야기로만 듣던 마수인가? 도시 근처에서는 절대 볼 수 없다는 위험한 몬스터?

”이쪽은 황형(黃形)인데, 거기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반응이 없네요.”

엔엔이 대답했다. 가하란도 다시 몸을 돌렸다. 인형이 몸을 뒤집으며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핏줄 같은 게 전신에서 튀어나와 주변에 달라붙는데, 기괴하고 끔찍했다.

“형색 확인은 내가 할게. 넌 그 꼬마나 잘 지켜봐.”

“예, 그럴게요.”

옆에서 바람이 일었다. 브라인이 어느새 인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검은 의수가 공간을 긁어내렸다. 허공이 찢어졌다. 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인형이 바퀴벌레처럼 기어서 도망쳤다.

“잘 숨네. 기척이 안 느껴져.”

특무대령이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손에 들려 있던 괴생물이 콰드득 소리를 내며 으깨졌다.

가하란은 눈을 찌푸렸다. 곤죽이 된 살점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근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체액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생물이라면 피를 흘려야 하지 않나?

찰흙처럼 뚝뚝 끊어지며 떨어진 살점이 노란색 빛을 내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정령세계와 흡사했다. 내가 아는 것이 여기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도깨비 놀이는 그만하지?”

브라인이 중얼거리면서 손을 휘저었다.

“엔엔. 뭐 걸리는 거 없어?”

“네. 물러난 게 아닐까요?”

“표리영역까지 와서 그냥 가는 도깨비도 종종 있긴 하지만.”

주변을 돌아다니며 발길질을 하는 브라인이었다. 그럴 때마다 공간이 찌그러졌다.

“없는 거 같지?”

“그런 것 같습니다.”

“조잡한 놈들이라 그나마 다행이네요.”

“황형이 침범한 건 오랜만이죠?”

“한 4년 하고도 143일 정도 됐네.”

브라인이 곁으로 다가왔다.

“아까 묻다가 말았는데, 얜 뭐야?”

“제 손님입니다.”

“표리영역 안에서도 정신 잃지 않는 걸 보면 뚝심이 좋네.”

특무대령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가하란은 어설프게 웃으며 붉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이제 보니 너… 눈이 반쯤 뜨였구나?”

이전에도 몇 번 들어본 말이었다. ‘눈이 뜨인 자.’ 정령세계에 갔을 때 정령들이 가하란을 보며 한 말이었다.

“다른 세계에 갔다더니, 그 뜻이었군요.”

엔엔이 말했다. 가하란은 둘 사이에서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저기… 이제 끝난 건가요?”

“마무리된 것 같아. 이제 도깨비들이 열어놓은 문을 닫기만 하면 돼.”

도깨비. 어른들이 무서운 얘기를 해줄 때 종종 나오던 이름이었다. 무덤 주변에서 보인다는 잭 오 랜턴, 도깨비불 이야기가 가장 유명했고.

얼른 물어보고 싶었다.

이 공간은 무엇인지, 도깨비는 또 뭔지. 마수와 도깨비는 어떤 관계인지, 아니면 같은 것인지.

“거하게 날뛰지는 않아서 물건도 괜찮을 거 같네.”

브라인이 걸음을 옮겼다. 검은 의수로 허공을 쓱쓱 훑는데, 그럴 때마다 공간이 한 점으로 뭉쳤다.

“저쪽은 제가 닫죠.”

엔엔이 캐비닛 쪽으로 걸어갔다. 출렁거리며 제멋대로 일그러지던 공간이 엔엔의 손짓에 따라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본래 세계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신비한 풍경을 숨죽인 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끼긱, 발밑에서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바닥을 찢으며 한쪽 팔과 눈이 없는 인형이 튀어나왔다.

몸을 뒤로 뺄 수조차 없었다. 인식한 순간 이미 눈앞에 있었다.

핏줄기가 덕지덕지 붙은 인형의 손가락이 눈동자로 서서히 다가왔다.

어? 서서히?

이상했다. 가하란은 눈동자를 슬며시 돌렸다. 시야가 아주 천천히 바뀌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엔엔이 몸을 돌리고 있었다. 어찌나 느린지 멈춘 것처럼 보였다.

브라인은 엔엔보다 빨랐으나, 굼떠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도와줄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이대로 인형의 손가락이 눈을 꿰뚫는 걸 지켜봐야 하나?

-눈 감아. 그리고 한숨 푹 자.

산페르의 목소리였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산페르는 가하란과 인형 사이에 자리 잡았다.

물이 차올랐다. 발목이 잠기더니 어느덧 작업실 전체가 물로 가득 찼다.

세상을 품는 물줄기였다.

가하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와 동시에 강렬한 진동이 전신을 때렸다.

회오리치는 물줄기 안에서 인형의 몸이 가닥가닥 끊어졌다. 그러다 압착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했다.

-이번엔 정령 따라가지 마.

그 순간 세상이 검게 변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가하란은 익숙한 공간에 서 있었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하늘. 거대한 불의 산과 얼음덩어리가 부유하는 곳.

정령세계.

“또 왔네?”

날개 달린 사슴이 얼굴 왼편에서 말했다.

“이번엔 갈 거지? ‘바다를 품은 자’도 지금은 여기에 없어. 네가 원한다면 저곳으로 갈 수 있다고.”

정령들이 넘실대는 곳을 가리키며 사슴이 말했다. 가하란은 멀거니 그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갈게요.”

“또?”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아빠랑 약속했다고.”

“억지로 데려갈 수도 없고, 참. 너 그러다 후회해. 우리랑 노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다음에 꼭 갈게요. 정말이에요. 약속해요.”

“인간의 약속은 믿지 않아.”

토라진 표정으로 날개를 펴는 사슴이었다. 가하란은 땅에 발을 붙인 채 멀어져가는 사슴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번엔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기억을 잃지도 않았다.

또렷한 눈으로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세 번째 방문이지만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미지의 세계. 두려움과 흥분이 교차하는 공간. 언젠가 이 넓은 곳을 전부 탐험하리라.

“아야.”

가하란은 뺨을 부여잡았다. 뺨이 얼얼했다. 누군가가 세게 때린 것처럼.

이번엔 반대쪽이 따끔거렸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울상을 지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쌀 때였다. 눈이 한 번 더 떠졌다.

풍경이 바뀌었다. 바닥에 널린 잡동사니와 함께 브라인의 얼굴이 보였다.

“깜짝이야. 죽은 줄 알았네.”

가하란은 멍하니 눈을 꿈뻑거렸다. 그러다 코가 간지러워서 크게 재채기를 했다.

“내 털 때문에 그런가?”

브라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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