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02화 (75/558)

제102화

“하늘석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어요. 그 거대한 돌이 어떻게 공중에 떠 있는지, 누가 만든 것인지, 만든 이유는 무엇인지. 무엇 하나 밝혀진 게 없어요.”

반투명한 유리잔이 앞에 놓였다. 연두색 물이 담겨 있는데 김이 옅게 올라오고 있었다.

가하란은 두 손으로 잔을 쥐었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빗소리와 손안에서 퍼지는 온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린 인간족이 좋아하던 음료예요. 입에 맞을 테니 마셔 봐요.”

엔엔이 손짓했다. 가하란은 후, 하고 입바람을 분 다음 물을 마셨다. 긴장을 풀어주는 단맛이 입에 감돌았다.

“이게 뭔가요?”

“호박꽃벌의 벌집에서 꿀을 채취해 물에 탄 거예요. 어때요?”

“맛있어요. 좀 나른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진정 효과가 있어요. 효과가 대단하지는 않지만.”

가하란은 차를 홀짝인 다음 다시 물었다.

“호박꽃벌은 처음 들어봐요. 둔 주변에서도 볼 수 있나요? 아니면 아웃라인 바깥으로 가야 해요?”

엔엔이 손을 살며시 들었다.

“그건 이따가 대답해줄게요. 우선 하늘석에 관한 걸 마저 말해야 하니까요.”

“맞다. 그것부터 들어야죠.”

가하란은 지면에서 살짝 뜬 발을 앞뒤로 교차하며 엔엔을 바라보았다.

“하늘석 얘기를 하려면 우선 이것부터 말해둬야겠네요.”

엔엔이 선반 쪽을 바라봤다. 가하란도 시선을 옮겼는데, 거기에 낡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저건 10년 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해둔 서적이에요.”

“10년 전.”

까마득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

“집필자는 바라라의 딸인 브라인 님이에요.”

“…잠깐만요. 군에 계신 특무대령님! 제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거 맞나요?”

1시간 전쯤에 브라인에 대한 설명을 짧게 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군에 있었고, 둔 군부의 기록보관서 담당자라는 것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네요. 그분은 둔이 계획도시로서 기틀을 잡기 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었어요. 설명을 보충하자면, 계획도시 둔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가 그분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죠.”

가하란은 눈을 깜빡였다.

“특무대령님이 다른 곳에 살았다면….”

“둔이라는 도시 자체가 없었겠죠. 물론 여러 가지 사유가 맞물려 계획된 거긴 하지만, 브라인 님의 존재 자체가 가장 큰 이유였어요.”

엔엔의 눈동자가 오른쪽 벽을 향했다. 그곳에 놓인 공구를 보는 게 아니라, 벽 너머를 살피는 눈빛이었다.

“바라라의 딸들이 관리하는 기록보관서는 신비한 곳이에요. 심상세계가 발현된 그 공간은 영원불변하죠. 그 안에 차곡차곡 쌓인 기록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에요. 인류에게도, 다른 종족들에게도.”

“할아버지가 말해줬어요. 기록된 사실은 정말로 중요하다고. 동시에 위험하다고요.”

“현명한 인간이네요. 체계화된 자료와 정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원이에요.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죠.”

엔엔이 컵을 들었다. 타원형 컵. 입 구조 때문에 컵 주둥이가 조금 길쭉한 것 같았다.

“제국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부터 인간의 왕들은 바라라의 딸들을 설득해왔죠. 그 덕분에 지금처럼 주요 도시에 기록보관서가 생겨 자료를 보관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됐고요.”

“기록보관서가 다른 곳에도 있는 거네요.”

엔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성도에도 하나 있어요. 남부 오손과 북부 로우뎀에도 있고요.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록보관서도 분명 다른 곳에 존재해요. 그곳을 담당하는 바라라의 딸들은 지금도 숙명처럼 자신이 겪은 일을, 주변에서 들은 일들을 기록해 나가고 있겠죠.”

그래서 우리는 바라라족을 가리켜 ‘최후의 기록자’라고 해요, 엔엔이 실뭉치를 만지며 말했다.

실 뭉치 사이에서 실이 몇 가닥이 흘러나왔다. 사냥감을 앞에 둔 뱀처럼 빳빳하게 일어서더니 천장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가하란은 실을 눈으로 좇으며 엔엔의 말을 들었다.

“브라인 님은 제국이 형성되기 전부터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해 왔어요. 그중에는 물론 하늘석에 관한 것도 있었죠.”

엔엔이 왜 바라라족 이야기를 꺼냈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처음에 말했듯 그 옛날조차 하늘석은 하늘에 존재했어요. 살아있는 역사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그분조차 하늘석의 탄생 순간은 보지 못했어요.”

살아있는 역사. 가하란은 대체 몇 년을 살아야 살아있는 역사라 불릴 수 있는지 고민해봤다.

“왜 그러죠?”

엔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딴 질문인데, 지금 해도 될까요?”

“바라라족에 관한 거라면 해도 돼요. 마침 얘기가 나왔으니까.”

가하란은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브라인 님은 몇 살인 거예요?”

“몇 살이라. 인간의 셈법으로는 따지기 민망할 정도로 오래 사셨죠. 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해요. 다만, 최소 천 년 이상은 사셨을 거예요. 천 년 전에 쓰신 그분의 기록을 봤으니까요.”

“…천 년은 얼마만큼의 시간인지 감조차 안 잡혀요.”

가하란은 손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하나에 백 년씩 잡아야 천 년. 10년조차 까마득한데 천 년이라니.

상식을 엇나간 시간관념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사람도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나요?”

“불가능하단 말은 하지 않을게요. 물론 일반적으론 천 년은 못 살죠. 제가 만난 인간족은 천 년은커녕 백 년도 못 채우고 뿌리로 돌아갔으니까요.”

그렇다면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은 천 년을 산다는 건가? 그런 사람이 진짜 있기는 한 걸까?

호기심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엔엔이 옅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천 년을 살아도 이상하지 않을 인간이 제가 아는 선에서 딱 한 명 있어요.”

“그게 누구예요?”

“일인군단. 마도사 퀼비언. 그 인간이라면 천 년을 살아도 수긍할 수 있어요. 오히려 천 년을 못 채우고 단명한다면 세계가 놀랄 일이죠.”

마도사 퀼비언. 어디서 들어봤더라? 바닥을 보며 고민했다. 그러다 번뜩 떠올랐다.

테리 형이 말했던 이름이다. 대륙 최강자는 제국 사람도, 연합왕국 사람도 아닌 마도사 퀼비언이라고.

“그 퀼비언이란 사람은….”

엔엔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이러면 또 질문이 딴 곳으로 샐 거예요. 일단 하늘석 얘기를 마무리 짓죠. 퀼비언 이야기는 호박꽃벌 다음에 해줄게요.”

가하란은 수줍게 웃으며 끄덕였다.

“기록에 따르면 하늘석은 해와 달처럼 자연의 일부라고 여겨졌어요. 같은 궤도를 같은 시간으로 계속 돌고 있으니 그렇게 판단하는 게 당연했죠.”

엔엔의 설명을 듣자마자 얼마 전에 본 하늘석이 떠올랐다.

상당히 낮게 날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이던 하늘석이.

“가하란이 무슨 생각 중인지 알 것 같네요. 옛사람들도 어느 날 궤도를 바꾸고 멋대로 나는 하늘석을 보게 됐죠. 그때부터 의심하게 된 거예요. 저 거대한 돌은 자연이 아닌 누군가 만들어낸 물건이 아닐까, 하고.”

엔엔이 위를 가리켰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실이 엔엔의 손가락 끝으로 다가왔다.

“인류를 비롯한 모든 종족이 마나와 마법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그 사용법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부터 하늘석에 대한 탐구심은 한층 더 커졌죠.”

실이 빙글빙글 돌더니 동그랗게 뭉쳤다.

“아주 희미하지만 뿌리의 마나가 하늘석과 이어져 있다는 걸 발견한 게 250년 전이에요. 마나는 자연 상태에서 결코 응집하지 않아요. 언제나 기화해 흩어질 뿐이죠. 그런 마나가 고정된 채 하늘석으로 이어져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만들어졌다는 게 확실시된 거네요.”

“맞아요. 하늘석은 자연의 기적이 아니라 창조된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쏟아졌어요.”

가하란은 살짝 긴장한 채 물었다.

“하늘석에 드래곤이 산다는 것도….”

“당시에 만들어진 소문이에요. ‘역사속으로 사라진 용이 사실은 하늘석에 있다.’ 이런 이야기가 대륙 전역을 휩쓸었죠.”

“없다고는 할 수 없네요? 그 누구도 확인한 게 아니니까.”

“그렇긴 해요. 아무도 모르죠. 정말 드래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가하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없다고 증명된 게 아니니 괜찮았다.

“엔엔 님.”

“질문할 게 또 생겼나요?”

가하란은 멋쩍게 웃은 다음 말했다.

“하늘석에 갈 수 있는 마법공학품은 없을까요?”

“그런 게 있었다면 제가 먼저 가봤을 거예요. 그리고 자유롭게 날 수 있는 마법이 있다고 한들, 하늘석에 접근하는 건 힘들어요.”

“왜 그렇죠?”

“168년 전, 하늘석이 고도를 낮춰 지상 가까이에 내려온 적이 있어요. 당연히 난리가 났죠. 국가는 빠르게 대응했고, 거병을 이용한 작전이 수행됐어요.”

거병이란 말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가하란은 집중해서 엔엔의 말을 들었다.

“지면을 쓸면서 이동하는 하늘석에 거병이 접근했어요. 거병으로 하늘석을 멈추는 것까지는 힘들어도, 올라타는 것 정도는 가능해 보였죠. 하지만 실패했어요.”

“왜요? 하늘석이 너무 빨랐나요?”

“아니요. 거병이 하늘석에 접근하는 순간 기능이 정지했어요. 하늘석은 다시 날아올랐고 그 뒤로 내려온 적이 없었죠.”

절대 쓰러지지 않는 수호신. 그게 가하란이 생각하는 거병이었다. 그런데 하늘석에 접근하자마자 멈춰버리다니.

“멈춰버린 거병을 조사해봤는데, 마력선 일부가 일그러졌다고 해요. 하늘석에 자기방어능력이 있는 건지, 아니면 우연히 회로가 고장 난 건지 알 수는 없어요.”

엔엔이 양손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공중에 떠다니던 실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하늘석 관련된 이야기는 이게 전부예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도전이 있었지만 하늘석에 도달한 자는 없어요. 그러니 가하란의 궁금증은 스스로 해결해야 해요.”

가하란은 의자에 기대 숨을 폭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뭐가 다행이죠?”

“어쨌든 그냥 돌이 아니라는 거잖아요. 나중에 가보면 상상하지도 못한 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걸 생각하면 벌써 두근거려요.”

“위험한 일인데도 할 건가요?”

“가만히 있는 게 가장 위험하다고 할아버지가 말해줬어요.”

엔엔이 노란 눈동자를 움직이며 물었다.

“아까도 할아버지가 알려줬다고 했었죠. 가하란의 할아버지는 어떤 인간이었죠?”

“최고의 모험가요.”

“모험가. 이름은요?”

“핀들론이요. 아, 다른 이름도 갖고 계셨어요. 로안. 할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하는 분들도 계셨어요.”

엔엔의 눈꺼풀이 빠르게 움직였다. 작은 웃음소리가 엔엔의 입을 비집고 나오더니, 이내 박수를 치면서 크게 웃었다.

“할아버지를 아세요?”

“알죠. 알고 말고요. 로안, 그리운 이름이네요. 둔에 있었다니 상상도 못 했어요. 로안은 지금 어디에 있죠?”

가하란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천천히 말했다.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렇군요. 거대한 매가 군병원 위를 맴돌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게 로안의 단짝이었네요.”

엔엔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가하란은 코앞까지 온 샛노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하란의 탐구심과 도전욕구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할아버지와 친하셨나요?”

“친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전 그를 영원한 친구라고 생각해요.”

다시금 킁킁하면 코를 씰룩이는 엔엔이었다.

“이렇게 다시 맡아보니 그리운 냄새가 나는 것 같네요.”

“저기, 엔엔 님. 저한테 할아버지가 남기신 일지가 있어요. 나중에 꼭 빌려드릴게요.”

“로안의 일지라. 꼭 보고 싶네요.”

빙긋 웃는 엔엔이었다. 얼굴 주변의 털들이 꾸물꾸물 움직였다. 아까보다 더 윤기가 도는 것 같다.

만져보고 싶지만, 그렇게 말하면 절대 안 되겠지? 꾹 참아내고 있을 때였다.

“엔엔! 더러운 게 여길 찾아올 거야! 표리영역 냄새가 심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작업실 안쪽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가하란은 앞에 선 사람을, 아니, 토끼를 닮은 자를 바라봤다. 손에 낀 검은 의수가 눈에 밟혔다.

토끼를 닮은 생김새, 그리고 검은 의수. 누구인지 곧바로 알게 됐다.

“근데 넌 누구니?”

토끼, 아니, 브라인 특무대령.

가하란이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됐고. 좀 비켜볼래? 거기서 더러운 게 튀어나올 거거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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