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빌려주다니?”
올란트는 비 내리는 도로를 훑어봤다. 어디에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손가락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켰다.
“우산을 빌려주신 분은 저쪽으로 갔어요.”
오른쪽? 올란트는 가하란 옆에 서서 길게 뻗은 길을 보았다. 비 오는 날, 일반 우산보다 조금 더 큰 검은 우산, 그리고 연구단지 끝자락.
“혹시 우산을 주신 분이 사람이었니?”
“아니요. 칼랑족분이었어요. 아빠, 그렇게 부드러운 털은 처음 봤어요.”
부드러운 털?
“너 설마 그분을 곤란하게 만든 건 아니지? 한번 쓰다듬어도 되냐고 떼를 쓰거나….”
철이 일찍 든 아들은 자제심이 강한 편이었다. 또래 애들과 비교하면 그 나이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뭐든 잘 참아내는 가하란이지만 딱 하나 절제하지 못하는 게 있었다. 생소한 것을 만져보고 싶어 하는 욕구였다.
오죽하면 산의 전사에게 비늘을 만져 봐도 되냐고 허락을 구했을까.
“우산을 건네주실 때 잠깐 스쳤을 뿐이에요.”
“그러면 다행이네.”
“근데 아빠. 저 막 떼쓰거나 그러지 않아요. 뭐, 아주 가끔 말해놓고 아차 싶은 게 있긴 하지만.”
배시시 웃는 아들이었다.
“근데 우산을 주신 분이요, 뒷모습이 툴을 닮았어요.”
“툴을 닮아?”
“꼬리가 좌우로 신나게 흔들렸어요. 표정은 되게 차분해 보였는데.”
어떤 모습이었을지 감이 왔다. 그분은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꼬리가 춤을 추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시거든.”
“그것도 툴을 닮았네요.”
“너, 그분 앞에서 개를 닮았다는 말은 꺼내지 마. 실례될 수도 있으니까.”
칼랑의 후손은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 한 번 적은 영원한 적이라는 극단적인 성향을 지녔다.
이해관계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도 아군과 적군이 뒤바뀌는 인간들의 관계망을 절대 이해 못 하는 종족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칼랑족과의 첫 대면은 정말로 중요했다. 삐끗해서 관계가 틀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니까.
“…했어요.”
“뭐?”
빗소리에 아들 목소리가 파묻혔다. 우산을 젖힌 아들이 목소리를 조금 더 높여 다시 말했다.
“툴 얘기를 해버렸어요.”
아이고야, 올란트는 턱을 매만졌다.
“어떤 식으로 말했어?”
“툴은 비가 오면 털이 처지는데, 칼랑족의 털은 푹신해 보인다고요.”
일단 개와 닮았다고 한 건 아니었다. 내용도 칭찬에 가까웠고.
“그분이 어떻게 받아들이시든?”
“표정은 변화가 없었어요. 털을 관리하기 때문에 개들과는 다르다는 말을 하셨고, 그 뒤에 저한테 우산을 줬어요.”
“화가 난 느낌은 아니었다?”
“네. 그런데 이런 말도 하셨어요. ‘면전에서 그렇게 듣는 칭찬은 썩 좋아하지 않아요.’ 라고.”
올란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됐다. 화나시진 않았을 거야.”
우중충한 하늘이 연신 비를 뿌려댔다. 평소라면 달갑지 않았겠지만, 오늘만큼은 비가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빠. 제가 잘못한 건가요?”
“아니. 그렇진 않아. 그분은 털에 대한 자부심이 높거든. 좋은 뜻으로 말했고 거기에 거짓이 없다면 좋게 받아들이셨을 거다. 그러니 우산도 씌워주셨겠지.”
올란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멎으려면 한참 걸릴 것 같군.
“가자.”
“네? 어딜요?”
“우산 돌려주러. 안 그래도 한 번은 찾아가려고 했으니까. 마침 비도 오겠다, 지금 가는 게 낫겠어.”
올란트는 아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 *
자그마한 입구였다. 아빠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이가 낮았다.
문은 활짝 열린 상태였는데,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가하란은 우산을 접은 후 있는 힘껏 털었다. 맺힌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정이 없으신 분은 아니야. 예의를 지키면 적어도 눈총은 안 받을 테니까 인사 제대로 하고.”
“네.”
“그러면 들어가 볼까?”
올란트가 문 옆에 달린 종을 세 번 두드렸다. 크기가 작은 종인데 중저음의 묵직한 소리가 난다.
아빠가 문틀을 넘었다. 들어오란 말은 없었는데?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따라갔다.
“엔엔 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아빠가 말했다. 가하란은 희미한 빛에 의지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구들이 벽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다.
정돈된 느낌은 아니었다. 쓰다가 방치해둔 것 같았다.
발치 뭔가 걸려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헝겊이었다. 자세히 보니 주변에 천 쪼가리가 많았다.
“이 목소리는… 올란트인가요?”
안쪽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칼랑족의 목소리였다.
“맞습니다.”
아빠가 대답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발밑을 조심하라는 말을 작게 하면서.
까치발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망가진 시계, 부서진 의자 다리, 깨진 컵.
그러다 구석에서 움찔거리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가하란은 잠시 멈춰서 그것을 바라봤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인형?”
팔 한쪽이 없는 인형이었다. 눈도 하나 없었다. 가하란은 긴장한 채 인형 위쪽을 보았다. 실이 달려 있겠지?
하지만 실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인형은 혼자서 움직이고 있었다. 벽을 따라 삐걱거리며 걷던 인형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가하란은 비명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고, 아빠를 향해 뛰어갔다.
“아, 아빠!”
아빠의 손을 붙잡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타닥타닥, 벽에 붙어 있던 인형이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얼굴을 향해 도약하는데, 가하란은 놀라서 양손으로 앞을 막았다.
“놀랄 것 없어요. 움직이는 것에 반응해 뛰는 것일 뿐이니까.”
하얗고 검은 털로 뒤덮인 손이 인형을 낚아챘다. 가하란은 실눈을 뜨고 옆을 보았다.
칼랑족이 별일 아니라는 듯 인형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인형이 날렵하게 바닥에 붙더니, 거미처럼 기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닭살이 오소소 돋아났다. 대체 저게 뭐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조차 들지 않았다.
“해를 끼치진 않으니까 무서워하지 마요.”
칼랑족 말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 없는 뭔가가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 흠칫했지만, 괜찮다고 하니까….
“따로 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알겠네요. 가족이었군요.”
칼랑족이 눈을 살며시 감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제 아들입니다. 대충 얘기는 들었는데, 혹시 마음이 상하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하지 마세요. 애초에 문제 될 것도 없었으니까요. 이 아이가 저한테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면 안 좋게 봤겠지만, 진심이었으니 괜찮아요.”
올란트가 눈짓을 주었다. 가하란은 앞으로 살며시 나서며 말했다.
“아까는 제대로 인사를 못 해서요. 우산 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돌려줄 필요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산을 받는 칼랑족이었다.
“엔엔 님. 괜찮으시다면 아들이 공방을 견학해도 될까요?”
“볼 건 없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올란트도 같이 있을 건가요?”
“전 업무가 있어서 돌아갈 겁니다. 이따가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아빠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물러섰다. 무서운 인형 때문에 움츠러들었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여길 구경할 수 있다니.
“얌전히 있을게요! 방해 안 되도록.”
가하란은 칼랑족을 보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요. 전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칼랑족이 뒤돌아섰다. 꼬리는 얌전하게 바닥을 향해 있었다.
“아빠는 이따가 올게. 엔엔 님 말씀대로 시끄럽게만 하지 않으면 여길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돼.”
가하란은 슬쩍 인형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저긴 절대로 안 가야지.
“알겠어요.”
역시 아빠는 내 마음을 가장 잘 안다. 가하란은 돌아가는 올란트에게 손인사 한 다음 안쪽으로 들어갔다.
칸막이 너머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체감상 덴스의 연구실보다 배는 넓은 것 같았다.
칸막이 뒤쪽으로 갔다.
길쭉한 테이블이 반겨주었다. 잡동사니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 칼랑족은 테이블 끝에서 무언가를 살피는 중이었다.
“이거 만져봐도 되나요?”
가하란은 물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익숙한 것들도 있지만, 난생처음 보는 것들도 많았다.
“이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건 만져도 돼요. 하지만 뒤쪽 선반과 바닥, 그리고 캐비닛은 만지지 마요.”
가하란은 시선을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반과 바닥, 캐비닛. 기억해둬야지.
“이름이 어떻게 돼요?”
멀리서 칼랑족이 물었다.
“가하란이요.”
“아직 미들네임은 없나 보네요.”
가하란은 조심스럽게 칼랑족 곁으로 다가갔다.
“엔엔 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허락을 받았다.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가하란은 엔엔의 작업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얇은 쇠막대기에서 자그마한 불꽃이 피었는데, 불의 세기가 점점 강해졌다.
이윽고 사람 주먹만 하게 커진 불이 퍽, 소리와 함께 터지면서 사라졌다.
“마법공학품인가요? 기름도 없는데 불이 생겨났어요.”
엔엔이 막대기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용도를 찾지 못한 발명품이에요. 애연가들이 쓴다고는 하는데, 좀 아쉽죠.”
“만드신 거예요?”
“제가 만든 건 아니에요. 기술부에서 시제품이 올라왔어요. 제가 검수해주길 바란 거죠.”
엔엔이 쇠막대기를 가만히 살피다가 바닥으로 휙 던졌다. 깡, 맑은 쇳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퍼졌다.
“이런 거 봐도 재미없을 거예요. 인간의 호기심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으니까요.”
“전 너무 신나는데요. 못 보던 게 한가득이라 재미있어요.”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요. 대충 구경하다가 돌아가세요.”
엔엔이 안경을 꺼냈다. 그런데 안경알이 하나뿐이었다.
“엔엔 님.”
“왜요?”
“궁금한 게 많아서 그런데, 제가 질문해도 되나요?”
“하세요. 인간의 질문은 어차피 금방 마를 테니.”
아빠는 예의를 갖추라고 말했다. 그래서 정중하게 물었고, 허락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마음껏 물어도 민폐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런 거겠지?
가하란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엔엔 곁으로 다가갔다.
“지금 끼신 안경은 왜 한쪽뿐인가요? 부러진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건가요? 안경알이 두 개인 것하고 무슨 차이가 있어요? 안경알이 되게 두꺼워 보이는데, 그건 왜 그런 거죠?”
“모노클을 모르는 건가요?”
“네!”
“왜 모르죠?”
“그러게요.”
엔엔이 왼쪽 눈에 끼웠던 안경을 뺐다.
“대답해주기로 했으니까 일단 알려줄게요. 이건 모노클이라고 불러요. 마나의 흐름을 보다 세밀하게 관찰하고 싶을 때 쓰는 거죠. 물론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차분하게 설명해나가는 엔엔이었다.
가하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 받아들인 정보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했다.
외안경에 관해 상세히 말해주던 엔엔이 잠시 말을 멈췄다.
“가하란. 억지로 들을 필요 없어요.”
“저 억지로 듣는 거 아니에요.”
“지루할 텐데요.”
“아니요. 하나도 안 지루해요. 오히려 더 듣고 싶은 걸요?”
“…그래요?”
“더 얘기해 주세요. 그리고 저 아직도 묻고 싶은 게 많아요.”
가하란은 엔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도중에 재미없어지면 바로 말해요. 저도 그만둘 테니까.”
엔엔이 도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가하란은 의자를 가져와 엔엔 옆에 앉았다.
“이번엔 뭐가 궁금하죠?”
엔엔이 먼저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