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견갑 덮개 올립니다. 혈관 검사 끝낸 다음 구동계 점검할 테니까 치프들은 대기해 주세요.”
지면에 고정된 크레인이 거병의 왼팔을 들어 올렸다.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왼팔로 모여들었다.
여기저기서 불꽃이 일었다.
저게 다 시그니처일까?
넋을 놓고 거병 점검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나도 처음 볼 땐 그랬어. 종일 보고 있었지.”
유단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계속 봐도 안 질릴 거 같아. 모든 게 신기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규모가 더 크고 복잡해.”
거병 왼 손바닥 위에 올라선 여자가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청색 멜빵바지 주머니에서 도구를 꺼내 연신 두드리는데, 그럴 때마다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깡깡깡, 맑은 쇳소리가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난 처음에 위대한 마법사와 위대한 제작가, 이렇게 두 명이 거병을 만드는 줄 알았어.”
유단이 먼지 쌓인 바닥에 철퍼덕 앉으며 말했다.
“형도 그랬어?”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마법이란 미지의 힘으로 순식간에 완성! 근데 실상은 전혀 다르지.”
“그러게. 나도 아빠한테 설명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필요한 줄 몰랐어.”
거대한 병기를 점검하기 위해서 백여 명의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각 모듈별로 전담하는 팀이 달랐고, 내부기관 역시 각기 다른 연구실에서 검사를 맡았다.
“뼈대인 탈로스 제작부터, 각 모듈 설계, 외부 내부 장갑 형성 및 특수 도료 도포. 여기에 마력선 작업까지 거쳐야 1차 공정이 끝나는 거야.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자금과 인력이 필요한데 내부기관은 시작도 안 했어. 거병은 정말 인류가 만들어낸 예술의 극치야.”
크레인이 움직였다. 이번엔 다리 쪽을 점검하는 모양이었다.
정비공들이 장비를 챙겨 연구단지를 빠져나갔다. 동시에 맞은편에서 새로운 정비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대하는 듯했다.
“분해 안 하고 기동점검할 겁니다. 좌족 A, B 모듈은 기능확인 끝났으니 C부터 시작해 주세요.”
올란트였다. 어느새 청색 멜빵바지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가하란은 트레일러에 오르는 아빠에게 손을 크게 흔들었다.
“형도 기술자가 될 거야?”
가하란은 유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난 내부기관 연구자가 될 거야. 오토마타로 가닥을 잡을지, 아니면 액상 근육이나 특수 도료에 집중할지는 아직 결정 못 했지만.”
“형은 전부 다 할 수 있을 거야! 많은 걸 알잖아.”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보고 싶어. 네 말대로 꿈은 클수록,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진한 미소를 머금는 유단이었다.
가하란도 마주 보면서 웃었다. 꿈을 부정하지 않는 형은 정말 멋있어 보였다.
“가하란. 다 네 덕분이야. 네 덕분에 내 눈이 뜨였어. 정말 고마워.”
“그 정도는 아니야.”
“아무튼 기회가 되면 내가 선물해줄게. 너도 아주 좋아할 거야.”
“선물? 정말?”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언제 줄지 나도 잘 모르니까. 그래도 잊지는 마. 나는 너한테 빚을 졌으니까 그건 갚을 거야.”
빚이라니? 되묻고 싶었지만 유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하란은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강한 햇빛 때문에 유단의 턱 위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잠깐 눈을 찌푸린 사이, 유단이 몸을 돌렸다. 귀를 어지럽히는 소음을 들으며 가하란은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잘못 본 거겠지? 돌아서기 직전 시야에 잡힌 유단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딱딱했다. 감정이란 게 없는, 마치 조각해 놓은 모형처럼….
“가하란. 이거 받아.”
연구실로 들어갔던 유단이 입구 밖으로 상체를 반쯤 내밀고 무언가를 던졌다.
가하란은 날아오는 물건을 두 손으로 잡았다. 물이 담긴 통이었다.
“마시면서 봐. 그리고 햇빛 아래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가하란은 유단의 얼굴을 응시했다. 편안하고 아늑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 잘못 본 것이었다.
“형, 고마워!”
유단이 손을 흔들며 연구실로 들어갔다. 물을 조금씩 마시며 작업을 지켜볼 때였다.
쨍하게 드리우던 햇볕이 서서히 옅어졌다. 길게 뻗었던 그림자도 흐릿해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가하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연구실 지붕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가 낮게 날면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번쩍 세상이 밝아졌다가 쿠릉, 천둥이 들려왔다.
“방수포치고 좀 지켜봅니다!”
어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큼지막한 천이 거병을 덮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기가 막힌 징크스라니까. 기능점검 하는 날에는 꼭 비가 와요. 하늘이 그렇게 맑았는데 말이야.”
“쉬엄쉬엄하라는 신의 뜻인가 보죠.”
북적거리던 연구실 앞 도로가 금세 한산해졌다. 마지막까지 트레일러 옆을 지키던 올란트가 연구실로 걸어왔다.
“아빠. 오늘은 일 더 못 하는 거예요?”
천에 가려진 거병을 보며 물었다. 더 보고 싶은데… 하늘이 미웠다.
“글쎄. 급한 거였으면 비가 오든 말든 계속했을 테지만, 이번 점검은 여유가 있거든. 더 못 봐서 아쉬워?”
“네. 움직이는 것까지 보고 싶었거든요.”
“기동점검은 내일 예정이라 오늘은 저대로 내버려 둘 거야.”
가하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올란트였다.
“내일도 올 수 있는 거예요?”
거병이 움직이는 건 내일이라고 하니 가능하다면 내일도 연구실에 오고 싶었다. 아빠를 빤히 쳐다봤다. 아빠는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챘다.
“다음에, 다음에 보면 되니까 괜찮아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묵직한 천둥을 흩뿌리던 하늘이 기어이 비를 내렸다. 빗방울이 굵었다. 처마 밖으로 손을 슬며시 내밀었다. 손바닥을 때리는 빗줄기가 꽤 따가웠다.
어둑어둑해진 거리와 눈앞에 놓인 거병. 그리고 비. 가하란은 처마 밑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트레일러를 바라봤다.
실컷 봐둬야 후회하지 않으리라. 천에 가려진 건 아쉽지만 그래도 얼핏 보이는 부분이 있으니까.
“들어가서 쉴래?”
올란트가 물었다.
“아니요. 조금만 더 볼게요. 그래도 되죠?”
차분한 목소리로 그래, 라고 말하는 올란트였다.
“아빠는 처음 거병을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무서웠지. 불안해 보였거든. 저렇게 큰 물건이 엎어지면 난리 날 텐데, 이런 생각을 먼저 했어.”
“전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런데 아빠 말을 듣고 나니까 좀 위험해 보이긴 하네요. 시내에서 움직이다가 넘어지면 정말 큰일 나겠어요.”
“기계적인 안정성은 입증됐어도 그걸 조종하는 건 사람이니까. 거병 기사가 실수해서 사고를 낸 경우도 적지 않아.”
사고란 말이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도 비가 오고 있었다.
루드 여관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건너편서 사두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멈춰서서 마차가 지나가길 기다릴 때였다.
선두에 선 말이 갑자기 앞발을 들며 몸을 비틀었다. 마차와 연결된 축이 한순간 삐거덕대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차가 빗길에 미끄러졌다.
포장된 도로를 긁으며 나아가던 마차는 상가와 부딪치고 나서야 멈췄다.
튕겨 나간 마부의 모습이 잠깐 보였는데, 가하란은 그 순간이 잊히질 않았다.
마차가 넘어져도 대형 사고가 나는데, 거병이 쓰러진다면 주변 일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사고가 안 일어나도록 정말 조심해야겠어요.”
가하란은 거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걸칠 걸 가져올게. 계속 있으면 추워질 수도 있으니까.”
기다리라면서 아빠가 연구실로 들어갔다. 가하란은 연구실 벽에 기댔다.
이상한 일이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게 많아졌다.
멋진 거병을 만들겠다는 꿈이 계속해서 멀어져 간다. 꿈에 도달하려면 몇 개의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 걸까?
가하란은 눈에 힘을 줬다. 어려울수록 성취감은 높아진다고 핀들론 할아버지가 말했다.
멀게만 느껴지지만, 포기하지 않고 길을 걷다 보면 반드시 끝과 마주할 것이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하나씩!
빗소리가 조금 약해졌다. 얼얼한 귀를 매만지고 있을 때였다. 왼쪽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큼지막한 검은 우산 밑으로 군청색 멜빵바지가 보였다. 제철소 쪽 기술공인가?
우산이 점점 다가온다.
가하란은 눈을 크게 떴다. 우산을 쥐고 있는 손에 털이 덥수룩했다. 아니, 손뿐만 아니라 팔도, 바지 아래 나온 다리에도 털이 보였다.
붉은빛이 감도는 검은색과 시릴 정도로 밝은 흰색 털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사람이, 인간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호기심이 치고 올라왔다.
가하란은 점점 가까워지는 우산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윽고 우산의 주인이 앞을 지나갔다.
동글동글하면서도 살짝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늑대였다. 전반적인 인상은 귀엽다는 것이었다. 맹수의 눈매를 가졌지만 눈동자가 선했다.
살짝 돌출된 입과 코. 반질거리는 검은 코가 씰룩거리는 것도 보였다.
후드를 걸치고 있는 탓에 머리 위쪽은 보이지 않지만, 불룩 솟은 모양을 보건대 큰 귀가 있을 것이다.
유단이 한 말이 귀를 스쳐 갔다. 늑대를 닮은 유사 인종에 체구는 대부분 작아.
“아!”
타린족에 이어 다른 문화권을 형성한 종족을 만났다는 것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앞을 지나가던 우산이 우뚝 멈춰 섰다. 이쪽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슬며시 입을 닫았다.
“뭐예요?”
불쾌감이 흠씬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가하란은 처마 밑에서 나왔다. 비가 온몸을 때렸지만 상관없었다.
“죄송해요. 기분 나쁘셨죠?”
칼랑족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린 인간족이 왜 여기에 있죠?”
“견학 왔어요. 이 연구실에 아빠가 있거든요.”
가하란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낸 뒤에 말했다. 빗물이 얼굴 굴곡을 타고 내려와서 자꾸만 입으로 들어간다.
“다른 종족을 만났다는 게 너무 신나고 기뻐서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 냈어요.”
과도한 관심은 불편할 수도 있다는 걸 아빠가 알려주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런 얼빠진 얼굴로 거짓말할 것 같지도 않고.”
가하란은 수줍게 웃었다.
가까이서 본 칼랑족의 털은 신비한 느낌을 줬다. 비가 와서 공기가 눅눅해졌는데도 잘 말린 솜이불처럼 털이 폭신해 보였다.
“왜 그렇게 보죠?”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말해봐요. 인간족이 말하는 ‘솔직’이란 걸 잘 믿지는 않지만.”
가하란은 손바닥을 펴 이마에 붙였다. 빗물이 입 속으로 들어가는 걸 막은 후에 말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털이 푹신해 보여서요. 저랑 같이 사는 툴이라는 개가 있는데, 걔는 비 올 때면 축 가라앉거든요.”
“당연하죠. 개들과 달리 전 관리를 잘하니까요. 적당한 유분이 털을 보호해 주기도 하고.”
건조했던 목소리에 약간이지만 활기가 돌았다. 기분이 상한 건 아닌 듯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는데 빗물이 눈으로 흘러 들어갔다. 눈을 질끈 감으며 손바닥으로 얼굴 주변을 털어낼 때였다.
비가 갑자기 멎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살며시 떴다. 검은 우산이 비를 막아주고 있었다.
“어린 인간족은 체온이 떨어지면 위험하다고 들었어요. 자, 이걸 들어요.”
“아니에요. 연구실로 들어가면….”
거절하려 했으나 우산을 손에 쥐여주는 칼랑족이었다. 복슬복슬한 털이 손에 닿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부드럽다.”
감상이 입 밖으로 불쑥 나갔다. 아차 싶어서 얼른 앞을 보았다.
“면전에서 그렇게 듣는 칭찬은 썩 좋아하지 않아요. 우산은 돌려줄 필요 없어요. 그냥 쓰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돌아서는 칼랑족이었다. 가하란은 우산을 든 채 멀어져 가는 칼랑족을 보았다.
멜빵바지 바깥으로 튀어나온 꼬리가 좌우로 신나게 흔들리고 있었다. 신나서 뛰어가는 툴의 뒷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타챠 아저씨의 꼬리도…….
“웬 우산이야?”
연구실에서 나온 아빠가 말했다. 가하란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잠깐 빌려주셨어요. 그러니 돌려주려 가야 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