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99화 (72/558)

제99화

메인 캐리어. 가하란은 기억을 더듬었다. 아빠와 함께 책을 만들 때 등장한 이름이었다. 거병의 운송장비라고.

“거병이 오는 건가요?”

연구소 출입구 쪽으로 몸을 틀면서 물었다. 요란한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올란트가 인계하고 있을 거다. 얼른 가봐.”

그러고 보니 아빠가 한참 전부터 안 보였다. 가하란은 들뜬 기분으로 걸음을 뗐다.

“형! 빨리 가자.”

느긋하게 걷는 유단에게 손짓한 후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휑한 느낌이 들 정도로 폭이 넓은 도로가 꽉 차 있었다. 가하란은 연구실 사이가 왜 그렇게 멀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거병을 옮기려면 공간적 여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메인 캐리어가 잠시 멈췄다.

가하란은 눈동자를 바삐 움직였다. 먼저 시야에 잡힌 건 바퀴였다.

성인 한 명보다 더 커 보이는 바퀴. 마차의 바퀴처럼 나무로 된 살이 보이진 않았다. 대신 탄력이 느껴지는 검갈색 외피로 싸여 있었다.

뛰어가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지금 다가가면 위험할 것이다. 저만한 바퀴에 깔리면 아픈 거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H-143 진입합니다. 개폐장치 열고 앵커 내려야 하니까 D라인 연구실 출입구 닫으세요! 괜히 먼지 뒤집어쓰고 항의하지 말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를 널리 퍼트리는 마법 같았다.

잠시 멈췄던 메인 캐리어가 다시 움직였다. 작게 보이던 거병의 발바닥이 점점 커졌다.

가하란은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말도 안 되게 컸다. 이렇게 커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아빠와 같이 봤을 때는 그저 멋지다는 느낌이었는데, 가까이서 본 거병은 전신을 짓누르는 압박감 같은 게 있었다.

“발바닥 잘 봐둬라. 움직일 때는 못 보는 곳이니까.”

옆에 선 덴스가 말했다.

“앞부분 보고 와도 될까요?”

“가까이 다가가진 말고. 뛰지도 말고. 조심해서 보고 와.”

“네!”

가하란은 메인 캐리어의 측면을 따라 왼쪽으로 움직였다. 거병의 발목을 지나 종아리, 허벅지, 이윽고 상부에 도달했다.

19미터? 아니면 20미터?

거병의 크기를 대략 짐작해 보았다. 제국군이 사용하는 거병은 보통 전고 20미터 전후라고 들었다.

반듯하게 누운 거병의 외관을 훑다가 메인 캐리어 앞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헤더 트럭이었다. 육면체 조종실 안에서 거병이 실린 트레일러를 움직이는 것이다.

거병도 멋있지만, 헤더 트럭과 트레일러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거병은 아무나 올라탈 수 없지만, 헤더 트럭은 구경할 수 있지 않을까?

“너 뭐야?”

헤더 트럭에서 고개를 내민 남자가 가하란을 보며 말했다. 가하란은 해맑게 웃으며 크게 외쳤다.

“안녕하세요! 전 가하란이라고 해요. 아저씨, 헤더 트럭에 저도 타볼 수 있나요?”

“뭐라고?”

요란한 구동음 때문에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야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뒤로 더 물러나. 앵커 내려야 하니까.”

남자가 손을 휘휘 저었다. 동시에 주변에 있던 어른이 가하란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견학 온 애냐? 보호자는? 근데 연구단지는 오늘 개인 견학이 없었을 텐데.”

덴스와 마찬가지로 군청색 재킷을 입은 여자였다. 매끄럽게 다듬은 눈썹과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왼쪽 귀에 펜을 얹어둔 상태였다.

“아빠랑 같이 왔어요.”

“아빠? 누구?”

“아빠 이름은 올란트예요.”

“올란트?”

여자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살며시 찡그렸다.

“우리 쪽 애야. 허가받고 들어온 거니까 그렇게 눈치 주진 말고.”

덴스였다. 여자가 덴스를 쓱 보더니 아하, 하면서 서두를 뗐다.

“너희 랩에 참여한 젊은 치프가 올란트였지. 뭔가 귀에 익다고 했어.”

여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내리며 가하란을 보았다.

“꼬마야. 씩씩한 건 좋은데 메인 캐리어 옆에서 알짱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야.”

몸이 확 들렸다. 양손으로 가하란을 들어 올린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러면 더 잘 보이지?”

“네, 네!”

당황스러웠지만 잘 보이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근데 너 보기보다 무겁다.”

“힘드시면 내려주세요. 아래에서 볼게요.”

“미래의 공학도가 될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나중에 생각나면 이 은혜를 잊지 말고 우리 랩으로 와. 우린 항상 인력 부족이거든.”

여자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헤더 트럭 쪽에서 다시금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앵커 내립니다!”

목소리가 대기로 흩어지자마자 트레일러 쪽에서 소리가 났다. 지지대가 트레일러 하부 쪽에서 미끄러지듯 나와 지면에 닿았다.

트레일러 중앙에서 나온 앵커는 지면을 지그시 눌렀고, 앞뒤 쪽에서 나온 앵커는 쿵쿵 소리를 냈다.

흙먼지가 짙게 일어났다.

여자가 기침을 쏟아냈다. 절묘한 순간에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이다.

바닥으로 내려온 가하란은 두 손으로 입가를 잠시 막았다.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하필 그때 이쪽으로 불어오냐.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네.”

퉤, 침을 뱉으며 얼굴을 털어내는 여자였다. 가하란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거 쓰세요.”

“너 이런 것도 들고 다녀?”

“아빠가 손수건은 반드시 챙기고 다니라고 해서요.”

“쪼그마한 게 매너는 잘 배웠네. 고맙다, 일단 쓸게.”

여자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 뒤 돌려줬다.

“가하란.”

아빠 목소리였다. 가하란은 뒤를 돌아봤다. 서류 파일을 손에 든 올란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빠! 방금 봤어요? 앵커 내리는 거요.”

“봤지.”

가하란을 보며 웃던 올란트가 시선을 여자 쪽으로 옮겼다.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얘기 들었어요. 덴스의 랩으로 이번에 오신 분이죠?”

“예. 올란트입니다.”

아빠가 손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살짝 비켜서서 두 어른을 바라봤다.

“덴스의 이웃인 벨솔이라고 해요.”

벨솔이 엄지를 세워 어깨 너머에 있는 연구실을 가리켰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벨솔 교수님.”

“덴스한테 들었다면 별로 좋은 소리는 아니었겠네요. 근데 부정하진 않을게요. 나도 썩 좋은 인간은 아니라서요.”

가하란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벨솔의 손이 정수리에 얹어졌다. 손을 살며시 움직이며 툭툭 치는데 괜히 웃음이 나온다.

“애가 똘똘하네요. 어려 보이는데.”

“일찍 철이 들었거든요.”

아빠와 대화를 마친 벨솔이 가하란을 보았다.

“일곱 살 정도 되는 거 같은데, 맞아?”

“네. 맞아요.”

“아빠 따라서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거병에 관심이 많나 보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지? 연구원이 될 거면 우리 랩으로 와라.”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던 벨솔이 뒤를 돌아봤다. 연구실 문이 열리며 젊은 남자가 외쳤다.

“교수님! 액상 근육 반응도가 낮아지는데요?”

“제대로 지켜본 거 맞아?”

“봤으니까 이렇게 보고하죠! 얼른 오세요. 이러다 타입 C까지 버리겠어요. 실패해서 또 비용 청구하면 진짜 저희 랩 문 닫을지도 몰라요.”

“어떻게든 반응 살려봐. 그리고 닫긴 왜 닫아! 내가 국장님 멱살을 틀어쥐어서라도 돈 받아낼 테니까 이어가기나 해.”

씩씩거리며 연구실로 걸어가던 벨솔이 가하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꼬마야. 나중에 시간 나면 놀러와. 덴스네보다 훨씬 재미있는 걸 우리가 연구개발 중이니까.”

“그게 뭔데요?”

“액상 근육! 재미없는 쇳덩이보다야 이쪽이 훨씬 흥미로우니까 꼭 보러 와라.”

벨솔이 귀에 얹어둔 펜을 손에 든 뒤 연구실로 뛰어갔다. 가하란은 펄럭이는 군청색 재킷을 보며 작게 웃었다.

“아빠. 연구하는 사람들은 다 재미있는 거 같아요.”

올란트가 웃으면서 가하란 옆구리에 손을 끼워 넣었다. 목말 탄 가하란은 중심을 잡으며 거병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아빠. 거병이 왜 여기 온 거예요?”

“점검 때문에 온 거야. 곧 기동식이 있을 거거든.”

“올해도 하는 거예요? 축제만 열고 기동식은 안 할 수도 있다고 시장 사람들이 말했거든요.”

“문제가 조금 생겨서 넘어갈 뻔했는데, 다행히 다 해결돼서 하기로 했어.”

가하란은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작년에 본 거병 기동식이 아직도 생생했다. 악단의 웅장한 연주와 함께 중앙 광장을 가로지르던 거병은 한 편의 연극 같았다.

“좌완과 좌족 모듈부터 점검할 겁니다. 오토마타는 탈로스 점검이 끝난 후에 할 거니까 대기해 주시고요.”

멜빵바지를 입은 남자가 크게 외쳤다. 주변에 대기 중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트레일러 위로 올라갔다.

가하란은 설레는 눈으로 그 장면을 지켜봤다.

“아빠. 저도 올라가면 안 돼요?”

“왜 안 되겠어. 대신 얌전히 있어야 해. 다른 분들 방해하면 아빠가 곤란해져.”

“눈동자만 움직일게요! 정말이에요.”

깍지 낀 손을 가슴에 모으며 대답했다. 지면으로 내려온 가하란은 올란트를 따라 트레일러 가까이 걸어갔다.

코앞에 놓인 바퀴에 입이 떡 벌어졌다. 어떻게 이렇게 크게 만들지?

“아빠. 바퀴인데 바큇살이 안 보여요.”

“측면 덮개를 해놔서 안 보이는 거야. 덮개를 벗기면 바큇살이 보이긴 해. 일반적인 마차 바퀴와는 형태가 다르지만.”

“바퀴를 덮고 있는 이건 뭐에요?”

검갈색 외피의 정체가 궁금했다.

“고무나무의 수액으로 만든 외피야. 여러 공정을 거쳐야 해서 까다롭긴 하지만 내구성과 접지력이 좋아서 메인 캐리어 바퀴에 쓰여. 하중을 분산하는 것에도 도움이 되고.”

“만져봐도 돼요?”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살색 외피를 살짝 눌러봤다. 딱딱하면서도 탄성이 느껴졌다. 가하란은 접지력이란 단어를 속으로 되뇌며 바퀴 겉면을 연신 만져댔다.

“아들. 올라가야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빠가 사다리 옆에 있었다. 아빠의 도움을 받아 트레일러 위로 올라갔다.

연구실 출입구가 발밑에 놓였다. 집 앞 담벼락보다 훨씬 높았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이 높이라면 테리 형도 뛰어내리는 걸 주저할 것이다.

“발바닥!”

거대한 벽 같은 거병의 발바닥이 눈앞에 있었다. 주변에 있는 어른들이 잠깐 쳐다봤으나, 금방 눈길을 돌렸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아빠를 보았다. 아빠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다가가도 된다고 말했다.

긴장한 채 거병의 발바닥 앞에 섰다. 두 손을 내밀어 만져봤다.

유사 정령을 만졌을 때와 비슷한 감촉이었다. 반질반질한 쇠처럼 보이지만 질감이 약간 까끌까끌하다.

“발바닥이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안전성과 중심을 잡기 위해선 발의 면적이 커야 하거든. 사람처럼.”

올란트가 신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큰 게 움직이는 거구나. 아빠, 가까이서 보니까 더 신기해요. 어떻게 이 커다란 게 움직이는 걸까요?”

“이론적인 건 어느 정도 알잖아. 나랑 같이 공부하기도 했고.”

“알아도 믿기지 않아서요.”

감탄만 계속 나왔다. 그때 정비사로 보이는 남자가 줄을 타고 거병 발 위로 올라갔다.

아주 잠깐, 발등을 미끄럼틀 삼아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보면 당연히 안 된다고 하겠지?

“미끄럼틀은 안 돼.”

속마음을 들켰다. 가하란이 방긋 웃으며 눈길을 살며시 돌렸다.

“아빠가 연구하는 건 오토마타 쪽이었죠?”

“이제는 그렇게 됐지. 근데 아빠는 다른 쪽도 살펴볼 거다. 해오던 일이 내부기관보다는 골격을 만지는 거였으니까.”

아빠가 일했던 제철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체임버 덮개 열고 있네.”

올란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병의 가슴 덮개가 들리고 있었다. 저 안쪽에 거병 기사만 탑승 가능한 조종실이 설치돼 있을 것이다.

강한 진동이 몸을 덮쳤다. 아빠의 다리를 붙잡으며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이제 내려가자.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니까.”

가하란은 아쉬움을 담아 거병을 바라보다가 트레일러 밑으로 내려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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