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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98화 (71/558)

제98화

대화가 오갈 때마다 모르는 것이 생겨났다.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간 질문들이 하늘을 메워버릴 것 같았다.

조바심이 날 정도였다. 근질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씰룩이는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얼른 묻고 싶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왜 그래?”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가하란은 고개를 돌렸다. 유단이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근데 지금은 물어볼 수가 없잖아.”

친절하게 설명해 주던 덴스가 입을 다물고 검은 의수만 보고 있었다. 방해해서는 안 될 분위기였다.

“마력선 점검은 정말 까다로운 일이거든. 위험할 수도 있고. 네 말대로 지금은 지켜봐야 해.”

유단이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대신 내가 대답해줄게. 나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아는 선에서.”

가하란은 유단을 바라봤다.

꿈은 헛된 망상이고 꿈을 가르치는 어른은 모두 바보라고 말했던 형이지만, 2시간 전쯤에 말이 심했다면서 사과를 해왔다.

가하란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법이니까. 가하란도 화내서 미안하다고 말을 건넸다.

그 뒤로 유단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가하란은 주로 질문을 했고, 유단은 상냥하게 답해주었다.

유단은 아는 게 정말 많았다. 거기다 귀찮아하지 않고 질문을 들어주었다.

테리 형이었다면 금방 질려서 나가자고 했을 텐데, 가하란은 대화를 즐길 줄 아는 유단이 정말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테리가 싫다는 건 아니지만.

“아저씨가 낀 장갑에도 마력선이 그어져 있잖아. 왜 그런 거야?”

“특수한 장갑이라 그래.”

유단이 덴스가 낀 회색 장갑을 바라봤다.

“저건 마력선을 점검할 때 필요한 도구야. ‘마나밀도 감각장갑’이 정식 명칭이지만 보통은 장갑, 혹은 감각기라고 불러. 저걸 끼고 마력선을 만지면 선 하나하나가 품은 의미를 알게 돼.”

가하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밖에 있는 유사 정령을 보았다.

“저기에도 마력선이 있잖아. 아까 만져봤을 때는 아무 느낌 없던데? 약간 따뜻하다는 정도?”

“그래서 저 장갑이 필요하다는 거야. 일반적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마나의 밀도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거든. 마법공학을 연구하는 학자나 엔지니어들한테는 필수품이지. 요리사한테 식칼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야.”

요리사의 칼과 같은 물건. 듣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책만큼이나 갖고 싶은 물건이 하나 생겼다.

“형도 저 장갑 있어?”

“아쉽게도 나는 아직 없어.”

“가게에서 파는 거야? 비싸겠지?”

유단이 작게 웃었다.

“돈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면 어디서 구해?”

“구하는 거야 관리국 내에서 구할 수 있지. 감각장갑을 만드는 전문 장인이 이곳에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한테나 만들어 주지는 않아. 게다가 순번이 정해져 있어서 자격이 된다고 해도 바로 받을 수 없고.”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지만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 같았다. 설명을 듣고 나니 더욱 관심이 생겼다.

유단이 눈웃음 지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너, 칼랑족이라고 들어봤어?”

가하란은 잠시 생각한 뒤 끄덕거렸다. 자세히 아는 건 아니나 들어본 적은 있었다.

“늑대를 닮았다고 들은 것 같아. 아! 마법공학에 관심이 많은 종족이란 것도.”

“잘 알고 있네. 늑대를 닮은 유사 인종이고 체구는 대부분 작아. 인간보다 뛰어난 감각으로 마나를 느끼며, 그걸 토대로 마법공학의 발전을 이뤄냈지. 보편화된 마법공학품은 대부분 칼랑족의 손길이 닿아 있어. 거병도 마찬가지고.”

마법공학의 엘리트들이지, 유단은 그 문장으로 칼랑족의 설명을 마쳤다.

“만나 보고 싶다. 장갑 만드는 것도 견학하고 싶고.”

실제로 본 타린족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강인했다. 칼랑족은 어떨까. 궁금증을 풀기 위한 대화였는데, 이번에도 호기심만 부풀어 간다.

“그분을 보러 가는 거야 어렵지 않지. 바로 옆이니까. 나도 한번 가본 적이 있어. 하지만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운이 좋아야 해.”

“왜?”

“기분파거든. 공방의 문이 닫혀 있으면 그대로 끝. 견학도 힘들어. 열려 있다면 들어가서 살짝 보는 것 정도는 가능해. 비 오는 날은 아주 높은 확률로 열려 있을 테니까 그때를 노려봐.”

유단이 작게 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장갑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이 정도야. 나머지 것들도 설명해주고 싶은데, 나도 모르는 게 많네. 미안해.”

“아니야, 형. 새로운 걸 알게 돼서 난 기뻐. 형은 진짜 똑똑한 거 같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아?”

“잡다한 지식일 뿐이야. 진짜 중요한 건 내 머릿속에 든 정보를 융합해서 저렇게 결과물을 내는 거지.”

저기 봐, 유단이 미소 지으며 덴스 쪽을 가리켰다.

“와아.”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가하란은 검은 의수 주변에 나타난 무수히 많은 선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뜬 푸른 선들이 덴스의 손짓에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촘촘히 엮인 선들이 한순간 풀어졌다가, 다시 뭉쳤다.

“저게 ‘시그니처’야.”

“시그니처?”

복잡한 선들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름다웠다. 난해함 속에서 질서가 느껴졌다.

가하란은 유단을 보았다. 유단의 망막에도 푸른빛이 넘실거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마법의 개수가 몇 개인지 알아?”

“아빠한테 들었어. 마법은 마법사의 수와 같다고.”

“그래. 마법은 지극히 개별적이고 개성적이며, 다루는 주체에 따라서 성질이 변해. 이건 모든 마법에 해당하는 정론이야. 마법공학을 다루는 연구자들도 이 정론에서 벗어나지 않아.”

선들이 펼쳐진다. 의수 주변에서 머물던 푸른 선이 영역을 점차 넓혀갔다.

가하란은 몸쪽으로 다가오는 푸른 선을 바라보았다. 선이 천천히 몸을 통과해 지나갔다.

두 손으로 선이 지나간 곳을 더듬었다.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방금 몸을 뚫고 지나간 선이 보였다.

“시그니처는 공학자들마다 다 달라. 어떤 분은 노래로서 마력선을 조율하고, 또 어떤 분은 필기구를 사용해 마력선을 이동시켜. 피아노 치듯 다루는 사람도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선을 다스리는 연구원도 있지.”

덴스가 왼손을 살며시 들었다. 주변으로 뻗어 나간 선들이 왼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물론 마법사들이 쓰는 마법과는 다른 면이 있어. 심상세계를 스크롤로 만드는 과정이 생략된 거니까. 근데 이것까지 설명하려면 너무 복잡하고, 나도 이해 못 한 부분이 있어서.”

“그러니까 노하우 같은 거네? 다른 사람은 모르는, 내가 터득해낸 방법.”

“그렇게도 볼 수 있지.”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 빨리 배우고 싶다.”

“차근차근 배워나가. 서두를 필요 없어.”

정렬된 선들이 한 점으로 모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없어지는 순간 연둣빛 증기가 잠깐 보였다.

“방금 봤어? 연두색으로 빛나는 마나를.”

“그게 마나야?”

“교수님이 말한 마나 기화야. 눈에 보이는 마나는 위험한 거라서 함부로 접근하면 안 돼. 그래서 교수님도 우리보고 뒤로 물러서라 한 거고.”

“아까 그 선들은?”

“그건 마나가 가시화한 게 아니라 괜찮아. 교수님의 시그니처가 우리 눈에 보였을 뿐이니까. 만약에 눈에 보이는 마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무조건 거리를 둬야 해. 휘말리면 큰일 나니까.”

이 얘기는 이전에 밀레나를 통해서도 들었다. 뿌리에서 올라온 밀도 높은 마나는 정말 위험하다고.

“이제 와도 된다.”

덴스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책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검은 의수를 보았다.

“한쪽씩 착용해 봐라.”

가하란은 왼쪽을, 유단은 오른쪽 장갑을 넘겨받았다.

“손가락을 펴면 안 들어갈 테니까 반쯤 오므린 상태로 넣어봐.”

덴스의 설명을 들으며 손을 움직였다. 장갑에 손을 밀어 넣는 순간 기이한 감각이 손 전체를 뒤덮었다.

마치 진흙 속에 손을 찔러넣은 기분이었다.

“점도가 느껴질 텐데 조금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다.”

덴스 말대로 시간이 지나자 손을 휘감던 점성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손이 커진 거 같아요!”

오른손으로 검은 의수의 표면을 만져봤다. 왼손 손등이 간지러웠다. 실제 피부를 만지는 것보다는 강도가 덜하지만, 왼손을 만지고 있다는 감각이 명확하게 전해졌다.

“신경 활성화가 잘된 것 같구나.”

덴스가 다가와 뾰족한 펜촉으로 의수를 콕콕 찍었다.

“많이 따갑니?”

“엄청 따갑지는 않아요. 맨살에 했으면 되게 아팠을 것 같은데.”

“사실 이것도 신경감도를 꽤 올려둔 편이다. 손으로 섬세한 동작을 수행하려면 감도가 무뎌서는 안 되니까.”

“아저씨. 거병 기사들은 이런 느낌을 받는 건가요?”

덴스가 음, 소리를 내면서 입을 오므렸다.

“경우에 따라 다르기는 한데, 이것보다는 좀 더 낮은 감도로 설정하지.”

“제 몸처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으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물론 좋기야 하겠지. 음, 설명보다는 역시 경험해보는 게 빠르지.”

덴스가 벽면에 걸려 있는 송곳을 가져왔다.

“무서울 수도 있는데, 괜찮겠니?”

“괜찮아요!”

“그럼 잘 보고 있어라.”

송곳의 뾰족한 끝이 검은 의수를 향했다. 그걸 본 순간 괜히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긴장이 된다.

“시각 정보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친단다. 거기에 약간의 촉감이 더해지면 몸은 과한 반응을 일으키지.”

송곳이 검은 의수에 닿았다. 살짝 따가운 정도였는데, 이상하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덴스가 송곳을 서서히 비틀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감각이 더욱 선명해졌다.

아픈 건 아니었다. 툴한테 물렸을 때를 생각하면 이건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그런데 점점 식은땀이 났다. 송곳이 금방이라도 의수를 뚫고, 진짜 살에 상처를 낼 것 같았다.

“그만해야겠구나.”

송곳이 떨어졌다.

가하란은 그제야 깨달았다. 숨 쉬는 걸 잊을 정도로 긴장했다는 걸.

목에 걸리는 숨을 토해내고 오른손으로 의수를 매만졌다. 괴상한 경험이었다.

쇠로 보호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통증도 크지 않았는데 두려움에 몸이 얼어버렸다.

“감도를 높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라면 예상할 수 있을 거다.”

가하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도가 높아지면 다양한 문제가 생길 것이다.

“유단도 오랜만에 체험해볼래?”

“아니요. 전 어떤 느낌인지 아니까 이번엔 안 할래요.”

유단이 빙긋 웃으며 거절했다.

“거병의 내부를 만든다는 건 이런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간다는 뜻이다. 너도 올란트를 따라 이 길을 걷게 된다면 생각할 거리가 많아질 거야.”

덴스가 검은 의수를 도로 가져갔다. 가하란은 의수를 끼고 있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상처는 없었다.

“거병 기사들은 정말 대단해요. 저라면 무서워서 못 움직일 거예요.”

“대단하지. 육체도 정신도 극한까지 단련해야지만 거병에 올라탈 수 있으니까. 우린 그런 기사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고.”

안전을 책임진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정말 멋있는 말이었다.

언젠가는 덴스 아저씨처럼 멋진 연구자가 될 수 있을까?

왼손에 남아 있는 희미한 통증을 느끼며 미래를 꿈꿀 때였다.

드드드드,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요란한 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시간이 됐구나.”

“시간이요?”

덴스가 안경을 다시 쓰면서 일어섰다.

“둘 다 나가봐라. 메인 캐리어가 오고 있을 테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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