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97화 (70/558)

제97화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유렐은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서른 초반에 랩을 맡아 교수가 된 덴스와 세나티아 가 총집사의 손자 올란트.

이전 사건으로 앙금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나, 그런 건 사소한 문제였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걸 저들도 잘 알 테니까.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다니. 인연인가 봅니다.”

유렐은 올란트를 보며 말했다.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죠, 유렐 취조부장님.”

“딱딱하게 직함까지 붙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편안하게 유렐이라 불러주시죠.”

“직함이 편합니다.”

“뭐, 그게 편하시다면야.”

유렐은 덴스에게도 인사말을 건넨 후 상자를 내밀었다.

“브라인 특무대령께서 교수님께 전해달라고 부탁한 물건입니다.”

덴스가 상자 안을 살폈다.

“의수군요. 잘 전달받았습니다. 점검 후에 제가 특무대령님께 돌려보내도록 하죠.”

유렐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군모를 벗었다.

“두 분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금일을 기점으로 모듈 탈취건이 종결됐습니다.”

“다행이군요. 언제쯤 마무리되나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차후에 두 분께서 군부로 소환되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죠. 설령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제 선에서 잘 마무리 짓겠습니다. 일이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두 분께 불편을 끼쳤으니.”

한때는 용의자들이었으나 사건이 종결된 지금 두 사람은 척져서는 안 될 인물들이었다. 적당히 숙이고 들어가는 거야 하루 이틀 해본 것도 아니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군무를 보다 보면 피치 못할 일이란 게 생기죠. 마음에 담아둔 것은 없으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덴스가 말했다. 올란트 역시 비슷한 뉘앙스로 괜찮다는 말을 전해왔다.

“다음에 언제 한번 별관으로 찾아오시죠. 제가 식사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인맥이란 건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거창한 약속보다 밥 한 끼가 결정적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조만간 찾아가겠습니다.”

덴스가 안경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비즈니스적 대화를 끝냈으니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갈 때였다. 군모를 눌러 쓰고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견학 온 아이들인가 보군요.”

연구실 안쪽에 두 사내아이가 있었다. 슬쩍 덴스와 올란트의 표정을 살폈다. 두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많은 걸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올란트에게 딱 저만한 자식이 있다고 했지.

“올란트 씨의 자제분입니까?”

“예. 키가 작은 쪽이 제 아들입니다.”

“그 옆에 있는 아이는….”

말끝을 흐리자 덴스가 대답했다.

“제 제자입니다. 스타쥬이고 정식으로 보안등급 부여받았으니 염려마시죠.”

유렐은 손을 내저었다.

“제가 종종 이런 오해를 사곤 합니다. 전 그냥 아이들이 귀여워서 물어봤을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세 남매의 아빠로서 저만한 아이들을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진심 반, 겉치레 반이 담긴 말이었다.

“제가 예민하게 굴었군요.”

멋쩍게 웃는 덴스였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해요. 제 업무를 생각하면 오해하는 게 당연합니다.”

유렐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들한테 인사해도 될까요?”

“그러시죠.”

유렐은 연구실로 들어가 아이들한테 걸어갔다. 눈도장 정도는 찍어둘 만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마력선이라는 게 ‘닫힌 마나’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

“그러면 여기 그어져 있는 게 전부 마력선이야?”

두 아이의 대화가 들려왔다. 유렐은 작게 헛기침해서 시선을 끌어당겼다.

멀뚱히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반갑구나. 난 유렐이라고 한단다. 너희들의 보호자들과 사소한 친분이 있지.”

손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덴스와 올란트를 가리켰다. 먼저 인사한 건 올란트의 아들 쪽이었다.

“안녕하세요. 전 가하란이에요.”

“아빠를 닮아서 아주 잘생겼구나.”

가볍게 악수하고 덴스의 제자 쪽을 보았다.

“유단입니다. 덴스 교수님의 제자로 이곳에서 배우게 됐습니다.”

“유능한 교수님께서 제자로 들일 정도면 미래가 기대되는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렐은 눈웃음 지으면서 두 아이의 시선을 살폈다. 가하란은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는 반면, 유단의 눈동자는 어깨 쪽을 향해 있었다.

견장을 살피는 것 같았다.

“군부에서 오신 건가요?”

유단이 물었다.

“그렇단다.”

군부란 말에 가하란이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저씨. 루카 아저씨를 아세요?”

“루카?”

떠오르는 이름이 몇 개 있었다. 흔한 이름이라 군부 내에서도 같은 이름의 군인이 몇 명 있었다.

“아빠 친구예요. 아저씨하고 같은 군복을 입었는데 이쪽에 달린 문양이 달랐어요. 루카 아저씨는 동그라미가 두 개였어요.”

가하란의 손가락이 유렐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아빠 친구라는 말에 누군지 단번에 알아챘다.

“이등중사 루카를 말하는 거구나. 나도 그 친구는 알고 있단다.”

“정말요?”

“그럼. 이런 저런 일로 얼굴을 자주 봤지.”

“아저씨도 루카 아저씨랑 친구인 건가요?”

그때 유단이 가하란을 툭 치면서 말했다.

“앞에 계신 분의 계급이 더 높아. 대령이시잖아.”

가하란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유단이 한 걸음 다가왔다.

“제국을 위해 힘써주시는 분을 만나서 너무나 기뻐요. 저도 군인이 돼보고 싶었거든요.”

“그랬구나.”

말투나 행동으로 보아 기초 교육을 제대로 받은 아이였다. 귀족의 핏줄인 건가?

소개할 때 가문명을 밝히지 않았으니 둔 상류층의 자식일 수도 있었다.

“제국군을 보면 언제나 설레요. 멋진 분들이니까요.”

환하게 웃음 짓는 유단이었다.

유렐은 그 웃음을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린놈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상적으로 다듬어진 가식. 순진무구함을 앞세워 호감을 사려 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한 미세한 균열이 엿보였다.

아마 주변인들은 이 아이의 가면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잘 꾸며낸 가면이니까.

유렐은 뒷짐을 지고 유단한테 다가갔다. 상체를 낮추고 유단만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아주 잘하고 있다만, 오히려 너무 완벽하기에 틈이 보이는구나. 사람은 인형이 아니다. 꾸며내려면 좀 더 자연스럽게 해야지.”

팔뚝을 툭툭 쳐준 다음 물러섰다.

밝게 웃던 유단의 얼굴이 한순간 굳었으나, 이내 느슨해진 표정으로 돌아왔다.

유렐은 작게 감탄했다. 금방 배우는 아이였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진심으로 존경해요.”

“그것도 거짓말이구나.”

“아니에요. 전 정말 대령님을 존경해요. 오늘 일 꼭 기억해 뒀다가 보답할게요.”

“보답이랄 것까지야. 약간의 팁을 줬을 뿐이다. 내가 하는 일이 사람 밑바닥을 훑는 거거든.”

저 얼굴로 덴스를 구워삶은 건가. 아니면 다른 사연이 있는 건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제지간에 끼어들어 괜한 말을 했다가는 눈치를 살 테니까.

“학문이 질리면 나중에 날 찾아와라. 그런 재능도 써먹을 곳이 있으니.”

유렐은 가하란 쪽을 바라보았다.

겉면만 보면 유단과 가하란, 두 아이는 닮아 있었다. 밝고 순진하고 호기심에 차 있고.

하지만 한 꺼풀 벗겨내면 전혀 다른 기질이 드러날 것이다. 한쪽은 겉과 속이 같고, 다른 한쪽은 심각할 정도로 다를 테지.

유렐은 유단이란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밑바닥에서 놀 인간상이 아니었다. 거짓으로 탑을 쌓고 주변을 잡아먹으며 꼭대기로 올라갈 부류다.

디온 사령관. 그래, 그 양반하고 닮았군.

가하란의 이름은 망각 저편으로 날려 보냈다. 저런 애들이야 흔하디흔하니까. 세상은 선인보다 악인에게 관대한 법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보자.”

유렐은 두 아이에게 눈인사한 다음 몸을 돌렸다.

* * *

“특수한 의수란다.”

가하란은 발꿈치를 들었다. 책상에 올려진 상자 안쪽을 보고 싶었다.

덴스가 웃으면서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새카만 의수가 눈에 들어왔다. 구조는 사람의 손을 닮았지만, 손가락 끝이 뾰족했다. 맹수의 발톱처럼.

“일반적인 의수는 그 형태만 복원해서 달아놓은 거다. 나무를 깎아서 만드는 게 대부분이지. 쇠를 주조해 만든 의수도 있다만 무거워서 잘 쓰이지 않아.”

가하란은 덴스의 설명을 귀담아들었다. 아빠 일을 도우며 배운 것들이지만,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니 놓칠 수 없었다.

“형태만 딴 의수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이 약간의 기계장치가 들어간 의수다. 간단한 조작으로 몇 가지 동작을 수행할 수 있지. 하지만 크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덴스가 검은 의수를 들어 보였다.

“이건 장갑의 형태를 한 의수다. 딱 한 분을 위해 제작된 것이지.”

의수를 넘겨받은 유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벼워. 엄청 가벼워.”

“형, 나도.”

가하란이 의수를 넘겨받았다. 덴스 말대로 절단부에 연결하는 의수가 아니라 장갑 형태였다. 손을 밀어 넣어 끼는 형식.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사람을 위해 만든 걸까?

생각도 잠시, 놀라울 정도로 가벼운 의수에 우와, 하고 감탄이 나왔다.

질감은 분명 쇠였다. 단단하고 튼튼한. 그런데 바짝 말린 나무처럼 가벼웠다.

“그 의수는 기계장치가 달린 의수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다. 뭔지 알겠니?”

가하란은 얼른 대답했다.

“신경을 연결한 의수요.”

“알고 있구나.”

“아빠가 알려줬어요. 근데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에요. 되게 귀한 거라고 배웠거든요.”

“기성품이 될 수 없는 물건이니까. 게다가 그 의수는 좀 더 특별하단다.”

“어떤 점이요?”

“거병의 손 모듈을 작게 축소시킨 버전이다. 세부 구조로 들어가면 다르긴 하지만 큰 틀은 같지.”

거병의 손.

가하란은 의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병의 손을 작게 만들면 이렇게 된다고?

“어차피 점검도 해봐야 하니 너희들이 한 번씩 사용해 보는 게 좋겠구나.”

유단이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걸 써 볼 수 있는 건가요?”

“실사용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당연히 테스트를 해봐야지. 물론 손의 구조가 우리와는 달라서 약간 이질감이 느껴질 거다.”

손 모양이 다르단 말에 의수 안쪽을 들여다봤다. 덴스의 말대로 장갑 안쪽 형태가 사람 손과는 조금 달랐다.

“손이 불편한 분들을 위해 만든 게 아닌가요?”

가하란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인간족이 쓰라고 만든 물건이 아니란다.”

인간족이란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이 쓰는 게 아니라면 대체 누가….

덴스가 손을 내밀었다. 궁금증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의수를 건네주고 덴스 옆에 바짝 붙었다.

“잠금장치를 풀면 이렇게 반으로 분리되지.”

의수가 상부와 하부로 나뉘었다. 좀 더 자세히 안쪽을 살필 수 있었다.

유사 정령과 마찬가지로 셀 수 없이 많은 마력선이 보였다.

“이 얇은 관은 뭔가요?”

유단이 의수 안쪽을 가리켰다. 회색 관이 마력선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하란은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살결 밑에 있는 보랏빛 혈관. 회색 관은 혈관을 닮아 있었다.

“거병 모듈 축소판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이게 뭘까?”

가하란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액상 근육이 흐르는 통로요!”

“잘 배웠구나. 신경을 잇는 4세대 의수는 액상 근육이 필요하단다. 그렇기에 정비가 까다롭고 유지보수도 힘들지. 그래서 이런 의수는 아무나 사용할 수 없고.”

덴스가 재킷에서 장갑을 꺼냈다. 마력선이 새겨진 장갑이었다.

“잠깐 물러서 있어라. 점검할 때 마나 기화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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