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교수님. 그동안 철없이 굴어서 죄송해요.”
유단이 잔을 양손으로 쥐며 말했다. 덴스는 말을 아끼며 유단 맞은편에 앉았다.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 머릿속에 부모님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어요. 어딜 가든 절 따라다녔죠. 마치 절 질책하는 것 같았어요. 부모가 죽었는데 뻔뻔하게 살아 있다고.”
“너에게 그런 말을 할 사람들이 아니다.”
덴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맞아요. 그러실 분들이 아니죠. 근데 전 한심하게도 그 상냥한 목소리를 두려워했어요. 절 그렇게나 사랑해 주셨는데, 절 위해 모든 걸 해주셨는데….”
잠시 눈을 감으며 울음을 꾹 참아내는 유단이었다.
덴스는 제자의 표정을 보며 안심했다. 자기 자신을 비난하며 신경질만 내던 아이가 드디어 진실한 감정과 마주한 것이다.
엇나간 감정이 응어리져 곪는 것보다야 이렇게 터트리는 게 나았다.
“죄송해요.”
“아니다. 울고 싶을 땐 울어야지. 사람은 다 그런 거니까.”
눈가를 쓱쓱 문지른 유단이 이내 말갛게 미소 지었다.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덴스도 마주 보며 웃었다.
“가하란. 그 애가 저한테 꿈에 대해 말해줬어요.”
“꿈?”
“네. 처음에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화가 났어요. 아시겠지만, 아버지께서 매번 하시던 말씀이 꿈이었으니까요.”
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는 꿈이란 단어를 자주 입에 올렸다. 어릴 땐 몽상가라 놀림받았지만, 아잔탄스 가와 관계를 맺고 난 후에는 누구도 그의 꿈을 비웃지 않았다.
추상적인 꿈을 견고하게 다듬어 현실로 이뤄내는 착실한 친구였다.
유단에게도 꿈은 특별한 단어였을 것이다.
“화가 나서 가하란한테 몹쓸 말을 했어요. 꿈은 시시한 거라고. 그런 거에 의지하고 살아가면 반드시 실패할 거라고. 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어머니를 미워하고 있었어요. 사실을 외면해 버리고 책임을 전가해 버린 거예요.”
“그럴 수 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유단은 최악의 형태로 세상에 던져졌다. 모든 걸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
도피를 선택해 정신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정도였다.
“가하란은 제가 한 말을 듣고도 화내지 않았어요. 아니, 화를 내긴 했는데 굉장히 침착했어요.”
유단이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가하란이 그러더라고요. 남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거기에 덧붙여 제 처지를 모르니 의도를 알 수 없고, 의도를 알 수 없으니 함부로 이해하지 않겠다고요. 하하, 저보다 어린데 저보다 훨씬 어른이에요.”
짧은 대화만으로도 가하란의 마음 씀씀이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깊고 따스하다. 올란트의 자식 자랑은 과장된 게 아닌 듯싶다.
“울컥하더라고요. 화가 더 나는데 마땅히 할 말이 없고. 입 다물고 있으니까 가하란이 절 보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제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다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반드시 보여 주겠다고.”
…꿈은 하찮은 게 아니라고.
목이 잠기는지 마지막 문장을 힘겹게 말하는 유단이었다. 유단이 물을 마신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 오랜만에 제대로 생각해봤어요. 머릿속에서 맴도는 부모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요. 그러니 알겠더라고요. 제가 얼마나 한심했는지, 그리고 부모님이 절 얼마나 아껴 주셨는지. 당연한 사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게 너무 부끄러워요.”
유단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덴스는 아, 작고 작게 탄성을 냈다. 그 눈빛이었다. 유단을 처음 봤을 때 봤던 그 순수했던 눈.
“교수님. 이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 다 알았거든요. 못난 제 모습도 받아들일 거고, 아버지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길 거예요. 전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뒤따라갈 거고, 언젠가는 아버지께서 가보지 못한 곳에 족적을 남길 거예요. 그게 제 꿈이에요.”
유단이 천천히 일어섰다.
“열심히 배울게요. 다양한 세계를 보고 싶어요. 막연한 꿈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눈동자에 흔들림이 없었다. 몇 개월간 지속된 방황이 이제야 끝난 것이다.
덴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네 아버지는 아잔탄스의 도움을 받아 성도 거병관리국으로 갔지. 너 역시 거병 연구에 관심이 있는 거냐?”
“네. 목표가 막연하긴 하지만 우선은 교수님 밑에서 거병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을 배우려고요.”
“스타쥬로서 제대로 학문을 쌓아 보겠다는 거군.”
유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안심했다. 너에게 스타쥬를 제안했지만, 지식이란 게 남이 강요한다고 해서 쌓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유단은 재능이 있었다. 어릴 때 몇 번 보고 짧게 대화한 것이 전부지만, 그것만으로도 지혜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지난 몇 개월간의 가르침을 통해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다. 유단은 영리함을 뛰어넘는, 한 단계 높은 사고 영역을 갖춘 아이였다.
“하나씩 해보자. 내가 이끌어주마.”
“감사합니다.”
“정식으로 얘기가 끝났으니 이제 거처도 옮겨야 한다. 관리국 내 숙소가 아닌 우리 집으로 들어와라.”
“그래도 될까요? 제가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돼요.”
“스타쥬 안에는 가족이란 의미도 포함돼 있다. 유단, 낯설겠지만 이제부터 넌 우리 식구란다.”
덴스는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증명패와 함께 넣어둔 사진을 뽑아내 유단에게 보여줬다.
“내 딸이다. 귀엽지?”
“네. 교수님을 닮은 것 같아요.”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딱 하나야. 얘랑 잘 놀아줘.”
유단이 작게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만 가볼게요. 올란트 치프님께도 전할 말이 있어서요.”
“가하란에 대한 거?”
“네. 다 말씀드리고 용서를 구하고 싶어요.”
“너무 거창해. 부대끼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건데.”
“아니에요.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제가 가하란의 신념을 부정해 버렸으니까요.”
“네 마음이 그렇다면 사과하는 게 맞겠지.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올란트, 속 좁은 놈 아니니까. 아마 호쾌하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해줄 거다.”
유단이 돌아서면서 방을 나서려 했다. 덴스는 나지막하게 유단의 이름을 불렀다.
“예, 교수님.”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했지?”
“네.”
“지금은 어떠냐?”
유단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슬픔이 담겨 있는 눈이었다.
“서서히 옅어지고 있어요.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겠죠. 후회돼요. 두 분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을 때 더 집중해서 들을 걸 그랬어요.”
“자식이 성장하면 부모는 점점 말이 없어진다고 하지. 그 두 사람은 먼 곳에서 널 지켜보고 있을 거다. 아주 자랑스러워하면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유단이 문을 닫고 나갔다.
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보았다. 유사 정령 옆에 서 있는 올란트에게 유단이 다가가고 있었다.
계기가 있으면 사람은 성장하기 마련이었다. 그건 나이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유단은 열 살의 나이에 그릇을 다듬고 성장시켰다. 금방 한 명의 어른으로서 자리를 잡을 것이다.
먼저 간 친구가 이 모습을 봤다면 얼마나 뿌듯해했을까.
“네 아들은 아주 멋진 인간이 될 거다. 천국에서 잘 지켜보고 있어라.”
덴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리운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 * *
연구실 밖에서 바람을 쐬고 있을 때였다. 뒤따라 나온 덴스가 곁에 서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올란트는 덴스를 보며 말했다.
“담배 끊으셨잖아요.”
“이상하게 기분 좋은 날에는 이걸 찾게 되더라고. 남들은 우울할 때 피우던데.”
“그러다 기분 상관없이 입에 달고 살게 될 겁니다.”
“그때 가서 다시 금연하지 뭐.”
덴스가 담배를 입에 물고 한 뼘 길이의 쇠막대기를 꺼냈다.
“그게 기술부에서 만들었다는 라이터군요.”
“봐볼래?”
덴스가 넘겨준 라이터를 손에 들었다. 얇은 쇠 안쪽에 마력선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다른 용도로 개발이 진행되다가 엎어져서 그게 나왔다고 하네. 애연가들의 필수품이 되겠어.”
“마나를 감각한 사람만 쓸 수 있는 물건이니 필수품이 되려면 갈 길이 머네요.”
올란트는 라이터를 돌려줬다.
“기술이 발전하다 보면 마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도 이런 걸 쓰게 될 날이 오겠지.”
“그런 날이 오긴 올까요?”
덴스가 담뱃재를 툭 털며 말했다.
“공학도로서의 바람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기술이 그런 단계까지 진보한다고 해도 모두가 누릴 순 없겠지. 마법공학품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시민들. 윗분들이 바라는 세계는 절대 아닐 거야.”
올란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기술은 권력이었다. 권력이 확산되는 걸 기득권이 반길 리 없었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술을 풀겠지만, 그마저도 상당히 제한적일 것이다.
“제국 연구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획기적인 발견이 이뤄진다면 또 모르지. 누가 알아? 레거시를 현대 인류가 만들어 낼지도.”
“듣기만 해도 설레네요. 만들어진 레거시라.”
“세상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당장 내일 아침에 해가 안 뜰 수도 있어. 지난 몇백, 몇천 년간 이어져 왔다고 해서 그게 당연한 건 아닐 테니까.”
“그 말대로라면 하루아침에 세상이 망할 수도 있겠네요.”
“누가 그러더라. 연합왕국과 제국 남부 국경지대에 있는 거대한 산이 폭발하면 하루아침에 인류사가 끝날 수도 있다고.”
“그런 것도 연구하고 있나요?”
“전쟁이 끝났잖아. 잉여 자원이 많아지면 쓸데없는 거에 집중하기 마련이야. 뭐, 남말할 처지는 아니지. 우리 연구도 삐끗하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판이니까.”
덴스가 반쯤 태운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껐다.
“맞다. 유단하고 얘기 나눴어?”
유단. 쭈뼛거리며 다가온 그 아이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예. 아주 착실하던데요? 그런 일로 사과하러 오고.”
“인성이 된 거지. 애가 불안정했는데, 가하란의 말이 계기가 돼서 중심을 잡은 거 같아. 부쩍 어른이 됐어.”
“유단 같은 애를 보면 세월이란 게 허상 같아요.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철이 드는 것도 아니고, 어리다고 해서 미숙한 것도 아니고.”
“사람이란 게 그렇게 생겨 먹은 거지. 주름이 늘어난 만큼 성숙해진다면 세상은 현인들로 가득 찼을 거다.”
연구실 안쪽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안쪽을 보니 유사 정령 곁에서 신나게 떠드는 유단과 가하란이 보였다.
다른 연구원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죽이 잘 맞나 보네요.”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또래 사이에서만 형성되는 공감대라는 게 있으니까.”
“유단은 계속 연구실에 나오는 거죠?”
덴스를 보며 물었다.
“스타쥬 자체가 무한책임을 지는 게 조건이니까. 보안등급 심사도 끝났고, 다음 주부턴 정식으로 이쪽 소속이 돼.”
“선배님께서 이것저것 많이 알려줘야겠네요.”
“가르쳐야지. 근데 은근슬쩍 발을 빼려는 눈치다. 너도 선생 노릇 해야 해.”
“제가 누굴 가르칠 수준인가요.”
“치프씩이나 달아놓고 무슨 소리야. 오토마타 계열이라면 몰라도, 탈로스 쪽은 네가 나보다 훨씬 낫잖아. 거병의 전반적인 걸 가르쳐야 하니 너도 좀 도와.”
올란트는 작게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네 아들은 어떻게 할 거냐?”
“치프 권한으로 견학 일정을 늘리거나, 아니면 수습생 신분으로 참여 가능한지 알아보려고요.”
“멧시언 소장님께서 아마 도와주실 거야. 절차는 까다롭지 않으니까.”
올란트는 연구원들을 보며 물었다.
“근데 다른 분들은 괜찮을까요. 방해된다고 생각한다면 좀 망설여지는데.”
“자기 할 일 바쁜 친구들이야. 그리고 저 애들이 여기서 뛰어노는 것도 아니고.”
도중에 말을 멈춘 덴스가 왼쪽을 바라보았다. 연구단지로 들어오는 입구 쪽이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여기로 오는 거 같은데?”
멀리서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덴스가 말했다.
“그러게요. 저 사람이 여긴 왜….”
상자를 든 유렐 취조부장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