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친하게 지내라는 말은 안 할게. 네 말대로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사이니까. 근데 사람 인연이란 게 알다가도 모르는 거라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수도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요. 다 이해해요. 방금 제 행동이 유치했다는 것도 알고요.”
유단은 옆에서 같이 걸어주는 비일을 바라봤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어요. 그렇잖아요?”
꿈.
그런 미적지근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속이 뒤집혔다.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아들아. 비록 이루지 못할 꿈이라도 그 꿈을 품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 된단다.
유단은 잠시 귀를 막았다 뗐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날’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되살아났다.
지긋지긋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지울 수만 있다면 양쪽 귀를 기꺼이 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고막이 아닌 심장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듣기 싫은 음성을 치워 버리려면 결국 죽어야 한다.
“괜찮아?”
비일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유단은 비일의 손을 떼어냈다.
“괜찮지 않아요. 알잖아요? 알면서 왜 그렇게 묻는 거죠?”
“그야 난 네가 아니니까. 내가 네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질문할 필요도 없겠지. 근데 난 마법사가 아니잖아? 그러니 물어보는 수밖에.”
“쓸데없는 참견이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비일이 빙긋 웃었다. 유단은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사람과 말을 섞으면 항상 지는 기분이 든다.
어수룩해 보이는데 대화를 이어나가면 논지에 균열이 생긴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지극히 감성적인 말만 늘어놓는데 그 말에 휘둘리는 내가 한심할 뿐이다.
“유단. 힘들 땐 화내고 울고 성질내는 것도 좋아. 아니면 바보처럼 웃는 것도 좋고.”
유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애가 아니에요.”
“열 살이면 성인 취급하는 동네가 있다곤 하지만, 내 눈에는 아직 어려. 물론 어리다고 무시하는 건 아니야. 단지, 그 나이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게 있다는 거야. 나처럼 스무 살 넘어 봐. 엉엉 우는 것도 눈치 보여.”
비일이 유단의 등을 두 손으로 밀었다.
“자. 일단 휴게실로 돌아가자. 가하란 혼자 외로울 거야.”
“알겠어요. 그러니까 밀지 마요!”
“재미있지 않아? 나 때는 다 이러고 놀았어.”
힘에 밀려서 엉거주춤 걷다가 결국 뛰게 됐다. 짧은 거리였지만 전속력으로 뛰었고, 휴게실 앞에 도착할 즘에는 숨이 껄떡거렸다.
“잘 뛰네.”
비일이 말했다.
후우, 유단은 숨을 고른 다음 허리를 폈다. 신물이 넘실대던 속이 가라앉았다. 귓가에 머물던 아버지의 음성도 사라졌다.
“…고맙습니다.”
하기 싫은 말이었지만 끝내 하고 말았다.
유단은 비일을 슬쩍 보았다. 바보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래서 말하기 싫었다.
“그래. 고맙다고 말해줘서 오히려 내가 고마워. 자, 안에 들어가자. 가하란하고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지.”
“어색하지 않아요. 걔가 삐쳐 있겠지만 전 아무렇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도 않을걸?”
비일이 문을 열었다. 유단은 못마땅한 얼굴을 유지한 채 휴게실로 들어갔다.
가하란은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중이었다. 문 여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반응조차 없다.
꽁해서 아는 척 안 하는 것이다. 애다운 태도였다. 상대가 먼저 손을 내밀어주길 바라는 유치한 심리전.
“팀장님이 부르네. 잠깐 다녀올 테니까 형 노릇 좀 하고 있어.”
비일이 등을 툭 친 다음 돌아섰다.
형 노릇?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책장으로 걸어가 아까 보던 책을 꺼내 들었다. 덴스 교수님 작성한 이론 서적이었다.
가하란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책을 펼치기 전에 가하란을 쓱 훑었다.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집중하는 ‘척’하고 있다. 얼마나 더 저러고 버틸지, 유단은 관심을 거두고 책장을 넘겼다.
덴스가 쓴 책은 입체인지를 다루고 있었다. 거병 기사가 오토마타를 통해 정보를 인식할 때 미세한 오차가 발생하는데,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한 연구론이었다.
몇 번이나 읽은 책이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넘쳐났다.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단어조차 생소한 게 많아 책을 들출 때마다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계속해서 읽었다. 이해 불가한 정보들도 언젠가는 필요한 조각이 되어 가치를 발할 테니까.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끝날 수 있는 게 인생이었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미숙한 자의 결말이 어떤지.
성공. 오로지 성공. 그 외의 결과물은 필요 없었다.
과정? 꿈?
그런 건 권세를 쥔 자들이 우매한 시민을 속이기 위해 퍼트린 말이다.
악착같이 발악해서 승리를 움켜쥐어야 했다. 그것만이 나 자신을 증명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넘어져도 돼. 실패할 수도 있어. 잠깐 아프겠지만, 그 상처가 널 크게 만들 거야. 다음에 더 잘하면 돼. 유단, 넌 잘할 수 있어.
유단은 종이를 움켜쥐었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다시금 구역질이 났다. 상냥했던 눈빛도, 따뜻했던 손길도 이제는 상상의 것이 됐다.
어머니.
어머니도 틀렸어요. 다음이란 건 없어요. 그런 게 있다면, 왜 지금 제 곁에 없는 거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부모님은 선량한 사람 쪽에 속했다. 적어도 유단이 알고 있는 부모님은 악인이 아니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아잔탄스와 긴밀한 사이가 됐고, 한때 그 사실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제국의 최고 권력 가문이 아버지를 신임한다. 어깨가 으쓱거리는 일이었다. 알고 지내던 귀족 자제들도 하나같이 아버지의 뛰어난 능력과 인품을 칭송했다.
아버지를 닮는 게, 아버지의 뒤를 쫓는 게 내 꿈이었다.
그리고 그 처량한 꿈은 한순간에 바스러져 헛된 망상이 되었다.
-유단. 큰 꿈을 가져라. 남들이 비웃어도 상관없어. 꿈의 부피가 곧 사람의 크기를 정한단다. 망상이라고 놀림당해도 괜찮아. 다들 부러워서 그러는 거니까.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며 과거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망령들의 헛소리.
이루지 못한 자들의 거짓말.
유단은 이를 악물었다.
지지 않을 것이다. 울지 않을 것이다. 교수님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격한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그걸 에너지로 삼아라.
하지만 머릿속을 꽉 채우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더는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터졌으면.
몸이 휘청거렸다. 중심을 잃고 의자에서 쓰러졌다. 넘어가는 순간 반대편에 있는 가하란이 보였다.
재수 없게도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알게 됐다.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책에 빠져들어 주변이 안 보였다는 걸.
쿵 소리가 났다.
아프지는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는 목소리에 죽고 싶을 뿐이었다.
이럴 거면 그때 죽었어야 했다. 부모님의 부고를 접한 날, 몸에 기름을 두르고 왕성으로 뛰어갔어야 했다.
그날 타 죽었다면, 적어도 그때 황제에게 시원하게 욕이라고 퍼붓고 자결했다면 좀 나았을까.
아르드헨. 그 저주받아 마땅한 황제.
눈앞이 흐려졌다.
알고 있었다.
겁쟁이라 죽지 못했다는 걸.
허망하게 죽은 부모의 소식을 접하고도 집에 틀어박혀 아무 것도 못한 무능한 새끼라는 걸.
이 분노가 부모가 아닌 말라비틀어진 자아에 기반한다는 걸.
“형!”
가하란이 책을 떨어트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유단은 숨고 싶었다. 거품을 물고 눈물까지 흘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이 꼬맹이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꺼, 꺼져.”
“뭐라고?”
“…꺼지라고.”
유단은 귀를 틀어막았다.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리운 부모의 음성이 예리한 칼날이 되어 머리 안쪽을 저미고 있었다.
“형. 뭐가 들리는 거야? 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거야?”
통증이 심해졌다. 발버둥 치며 안으로 비명을 내지를 때였다.
“형! 흘려보내야 해. 다 이해하려 하면 안 돼. 알겠지? 그래야 해.”
무슨 개소리야.
네가 뭘 안다고.
“그리고 뭐라도 붙잡아. 쓸려 가면 안 돼. 절대로! 아무거나 좋으니까 형이 의지할 수 있는 걸 붙잡아.”
두리번거리던 가하란이 내팽개친 책을 들고 왔다.
“형, 책 좋아하지? 이거 꽉 붙들고 있어. 내가 어른들 불러올게.”
허겁지겁 움직이는 가하란을 눈동자로 좇았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소리는 점점 커졌고, 이내 소음에 파묻혀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이라도 다 놓아버리면 편할까. 그렇게 아버지를, 어머니를 따라가는 게 나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였다.
손가락 끝에 살짝 걸린 종이가 스르륵 미끄러지며 손끝에 얇은 상처를 만들었다.
희미한 상처를 비집고 핏방울이 올라왔다. 그 피를 본 순간, 유단은 책을 움켜쥐었다.
책 커버가 우그러질 정도로 강하게 쥐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허무하게 죽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실패한 채 끝날 순 없었다.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권좌 앞에 서서, 나태한 얼굴로 성도를 내려다보는 황제에게 질문할 것이다.
‘릴리어트’ 가문을 기억하느냐고.
한순간 강렬한 이명이 귀를 때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머니의 속삭임이 사라졌다. 몸을 짓누르던 압박 역시 말끔히 해소됐다.
유단은 몸을 천천히 일으키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움켜쥔 책을 바라봤다.
“끝난… 건가?”
피 묻은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휴게실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앞에선 덴스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유단. 너 괜찮은 거냐?”
유단은 몸을 내려다봤다. 뭔가 홀가분했다. 동시에 뭐든 할 수 있다는 전능감 같은 게 돌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쁜 건 아니었다. 웃는 게 이득이 될 거라고 계산했기에 웃었을 뿐이다.
“예, 교수님.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워서 쓰러졌을 뿐이에요.”
그날 이후로 한없이 좁고 답답하기만 했던 시야가 확 트였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냈다. 추잡스럽고 무가치한 눈물 자국과 침을 닦아내고 앞을 보았다.
“정말 괜찮아요.”
머리가 맑았다. 오랫동안 잠이 들었다가 깬 기분이었다.
유단은 덴스 뒤쪽에 있는 가하란을 보며 웃었다. 천천히 다가가 가하란에게 말했다.
“고마워. 네 덕분이야. 네 덕분에 다 털어낸 거 같아.”
“이제 된 거야? 괜찮은 거야?”
“어. 아무 문제 없어. 너무 말끔해.”
영혼 밑바닥에서 들끓던 분노조차 사그라졌다. 왜 쓸데없이 집착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털어내면 별거 아닌 것들인데.
히죽 나오려는 웃음을 얼른 감췄다. 여기서 기분 좋게 웃는 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지금은 처량한 인간으로서, 스타쥬로서 도움을 받아야 할 때니까. 불쌍한 인간으로 잠시 남는 게 득이 될 것이다.
“가하란. 아까는 미안했어.”
가하란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가하란이 아니라며 고개를 내젓는다.
이번에는 진심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고마웠다. 덕분에 껍데기를 벗어낼 수 있었다.
“고마워, 정말로.”
유단은 웃으면서 재차 말했다.
부모님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실패한 망령들의 헛소리였을 뿐이니까.
다시금, 히죽 웃음이 나올 것 같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