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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94화 (67/558)

제94화

짝짝짝, 간결한 박수 소리에 가하란은 뒤를 돌아봤다. 비일이 문틀에 기댄 상태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나중에 아들이 생긴다면 딱 너희들처럼 컸으면 좋겠다.”

비일이 가하란과 유단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시원하게 쌈박질할 것 같지는 않고.”

상체를 낮춘 비일이 가하란과 유단 어깨에 팔을 한쪽씩 걸었다.

“그렇다고 내가 너희들한테 서로 부둥켜안고 사과하라 하는 것도 웃기겠지?”

유단이 비일의 팔을 떼어내며 말했다.

“유치하게 그런 거 시킬 생각 마세요.”

유단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뒤로 물러서서 책장으로 걸어갔다. 책 한 권을 뽑아낸 뒤 읽기 시작했다.

비일이 웃으면서 유단에게 질문했다.

“불편하지 않겠어? 이렇게 흐지부지 끝내면.”

“쟤도 대충 알아들었을 거예요. 못 알아들었다면 그걸로 됐고요. 어차피 오래 볼 사이도 아니에요.”

비일이 으쓱거리며 가하란을 보았다.

“그렇다는데?”

“저도 괜찮아요. 할 말은 다 했으니까요.”

“둘 다 어른이네. 나였으면 머리부터 들이받았을 텐데.”

“그럴 뻔했어요.”

가하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비일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아까도 말했지만 나쁜 애는 아니야.”

“착한지, 나쁜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이제 막 만났으니까요. 하지만 방금 유단 형이 한 말이 잘못됐다는 건 알아요.”

“…너도 고집이 꽤 있구나.”

귓속말하듯 작게 말하는데, 유단한테 다 들린 모양이었다. 유단이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잘못된 건지 아닌지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알게 될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적당주의로 살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하나에만 집중해. 그게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니까.”

유단이 휴게실을 벗어났다. 옆에 있는 비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혼자 있어도 되겠어?”

“책 읽고 있을게요.”

“그래. 난 잠깐 저 녀석하고 얘기 좀 해야겠다.”

비일이 문턱에 발을 올리며 가하란을 돌아봤다.

“혹시라도 저 녀석이 한 말에 상처받았다면 내가 대신 사과할게. 그렇지만 유단이 악의에 차서, 네가 미워서 저런 말을 한 건 아니야.”

“형이 한 말은 잘못됐지만, 진심이 느껴졌어요. 절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거겠죠. 그래서 화가 엄청 났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어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형한테는 아닐 수도 있겠구나.”

비일이 빙긋 웃었다.

“아마 유단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내가 보기엔 너랑 유단, 좋은 친구가 될 거다. 일단 둘 다 나보다 똑똑하니까 잘 어울릴 수 있을 거야.”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비일이 문을 닫았다. 가하란은 의자에 앉아 조금 전 대화를 떠올렸다.

유단이 한 말은 어른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듣는 순간 화가 나고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비일이 말했듯, 유단은 조롱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말투가 거칠긴 했어도 안에는 신념이 담겨 있었다.

대화 중에 유단이 툭 꺼낸 ‘골목 출신’이란 단어. 얕잡아보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되짚어보면 그 단어를 내뱉을 때 유단의 표정은 너무나도 씁쓸해 보였다.

불현듯 자조적이란 말이 떠올랐다.

유단 형은 그 말을 왜 썼고, 어떤 심정으로 입에 올린 걸까.

고민이 깊어져 갔다.

이런 성향의 사람과 만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골목 이웃들은 항상 친절했고 상냥했다. 골목 밖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견해 차이는 있을지언정, 정면에서 부정하는 일은 없었다.

가하란은 자신이 내뱉었던 ‘거울’이란 단어를 입에서 몇 번 굴렸다.

거울에 비친 상처럼 나와 반대인 사람.

세상 모든 사람과 친해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는 걸 가하란은 알고 있었다.

“유단 형하고 친해질 수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스타쥬요?”

올란트가 커피 잔을 받으며 되물었다. 덴스는 고개를 짧게 끄덕인 후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우리 집에서 맡기로 했어. 적어도 5년 정도는 내 밑에서 배울 거야. 더 길어질 수도 있고.”

덴스는 유단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의외네요. 선배님은 스타쥬 제도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없었지. 아마 유단을 마지막으로 제자를 들이는 일은 없을 거야.”

“처음이자 마지막인 정식 제자네요.”

“그렇게 된 거지.”

올란트가 손가락을 들었다.

덴스는 시선을 옮겼다. 연구실 밖으로 나가는 비일과 유단이 보였다.

“비일한테 신세를 지는군.”

안 봐도 훤했다. 요 며칠간 비슷한 장면을 몇 번이나 봤으니까.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유단과 어울리느라 비일이 고생깨나 하고 있었다.

“비일, 저 친구는 성도 관리국 소속이죠?”

“일단은. 내가 예전에 신세 진 분이 그쪽에 계시는데, 마침 성도 관리국이 어수선하다고 비일을 이쪽으로 보냈어.”

“어수선할 만하죠.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으니.”

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거병과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순수한 학도들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덧 정치 싸움에 휘말려 있을 정도로.

“유능한 써전이라죠?”

“유능하지. 유능하니까 저 나이에 성도 연구소에서 써전을 맡았고. 그러고 보니 너보다도 어리네. 저 나이 때에 성도에서 써전을 이어받은 건 저 녀석이 유일해. 다만….”

덴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했다.

“자잘한 문제를 많이 일으켜서 미운털이 박혔지.”

“문제요?”

“대단한 건 아니야. 그야말로 자잘한 것들. 특히 오퍼레이터들과 마찰이 많아.”

덴스는 건너들은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오류 점검이 끝나면 기술자들과 상의해서 조율해야 하잖아?”

“그렇죠.”

“그 과정에서 비일은 이렇게 설명하는 거야. 왼쪽 발목이 개미 눈물만큼 거슬려요. 오른쪽 어깨에 모래가 한 스푼 섞인 거 같아요.”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 오퍼레이터들이 싫어할 만하네요.”

“운동력 체크할 땐 제발 모터를 기준으로 말해달라고 그렇게 부탁해도, 비일은 6단계로는 설명 못 하는 미묘한 구간이 있다면서 자기표현을 계속 이어나가.”

그 외에도 기상천외한 사고를 몇 개 더 일으켰지만, 사생활 보호를 위해 여기까지만 말하기로 했다.

덴스는 커피 잔을 살며시 돌렸다. 가라앉은 설탕이 녹는 게 눈에 들어온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저 녀석도 이쪽으로 끌고 오려고.”

“성도를 포기하고 둔으로 올까요?”

“다 방법이 있지. 이럴 때는 주변인을 설득하는 게 최고라는 거 알잖아? ‘얀스’라고 서로 으르렁대면서도 같이 붙어 다니는 오퍼레이터가 한 명 있어. 걔를 먼저 이쪽으로 데려올 생각이야.”

“정식으로 옮기면 그때 인사해야겠네요.”

올란트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선배님. 아까 얘기한 스타쥬 말인데, 유단한테 무슨 사연이 있는 겁니까?”

덴스는 옅게 미소 지으며 올란트 맞은편에 앉았다.

“사연이야 당연히 있지. 없으면 5년이나 내 밑에 둘까.”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린 후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너한테는 얘기하려고 했어. 앞으로 계속 보고 지내야 할 사이인데 알 건 알아야지.”

이야기를 꺼내려고 마음먹자, 핏발이 선 눈동자가 먼저 떠올랐다.

처음 봤을 때 유단은 눈이 선한 아이였다. 잘 웃는 놈이기도 했고.

두 번째로 봤을 때, 녀석은 눈은 학구열로 불타고 있었다. 하나를 배우면 셋, 넷을 깨우치는 영특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났을 때… 그 핏빛 어린 눈동자를 보게 된 것이다.

“저번에 멧시언 소장님과 대화하는 걸 들어보니, 정치권에 대해 꽤 잘 아는 것 같더라.”

“이것저것 주워 들은 게 있어서 그래요. 겉핥기죠.”

“그것조차 못 하는 사람 많아. 아무튼 너라면 튤립 전쟁이 뭔지 알고 있을 거 같은데.”

질문을 던지자마자 올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가 쉽겠네. 유단은 아잔탄스 가가 숙청될 때 가족을 잃었다.”

“아잔탄스의 혈육인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유단의 부모, 그러니까 내 옛 친구들은 아잔탄스에 의탁해서 살아가는 4등 귀족이었어.”

“…휘말렸군요.”

“재수가 없었지. 그 일이 터진 밤, 아잔탄스 본가에 있었어. 아니지. 재수가 없었던 게 아니야. 폐하께선 싹을 완벽하게 쳐내고 싶었을 테니까.”

아잔탄스는 명분을 잃었고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역모를 꾀했으니 멸문당하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의 결과로 1등 가문 하나가 없어졌다고 해서 소시민의 삶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분명 그랬어야 하는데….

“소식을 듣고 난 친구의 자택으로 찾아갔어. 거기서 혼자 남은 유단을 보았지. 잘 웃는 애였어. 순수한 학구열로 세상을 관찰하는, 참 영리한 애였고. 근데 그날 본 유단은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불을 지를 기세였어.”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붉었던 유단의 눈동자가 지금도 선명했다.

“내버려 뒀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지. 분노를 표출할 길이 없다는 걸 그 아이는 깨달아 버렸으니까. 제국 황제를 상대로 뭘 어쩔 수 없잖아?”

“유단 같은 아이가 한두 명이 아니겠군요.”

“그렇겠지.”

덴스는 조금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말 몇 마디 안 했는데 입 안이 텁텁했다.

“똑똑한 애야. 내가 지금껏 만나온 그 어떤 애보다 비상해. 게다가 내 친구의 자식이기도 하고. 내버려 둘 수가 없더라.”

“그래서 스타쥬를 권했군요.”

“어그러진 분노가 엉뚱한 곳으로 튀기 전에 다 잡아주고 싶었어. 어른이란 게 그런 거 하라고 나이 먹은 거잖아?”

덴스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애가 탐이 나기도 했어. 내가 이루지 못한, 우리가 닿지 못한 지식의 경지에 그놈은 갈 수 있을 것 같거든.”

느리지만 서서히 변하는 유단을 떠올리며 말했다.

“방향 없는 분노는 스스로를 망치지만, 길이 정해진 분노는 훌륭한 연료가 되니까. 내가 옆에서 가르쳐 주다 보면 옛 모습을 찾게 될 거야. 순박했던 시절로는 돌아갈 순 없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증오하는 일은 사라지겠지.”

“자기 연민은 서글픈 법이죠.”

연구실 밖으로 나갔던 비일과 유단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덴스는 팔짱을 끼며 그 둘을 지켜봤다.

“네 아들하고도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네. 이곳에 와서 또래랑 잘 어울리지 못했거든. 가하란이 몇 살이라고 했지?”

“이제 일곱이에요.”

“유단이 열 살이니까 형이네. 형 노릇 하려면 점잔 빼야 할 테니, 그것도 좋지.”

“가하란의 친화력은 보통이 아니니까 금방 사이좋게 지낼 겁니다.”

“그래 주면 좋겠네.”

덴스는 올란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네 자식 자랑을 종일 했었지?”

“자랑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제 아들 녀석은 보통이 아니에요.”

“나중에 그 두 놈한테 문제 하나 던져주면 재미있겠네. 누가 먼저 풀어낼지 내기나 할까?”

“선배님은 유단한테 거는 거겠죠?”

“당연하지. 걘 천재라고 불러도 될 정도니까.”

올란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면 전 아들한테 걸죠. 제 아들은 천재를 뛰어넘은 그 무엇이 될 테니까요.”

“그건 너무 갔다.”

덴스는 올란트를 툭 치면서 일어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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