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93화 (66/558)

제93화

비일을 따라 움직였다. 뒤쪽에 서 있던 남자애도 말없이 따라왔다.

창고 오른쪽 구석에 문이 하나 있었는데, 밀고 들어가니 다리 긴 의자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가하란의 눈길을 잡아끈 건 선반을 차지한 잎이 뾰족한 식물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비일이 다가와 설명해줬다.

“선인장이야. 물을 적게 줘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멋진 놈이지.”

“처음 봐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성도에서는 자주 볼 수 있어. 관상용으로 인기거든.”

비일이 화분을 살며시 당겼다.

”잘 키우면 빨간 열매도 맺는데, 열매가 익어서 터지는 순간을 보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해. 그래서 이런 거 수십 개를 창가에 두고 기르는 귀족도 있고.”

“신기하네요.”

손가락으로 뾰족한 잎을 살짝 건드렸다. 예상했던 대로 따끔했다. 아파서 눈을 찔끔 감자 비일이 웃으며 말했다.

“보기만 해도 따가워 보이지 않아?”

“말랑거릴 수도 있잖아요.”

“애가 겁이 없네. 독을 품고 있는 식물도 많아. 함부로 만지면 큰일 나고.”

“위험했으면 형이 말렸을 거예요. 근데 가만히 보고 있었으니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고, 그래서 만져봤어요.”

비일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가하란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말하는 게 내 친구를 닮았네. 걔도 너처럼 귀염성이 없어. 입에 논리를 달고 사는 애인데, 넌 걔처럼 되진 마.”

가하란은 이마를 문지르며 웃었다.

“유단. 이리 와서 인사해. 너보다 동생 같아 보이니까 챙겨주고.”

저 애의 이름이 ‘유단’인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병을 살피던 남자애가 다가왔다.

“유단. 넌?”

가하란은 불쑥 내민 손을 잠깐 지켜보다가 살며시 붙잡았다.

“가하란.”

“난 열 살이고 딱 봐도 내가 형 같네. 맞지?”

“응.”

“나이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알아두는 편이 낫긴 하니까.”

유단이 비일을 보며 “됐죠?”라고 말하더니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비일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다부지냐. 내가 너네만 했을 땐 코 질질 흘리며 뛰어다니기만 했는데.”

“저도 뛰어다니는 거 좋아해요.”

“그래? 공통점 하나 찾았네.”

비일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쟤가 까칠해 보여도 심보가 못된 애는 아니야. 그냥 자기 일에 집중하는 걸 좋아해서 그래. 무슨 뜻인지 알겠어?”

“네.”

“똑똑하네.”

가하란은 유단을 잠시 지켜보다가 비일에게 질문했다.

“형.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뭔데. 뭐든지 물어봐.”

“써전이 뭐예요? 아까 형이 그랬잖아요. 써전 일을 하고 있다고.”

“아, 써전이 뭔지 모르는구나. 여기 견학 올 정도면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모르는 거 많아요. 그래서 많이 물어보고 다니고요.”

“당당하게 질문하는 건 바람직한 자세지.”

비일이 의자를 가리켰다. 높이가 있는 의자라 까치발을 들고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거병은 누가 조종하지?”

“거병 기사요.”

“맞아. 거병 기사가 움직이지. 하지만 기사 말고도 거병을 직접 조종하는 직업이 하나 더 있어.”

비일이 검지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러면 써전도 기사인 거예요?”

“아니. 조종할 수 있다는 것만 같을 뿐 기사는 아니야. 거병 기사는 포텐셜을 끌어내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똑같은 모델의 거병이라 해도 기사에 따라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르지. 실전에 투입돼 작전을 수행하는 전사들이기도 하고.”

조금 떨어져서 휴게실 곳곳을 구경하던 유단도 어느새 옆으로 와 비일의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반면 써전은 정비공에 가까워. 비상시에는 거병 기사 대신 거병을 조종해야 하지만, 그럴 일은 거의 없고.”

비일이 가하란을 보며 말했다.

“거병은 정교하면서도 제멋대로인 기계야. 이론상 완벽한데 시험기를 기동해보면 뭔가 삐거덕거려. 외부에서는 결함이 안 보이는데 말이야. 그래서 타봐야 해.”

“형이 직접 거병을 움직이면서 문제점을 찾아내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비일이었다.

“그게 써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야. 그 작업을 소홀히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유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거병 기사의 생명이 위협받겠죠. 거병 조종은 아주 섬세한 기술이에요. 약간의 위화감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내기도 하죠. 그걸 미연에 방지하는 게 서포트 팀의 의무고요.”

가하란은 눈을 깜빡거리며 유단을 보았다. 막힘없는 대답이었다.

“형은 많을 걸 알고 있구나.”

“이 정도는 기본이야.”

유단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테리 형이었다면 으스대면서 더 칭찬해 달라고 했을 텐데.

“유단이 말한 대로 써전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하면, 그 대가는 거병 기사가 받게 돼. 거병이 투입될 정도의 작전이면 위험도야 말할 것도 없고, 거기서 정비 실수가 나오면….”

비일이 눈을 찡그리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거야.”

가하란은 긴장한 채 어깨를 움츠렸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입을 다문 채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비일이 입매를 누그러트렸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이 멋진 형이 노력하고 있으니까 겁먹을 필요는 없고.”

방긋 웃으며 일어서는 비일이었다.

“쉬고 있어. 난 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여기 안에 있는 건 마음대로 만져도 되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살펴보고. 물론 찻잎이 담긴 병을 깨트리면 안 돼.”

비일이 휴게실을 벗어났다.

가하란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비일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거병 기술자가 돼서 거병을 만든다. 단순하지만 명확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만들고 난 뒤에는?

거병은 집 안 구석에 세워두는 장식품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것에 올라타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게 된다.

만드는 것에서 끝이 아니라 그 뒤가 있었다. 거병 기사의 생명이 서포트 팀한테 달려 있다는 유단의 말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형도 기술자가 되는 게 꿈이야?”

가하란은 유단에게 말을 붙였다. 가슴을 짓누르는 상상 속에서 한 걸음 벗어나고 싶었다.

“꿈?”

유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욕설을 들은 것처럼 불쾌해하는 얼굴이었다.

실수를 한 걸까? 가하란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되짚어 봤으나 잘못된 점을 찾지 못했다.

한동안 노려보던 유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같은 애랑 무슨 말을 하겠냐. 꿈? 그런 싸구려 표현은 앞으로 쓰지 마. 그게 네 인생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신경질적인 어투에 기가 살짝 눌렸으나, 말의 의미를 곱씹다 보니 살짝 오기가 들었다.

꿈이 싸구려라니.

“꿈이 왜? 꿈은 싸구려가 아니야. 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크면 클수록 좋은 거야.”

“많을수록 클수록 좋다고? 세상 사람들은 그걸 보고 이렇게 표현해. 오만하고 어리석다고.”

가하란은 입을 씰룩거렸다.

“아닌데.”

“맞거든. 꿈 같은 건 미적지근한 인생들이나 찾는 단어야. 아니, 좋게 생각해서 꿈이란 걸 품고 살 수는 있겠지. 근데 많고 큰 꿈?”

유단이 코웃음 쳤다.

“목표 하나만 붙잡고 살아가는 것도 빠듯한 세상이야. 시간과 영혼을 다 바쳐야 겨우 성공할 수 있는 게 세상일이라고. 근데 많은 꿈? 차라리 이렇게 말하지 그래. 난 대충 살 거라고.”

가하란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단 앞으로 걸어갔다.

“아니야. 꿈이 많다고 해서 대충 사는 게 아니야. 내가 아는 어른들은 그러지 않았어.”

핀들론 할아버지, 아빠, 안소니 아저씨, 룽네 아줌마, 웰턴 아저씨. 다들 멋진 꿈을 많이 갖고 있었고, 비록 이루진 못했다고 한들 꿈을 꾼 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그랬어.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그게 실패한 건 아니라고.”

다정한 목소리로 꿈에 관해 말해주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유단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걸 보고 자기합리화라고 하지. 이루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게 실패가 아니야? 달성하지 못했다면 그건 실패한 거야. 여기에 변명할 여지는 없어. 목표를 세우고 모든 걸 다 바쳐 부딪쳤을 때 그 결과물이 실패라면, 그렇게 태평한 소릴 할 수 있을까?”

유단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미건조했던 얼굴에 서서히 불꽃이 피어오른다.

은은하게 번지는 분노를 보며, 가하란은 눈에 힘을 줬다. 물러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루지 못했는데 실패가 아니다? 아니. 그건 실패한 거야. 근데도 속 편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너, 둔 골목 출신이지?”

“그게 왜.”

유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흥분이 잦아들고 다시 담담한 얼굴이 됐다.

“바보한테 화를 내봤자 나만 손해지. 잘 들어. 꿈이라고 포장하면서 대충 살지 마. 일은 결국 성공이냐 실패냐, 둘 중 하나로 나뉘니까. 골목 출신의 삶으로는 이해를 못 하겠지. 주변에 있는 어른이란 것들도 너랑 비슷한 수준일 테고.”

가하란은 눈을 얇게 떴다. 유단의 입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진짜들은 실패를 포장하지 않아. 옹호하지도 않고. 실패는 그저 실패일 뿐이야. 실패에서 배울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결국 성공한 사람뿐이고. 실패한 상태로 도주해 버린 놈들은 입을 꾹 다물어. 아니면 실패해도 괜찮다고 남을 부추길 뿐이지. 왠지 알아? 남들도 추락하길 바라거든. 나만 패배자로 남는 건 너무 쓰라리니까.”

유단이 한 걸음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꿈은 크면 클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 말을 너한테 해준 어른을 찾아가서 물어봐. 정말 그거로 충분하냐고. 이루지 못해도 정말 괜찮은 거냐고. 정신 똑바로 박힌 어른이라면 이렇게 말해줄 거야. 꿈은 꾸는 것만으로는 무가치하니까 반드시 이루라고.”

가하란은 주먹을 말아 쥔 채 유단을 올려다봤다. 유단이 픽 웃으면서 주먹을 가리켰다.

“왜? 한 대 치게? 골목 출신은 몸부터 쓴다고 하던데, 너도 그러냐? 하긴. 논리로 반박 못 하면 폭력을 쓰는 게 편하지.”

“때리지 않을 거야. 형이 나랑 조금만 더 친했다면 싸웠을 거지만….”

유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친했다면 싸우다니. 너 머리가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아빠가 말했어. 정말 친하고,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싸우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근데 형은 나랑 안 친하잖아.”

“말하는 게 되게 웃기네.”

가하란은 꽉 틀어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여전히 화가 나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형에 대해 잘 몰라. 모르니까 형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어. 알 수 없다고 해서 비합리적이라 생각해버리면, 그건 잘못된 거야.”

유단이 눈을 찡그렸다.

가하란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남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야. 내가 여기서 화를 내버리면 형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는 거니까, 난 화도 내지 않을 거야.”

“의견을 묵살 당했는데 반박하지 않는 것도 패배자의 마인드야. 넌 계속 그렇게 자라왔구나?”

“아니! 난 반박은 할 거야. 하지만 여기서 말로 하는 건 의미가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보여주는 수밖에 없어.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 형이 한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할게. 꿈은 많을수록, 클수록 좋아. 비록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어.”

가하란은 유단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걸 내가 보여줄게. 그때가 되면 형도 사과해. 남을 무시하는 그런 말버릇, 되게 안 좋은 거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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