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92화 (65/558)

제92화

쇠 갈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가하란은 귀를 살며시 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청색 불티가 알알이 피어오르고, 검붉게 달아오른 쇠가 반으로 쩍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건 청철인가?

가하란은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와 기억을 대조해 가며 끝없이 주변을 관찰했다.

둔중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심장 박동에 박차를 가하는 것 같았다.

아빠의 경고가 없었다면 만세를 부르며 작업대 앞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현장 견학은 자유롭게 진행되지만, 그래도 기술공들을 방해하면 안 됩니다. 질문이 있다면 나중에 시간을 줄 테니 그때 해주세요.”

회색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옆을 지나가면서 말했다. 남자 뒤에는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아빠. 저 친구들도 견학 온 거예요?”

가하란은 올란트의 손을 살짝 잡아당기며 물었다.

“맞아. 다들 우리처럼 여길 구경하러 온 거야. 원래는 저 친구들처럼 단체로 움직이는 게 기본이긴 해.”

“저도 저 애들하고 같이 들으면 안 돼요?”

아빠의 경고와 달리 아이들은 작업대 가까이서 구경하고 있었다. 가하란도 옆에 붙어서 같이 보고 싶었다.

“우리 아들,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을까?”

가하란은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아빠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떨 때 저런 표정을 짓는지, 가하란은 알고 있었다.

“네. 기다릴게요.”

가하란은 아이들 쪽을 바라봤다.

지금 보니 왼팔에 흰색 띠를 차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좋아 보였다.

신분이 다르거나, 아니면 도시에서 입지를 다진 상인들의 자식들이리라.

왜 아빠가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는지, 금방 이해했다. 투정 부리지 않고 기다려야 할 때였다.

“더 멋진 걸 보여줄게.”

올란트가 가하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게 누구야. 곧 치프가 될 올란트 아닌가?”

뒤에서 들려온 굵직한 목소리에 가하란은 몸을 돌렸다. 회색 티에 청색 멜빵바지를 입은 아저씨였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구를 손에 쥐고 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네 아들놈이냐?”

“예. 선배님.”

“꼬마야. 재미도 없는 곳에 뭐 하러 왔어?”

남자가 몸을 숙이며 물었다.

“전 여기가 너무 좋아요.”

“뭐가 그렇게 좋은데?”

“전부 다요! 기름 냄새도 좋고 쇠 냄새도 좋아요! 불꽃도 멋지고, 이 시끄러운 소리도 다 마음에 들어요.”

남자가 풋 웃더니 올란트를 쳐다봤다.

“네 새끼가 맞나 보다. 말하는 게 너 어릴 때랑 비슷해.”

남자가 바지에 달린 주머니에서 작은 드라이버를 하나 꺼내 주었다.

“선물이다. 찾으면 꼭 없고, 없어서 사면 공구함 구석에서 꼭 나타나는 놈이지. 규격이 달라져서 자주 쓰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갖고 있어라.”

“감사합니다.”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랩으로 가도 종종 얼굴 비춰라. 널 아니꼽게 생각하는 놈들보다 나처럼 축하해주는 놈들이 더 많으니까.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고 놀러 와.”

아빠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돌아서는 남자였다. 가하란은 올란트를 보며 물었다.

“아빠. 이제 여기서 일 안 해요?”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됐어.”

“좋은 일인가요?”

“좋은 일이야. 아빠가 바라던 일이기도 하고.”

최근 아빠가 즐거워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걸 연구하는 모양이었다.

“아빠가 행복하면 저도 좋아요.”

아빠는 대답 대신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놓았다. 가하란은 볼을 문지르며 선물받은 드라이버를 보았다.

처음으로 나만의 공구가 생겼다.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올란트!”

저 멀리서 누군가가 아빠를 불렀다. 가하란은 레일이 깔린 곳 너머를 보았다.

테가 두껍고 둥그스름한 안경과 군청색 재킷. 서른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아빠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가자.”

아빠 손을 붙잡고 걸었다.

“네가 가하란이구나. 반갑다. 아저씨는 덴스라고 해. 너희 아빠랑 같이 일하는 사람.”

“안녕하세요.”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덴스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드라이버를 준 아저씨와 달리, 덴스는 피부가 깨끗했다. 시선을 손으로 옮겼다. 거칠고 상처로 가득한 아빠와 달리 고운 손이었다.

“부랴부랴 견학 일정을 소화하느라 다들 바뻐. 투자를 받아내려면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좀 더 구색을 갖췄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사람이 참을 수밖에요.”

앞서 나가는 두 어른의 등을 보며 가하란도 바쁘게 발을 놀렸다.

소음이 점점 사라진다. 오가는 사람들도 줄었고 불꽃과 연기도 없어졌다.

멜빵바지에 온갖 공구를 들고 다니던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대신 덴스처럼 군청 재킷을 입고 종이 뭉치를 들추는 사람이 늘어났다.

“네 아들, 약간 실망한 표정인데?”

아들이란 말에 가하란은 앞을 보았다. 올란트와 덴스가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제 아들은 공방 업무를 보고 싶어 했거든요.”

“그게 또 은근히 재미있지. 펄펄 끓는 쇳물에 사방으로 튀는 불꽃. 무서워하는 애들도 있지만.”

덴스가 가하란 앞으로 다가왔다.

“조용해서 재미없을 거 같지?”

“조금요.”

“솔직하네. 근데 여기도 꽤 재미난 곳이야. 제철소 쪽이 거병의 몸과 뼈대를 만든다면, 여긴 심장과 머리를 만드는 곳이거든.”

“심장과 머리요?”

덴스는 금방 보여 주겠다며 눈을 찡긋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창고 앞에 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같은 형태의 창고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었다.

“뒤에 자재 오니까 이쪽으로 오렴.”

가하란은 옆으로 비켜섰다. 짐수레가 바닥에 깔린 레일 위를 미끄러졌다.

수레는 맞은편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왔다.

“저건 누가 미는 거예요?”

사람도 없고 말도 없다. 근데 수레는 레일 위를 이동하고 있었다.

“설명하면 좀 복잡한데, 일단 마나라고 해두마. 마나가 뭔지는 알고 있지?”

“네. 발밑에 있는 힘이요. 아는 누나가 뿌리라고 알려줬어요.”

“잘 알고 있네. 똑똑한걸?”

덴스가 창고 출입구에 섰다. 입구는 두 개였는데, 하나는 일반적인 문으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크기였다. 다른 하나는 수레가 오가는 입구였고.

“들어와라.”

덴스가 문을 열며 말했다. 가하란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느껴지는 건 시원해진 공기였다. 턱을 살짝 들고 창고 내부를 살폈다.

천장에 박힌 커다란 등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기름이나 양초로 내는 빛은 아니었다. 귀족 거주지에서나 볼 수 있는 마법등이었다.

각종 선반이 창고 벽을 따라 설치돼 있고, 그 앞에서 군청색 재킷을 입은 남녀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저게 거병의 두뇌란다.”

덴스가 손가락을 들었다. 가하란의 시선이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반구 형태의 쇳덩이가 창고 중심부에 놓여 있었다. 마치 거대한 물방울처럼 표면이 매끈해 보였다. 신기해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더니, 덴스가 가까이 가서 봐도 된다고 말했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만지는 건 안 되지만 보는 거라면 얼마든지.”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 역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체하지 않고 쇳덩이를 향해 걸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뛰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코앞에서 본 쇳덩이는 첫인상과 달리 표면이 거칠었다. 미세한 홈이 어지러울 정도로 파였다.

가하란은 자리를 옮겨가며 정체불명의 쇠를 살펴봤다. 덴스는 이 물건이 거병의 두뇌라고 했다. 거병의 두뇌는 오토마타라고 들었는데.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쇳덩이의 표면 질감이 어떨지,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타챠의 비늘을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참기 힘들었다.

가하란은 깍지 낀 양손을 가슴께로 잡아당겼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차 하는 사이 손이 나갈 것 같았다.

“만져 보고 싶어?”

옆으로 다가온 덴스가 말했다.

“네.”

“뜨거울지도 모르는데? 엄청 차가울 수도 있고. 손이 아플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아?”

아프다는 말에 겁이 조금 났지만 그래도 촉감으로 경험을 쌓고 싶었다.

“아픈 건 참을 수 있어요. 모르는 걸 참는 거보다 조금 아픈 게 나아요.”

“조금이 아니라 엄청 아플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어려도 배짱은 있네. 공학도의 올바른 마음가짐이야. 눈앞에 미지가 있는데 참기만 하는 건 학자로서 대성할 그릇이 아니지.”

덴스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쇳덩이를 가리켰다.

“이게 뭐라고 했지?”

“거병의 두뇌요.”

“두뇌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니?”

“오토마타요.”

“잘 배웠네. 근데 이건 아직 오토마타가 아니야. 오토마타가 되기 전의 상태지.”

덴스가 쇳덩이에 손바닥을 댔다.

“이것의 명칭은 ‘인지통합 유도장치’. 어떤 건지 감이 오니?”

“단어 뜻만 직역해서 생각하면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덴스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너 나이가 몇 살이니?”

“이제 일곱 살이요.”

“일곱 살이라. 언어적 능력이 한창 발달할 때긴 하지만, 그래도 또래와 비교하면 굉장히 유식하구나.”

가하란은 깍지 낀 손을 풀며 덴스를 바라보았다. 빨리 대답을 듣고 싶었다. 만져도 되는 건지, 아닌지.

“의젓해 보이면서도 급한 구석이 있네. 좋아. 손을 대봐.”

얼굴이 활짝 펴졌다.

가하란은 호기심이 일궈낸 충동의 끈을 모두 풀어내며 손을 움직였다.

쇠에 손바닥이 닿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칠까칠했다. 마치 수염을 덜 깎은 아빠의 턱처럼.

“어때?”

“까끌까끌해요.”

“온도는?”

“조금 따듯해요. 왜 이런 거죠? 쇠는 차갑지 않나요?”

“미약하지만 마나가 스며 있어서 그래. 힘은 대개 열을 발산하거든. 아닌 경우도 있지만.”

덴스가 손을 댄 채 천천히 왼쪽으로 움직였다. 가하란도 그 뒤를 따랐다.

“우리끼리는 이걸 ‘유사 정령’이라고 불러.”

“정령이요? 이 안에 정령이 들어 있는 건가요?”

“그건 아니야. 일단은 우리의 염원을 담아 그렇게 부른다고 해둘게. 자세한 건 네가 좀 더 크게 되면 너희 아빠가 알려줄 거야.”

덴스가 걸음을 멈췄다.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해 있었다.

“마침 왔네. 가하란, 저 친구가 오늘 너한테 이것저것 알려줄 거다. 너희 아빠와 난 잠깐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덴스가 손짓했다. 창고 입구에 서 있던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한 명은 이십 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조금 뒤에서 따라오는 남자애는 열 살 정도로 보였다. 테리 형하고 나이가 비슷하려나?

“며칠 전에 말한 귀여운 손님. 좀 부탁할게.”

“제가 잘 돌보고 있을게요. 팀장님은 일 보세요.”

가까이 다가온 이십 대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이 형한테 다 물어봐. 참고로 아저씨 아니라 형이다. 응? 알겠지?”

남자가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빤히 쳐다봤다.

“이럴 땐 같이 주먹을 내밀어서 툭 치면 돼. 이쪽 동네 인사법이야.”

아하. 가하란은 말아쥔 오른손으로 남자의 주먹을 툭 쳤다.

“전 가하란이에요.”

“난 비일. 써전 일을 하고 있어.”

비일이 턱짓을 하며 말했다. 장소를 옮기자는 뜻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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