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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91화 (64/558)

제91화

인간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수많은 요소 중 가장 큰 위험요인으로 분류되는 것이 ‘마수’였다.

마수가 그저 흉포한 동식물이었다면 인간은 사냥에 나섰을 것이다. 으레 해왔듯 터전을 밀어버리고 정복해서 씨를 말렸을 터였다.

하지만 마수는 그럴 수 없는 대상이었다.

마수는 정형화된 생명체가 아니었다. 개체마다 성질이 모두 달라 효율적인 사냥법이란 걸 강구할 수 없었다.

그놈들은 영리하고 민첩했으며 강인했다. 도망치는 법을 알고, 도망칠 수 없다면 필사의 항전을 하는 괴물들이었다.

게다가 마수의 주요 서식지는 지독한 환경을 자랑했다. 괴이한 동식물이 득실대는 그곳은 훈련받은 군인과 유능한 랍파도 목숨을 보장받기 힘들었다.

처리해야 하나, 처리하기엔 감당해야 할 비용이 너무나도 큰 상황.

제국은 토벌 대신 격리를 택했다. 격리구역을 뚫고 나오는 마수를 처리하는 것으로 인간의 생활권을 지켜냈다.

격리지를 벗어나는 마수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응 가능한 수준이었다.

오랜 사투 끝에 제국은 완벽에 가까운 방위선을 구축했고 안전을 확보했다.

인간이 정복을 포기하고 격리해 버린 대지. 미개척지의 탄생이었다.

“유렐.”

브라인의 목소리에 유렐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왜 멍하니 서 있어.”

“잊고 산 단어를 보게 되니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잊고 산 단어? 아, 마수를 말하는 거구나. 이곳에서 생활하는 인간족한테는 낯선 단어긴 해.”

마수. 혹은 몬스터.

너무나도 오랜만에 본 단어였다. 둔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민의 아이라면 마수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를 정도로, 이곳에서는 잊힌 단어였다.

계획도시가 설립된 이후 주변에서 마수가 목격된 적은 두 번밖에 없었다. 150년 가까이 지속된 이 거대한 도시에서 마수의 그림자를 찾아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아암, 하품하는 소리에 유렐은 고개를 들었다. 특무대령의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서류를 살폈다.

밀리언이 속해있던 중앙 4독립부대는 소문으로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미개척지 인근 토벌을 목적으로 결성된 중앙군 특수부대.

안전루트 확보를 목적으로 한 엘리트 부대로 무력이 뛰어난 자들로 구성됐다고 들었다.

하지만 드높은 명성과는 달리 소속된 군인의 최후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수와 전쟁하는 부대였으니까. 군부 산하 싱크탱크에서 제공한 첨단의 마법공학품을 몸에 둘렀다고 한들, 상대는 악력으로 사람을 으깨버리는 괴물들이었다.

아니, 그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문헌으로 접한 심도 4 이상의 마수는 인간이 대항하는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

훈련된 군인으로도 퇴치 불가능한 몬스터.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이들이 합류해야 대응할 수 있는 게 심도 4였다.

그리고 중앙군 독립부대는 심도 3 이상의 마수 토벌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소속 군인들이 사지 멀쩡히 전역했을 리가 없다.

명예 하나만을 바라보고 들어간 불굴의 용사들. 같은 군인으로서 경외감이 들지만, 동시에 혀를 차게 된다.

유렐이 독립부대로 전속을 명받았다면 그날로 군복을 벗었을 것이다. 명예와 높은 봉급도 좋지만 그보다 소중한 건 목숨이니까.

실마리가 살짝 보였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 모인다는 중앙군 독립부대라면 군부의 중심들과 안면이 있을 터였다.

칼리고 단장과 밀리언은 군부 사모임에서 알게 된 것일까?

서류 아래쪽에 소속 부대 연혁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오른쪽 비고란을 빠르게 훑었다.

유렐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허스 벨루 산트.

이제는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게 될 거인의 이름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밀리언은 4독립부대로 이동하기 전에도 허스의 밑에 있었다. 독립부대로 옮긴 후에도 허스와 함께였다.

전속 시기를 봤을 때 밀리언을 차출해간 건 허스였다. 전쟁영웅이 발탁해 갈 군인이라면 보통 인물이 아니리라.

칼리고가 어째서 요정의 안뜰 사정을 봐줬는지, 점점 알 것 같았다.

밀리언은 표면에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중앙 군부의 높으신 분들과 긴밀한 연락망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정의 안뜰이 둔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발돋움한 건 음식 맛이 아니라 이런 배경 때문이 아니었을까?

유렐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흥미로운 정보를 얻어냈다. 까딱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군벌 세계에서, 이런 인맥을 얻어낼 수 있다면 잠자리가 편해질 것이다.

“좋은 걸 찾았나 봐.”

웬일로 특무대령이 관심을 보였다. 유렐은 브라인의 눈이 감기기 전에 얼른 말했다.

“군 상부로 올라갈 수 있게 도와줄 발판을 하나 더 찾아냈습니다.”

“유렐은 능력도 좋아. 디온 사령관 측근으로 둔에 자리 잡더니, 이젠 그 위를 바라보는 거야?”

“인간은 수명이 짧으니까요. 여력이 있을 때 최대한 위로 올라갈 겁니다.”

“좋아. 그런 패기. 그래서 뭘 찾아냈는데?”

“이 밀리언이란 친구가 중앙 군부 수뇌부와 친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가정일 뿐이지만, 그럴 확률이 매우 높죠.”

브라인이 귀를 쫑긋 세웠다. 유렐은 웃으며 물었다.

“아는 게 있으시다면 슬쩍 흘리셔도 됩니다.”

“진심으로 그걸 바라는 거야? 나야 상관은 없지만.”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저도 이곳의 규칙은 잘 알고 있습니다.”

특무대령은 모든 걸 들어주며, 들은 모든 걸 비밀로 해준다.

황제를 욕해도 괜찮고, 쿠데타 세부 내용을 떠들어도 괜찮았다. 특무대령은 절대 발설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기록보관서 이용지침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특무대령에게 특정한 정보나, 어떤 사건의 견해를 듣고 싶다면 부탁하면 된다. 그러면 그녀는 자신이 아는 모든 정보를 통합해 최고의 답을 내놓을 것이다. 대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대가가 무엇인지, 군복을 입은 자들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전 오래 살고 싶습니다.”

“손가락 하나 정도로 끝나는 정보도 있어. 예를 들면, 오늘 저녁 메뉴 정도?”

저녁 메뉴를 듣는 데 손가락 한 개. 유렐은 쓴웃음 지으며 물었다.

“대령님께 정보를 얻어간 사람이 있긴 합니까?”

“있어. 말해줄까?”

“그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죠?”

“척추뼈 조금?”

“나중에 듣겠습니다. 죽기 직전에요.”

유렐은 파일을 돌려주며 말했다.

“밀리언이 속해있던 4독립부대의 세부 정보도 열람 가능합니까?”

“보안등급 1급한테는 소속명까지만 공개할 수 있어. 그 이상을 바란다면 특1급이 필요해.”

“특1급이라. 까마득하군요.”

앞에 ‘특’이란 글자가 하나 붙었을 뿐이지만, 1등급과 특1등급 사이에는 견줄 수 없는 권한 차이가 존재했다.

제국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힘.

황제. 의회의 최고 어른 중에서도 상석에 앉은 두 의원. 군부의 총수. 중앙 행정국 1국장. 그리고 특수감찰단 단장.

총수는 사망했으니 최고 수준의 보안등급을 소지한 사람은 제국을 통틀어서 다섯 명뿐이었다.

물론 개인으로 따졌을 때의 얘기고, 단체로 넘어가면 몇 군데가 더 있긴 했다. 그마저도 소수인 건 변함없지만.

“그래도 듣고 싶다면 말해줄 수는 있어. 대신 듣고 나서 그 목을 내놓고 가면 돼.”

“목을 내놓고 걸어 나갈 수 있는 인간도 있습니까?”

“시도는 해봐. 모르는 일이잖아.”

유렐은 고개를 저었다.

“아쉽네. 더 읽고 싶은 거 있어?”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말을 바꿨다.

“총수에 관한 기록도 열람 가능합니까?”

“총수? 누굴 말하는 거야. 지금은 공석인데.”

“허스 벨루 산트입니다.”

“아, 그 아이. 1등급에 해당하는 사안이라면 얼마든지.”

“제가 볼 수 있는 건 몇 가지나 되죠?”

브라인이 손을 움직였다. 캐비닛이 우르를 몰려들었다. 막대한 서류 뭉치를 담고 있을 캐비닛을 보며 물었다.

“이게 전부 총수에 관한 겁니까?”

“맞아. 이 중에서 유렐이 볼 수 있는 건….”

수염을 툭툭 건드리던 특무대령이 얇은 파일 하나를 꺼냈다. 산처럼 쌓인 정보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안을 살펴봤다. 제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아주 사소한 내용만 적혀 있었다.

이게 1등급의 한계라니.

“아르드헨이 열람 권한을 동결했어.”

“황제 폐하의 명이시면 겸허히 받아들여야겠죠.”

전쟁 영웅의 죽음에 관해 온갖 소문이 떠돌다가 겨우 잠잠해졌다.

이상한 곳을 들쑤셔서 시끄러워지는 걸 황제는 원치 않을 터였다.

“유렐. 너 한가하지?”

“바쁘다고 해도 믿지 않으시겠죠.”

“취조부장이잖아. 여유 부릴 수 있는 자리라는 거 알아.”

브라인이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서 나온 건 기계 장갑이었다. 완성품은 아니었고 손가락과 손바닥이 분리된 상태였다.

“이걸 배달해주면 좋겠어.”

“심부름할 나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안 할 거야?”

유렐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다가갔다.

“담을 거라도 주시죠. 이대로 들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당연히 줘야지.”

브라인이 종이로 된 상자에 기계 장갑을 담았다. 덮개를 닫고 상자를 들어봤는데, 생각보다 무겁지는 않았다.

“어디에 가져다주면 됩니까?”

“관리국 안에 있는 연구실. 덴스라는 아이한테 가져다주면 돼. 그 아이가 내 전용 관리사거든.”

덴스라.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젊은 천재.

거병 개발을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

최근에 모듈 탈취 건으로 구금됐던 터라 대화도 몇 번 나눠봤다.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던지라 얼굴 보기가 살짝 불편했다.

“왜? 어려워?”

“아닙니다. 가는 길에 전달하겠습니다.”

“고마워. 유렐은 역시 착한 아이네.”

“이것도 장부에 올릴 수 있는 건가요?”

기록보관서 이용지침 세 번째 장.

-특무대령의 심부름은 되도록 들어주는 게 좋다. 그녀의 기분이 좋아지면 장부에 이름이 올라가고, 나중에 소소한 선물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걸 묻는 사람은 유렐 너밖에 없어.”

“정확한 게 좋은 겁니다.”

“올려둘게. 포인트를 착착 쌓아놔. 나중에 좋은 선물을 줄 테니.”

“기대하겠습니다.”

군례대신 묵례를 올리고 돌아서려던 때였다. 브라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렐. 너 기시감을 자주 느껴?”

“아니요. 전 데자뷔를 느낀 적이 드믑니다.”

“그래?”

유렐은 특무대령을 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그냥 요즘에 자꾸 기시감이 들어서. 뭔가가 계속 반복되는 느낌이야. 똑같은 걸 계속 보고 있는 듯해.”

“…피곤하시면 주무십쇼.”

“역시 잠이 모자라서 그런 거겠지? 유렐은 똑똑하네.”

콧노래를 부르며 털을 빗는 브라인이었다. 유렐은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푸른색 실선에 주의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 * *

“아빠 옆에서 떨어지면 안 돼. 궁금한 게 있어도 참고. 마음대로 움직이면 견학이 취소될 수도 있어.”

올란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하란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겠어요. 얌전히 있을게요.”

심장이 두근거리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됐지만, 오늘은 아빠 말을 잘 들어야 했다.

아빠 손을 꽉 쥐며 걸음을 뗐다.

바삐 움직이는 어른들 사이로 불꽃이 번쩍였다. 쇳덩이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녔고, 진득한 액체가 담긴 수조가 늘어서 있었다.

가하란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에 있는 모든 걸 기억에 담았다.

거병관리국.

꿈에 그리던 그곳으로 마침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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