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90화 (63/558)

제90화

인사를 마친 유렐은 특무대령의 말을 기다렸다. 털로 덮인 귀가 잠깐 파닥거렸다.

“유렐, 맞지?”

“예. 맞습니다.”

“오랜만이네.”

“저번 달에도 뵈었습니다.”

“그랬나?”

유렐은 옆으로 비켜 섰다. 브라인 특무대령은 머리에 살짝 올려둔 군모를 벗으며 접수원에게 걸어갔다.

“날씨가 너무 더워.”

“제법 선선하던데요.”

접수원이 대답했다.

“인간족은 더위를 모르는 거 같아.”

“대령님께서 더위에 너무 약하신 거예요.”

특무대령이 접수원에게 검은색 손을 내밀었다. 접수원이 큼지막한 빗을 건넸다.

“밥 먹고 와서 자야 하는데. 유렐, 바쁜 일이야?”

브라인이 유렐을 바라봤다. 새빨간 눈동자가 조금 부담스럽다.

“아주 급한 일은 아닙니다만, 뒤로 미루고 싶은 일도 아니죠.”

“유렐은 나한테 뭘 줬더라?”

“저번에 향수를 하나 선물해 드렸죠.”

브라인의 검은 코가 씰룩거렸다.

“그랬었지. 그 향수는 꽤 마음에 들었어.”

“이번에 아는 상단을 통해 제법 괜찮은 향초를 구했습니다.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얼마나 설명하던지.”

“숙면?”

브라인이 관심을 보였다.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선물로 가져오겠습니다.”

“유렐은 인간족치고는 마음 씀씀이가 좋아. 구린내를 풍겨도 이렇게 솔직한 편이 난 더 좋더라.”

빗을 움켜쥔 브라인이 머리털을 쓱쓱 빗었다. 눈두덩 쪽도 살살 긁어내리더니 입가와 목 아래로 빗질을 이어갔다.

흰색과 회색 털이 풀풀 날렸다. 유렐은 가볍게 손을 저어 얼굴로 날아드는 털을 치워냈다.

“덥지만, 그래도 가을이 오긴 했나봐. 털갈이하는 걸 보면.”

바닥에 털이 쌓였다. 접수원은 익숙하다는 듯이 빗자루를 가져와 쓸어냈다.

“들어와.”

특무대령이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렐은 군복에 붙은 털을 떼어낸 후 걸음을 옮겼다.

문턱을 넘자마자 어지럼증이 몸을 덮쳤다. 강렬한 마나 파장이었다. 이 감각은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3층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기록보관서.

기록보관서의 구조는 단순했다. 저 멀리 있는 책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길이 뻗어 있고, 양측으로 무수히 많은 캐비닛이 놓여 있을 뿐이다.

유렐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푸른색 선이 양쪽으로 길게 그어져 있다. 안내선이자 생명선이다.

“알고 있지? 멋대로 들어가면 난 책임 안 져.”

“알고 있습니다.”

“길 잃지 않게 선 잘 보고 따라오고. 인간족은 호기심이 많아서 종종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선 밖으로 나가버리곤 하니까.”

브라인이 손가락으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쇠로 만들어진 검은 손가락.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장갑이었다. 아니, 저걸 장갑이라 부를 수 있나?

‘바라라족’의 손은 인간처럼 가늘고 길게 뻗지 않고, 둥글고 뭉툭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특수한 기계 장갑을 끼고 사무를 보는 것이고.

장갑을 벗으면 토끼 앞발과 비슷한 형태겠지, 유렐은 속으로 생각하며 걸음을 뗐다.

“처음 봤을 때가 언제지?”

브라인이 물었다.

“처음 뵀을 때는 17년 전쯤입니다. 막 임관한 어설픈 군인이었죠.”

“그랬지. 까마득한 옛날이라 기억이 잘 안 나.”

까마득한 옛날이라니, 기억이 잘 안 난다니. 하마터면 코웃음을 칠 뻔했다. 모든 걸 기억하는 양반이 저런 말을 입에 담으니 웃길 수밖에.

바라라족은 모든 걸 기억했다. 그렇기에 바라라족 앞에서 거짓말은 의미가 퇴색된다.

완전히 독립된 사건으로 거짓말을 짜낸다면 바라라족도 속일 수 있지만,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몇 없을 것이다.

앞서가는 브라인이 축 늘어진 귀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흰 털이 우수수 떨어진다.

“인간족은 편하겠어. 털갈이를 안 하잖아.”

“수명도 짧은데 털갈이까지 하면 슬프지 않을까요.”

“짧게 산다는 게 그리 나쁜 건 아니야. 오래 살아봤자 재미난 꼴은 못 보거든.”

유렐은 살랑거리며 추락하는 털을 바라보았다. 푸른 선 안쪽으로 떨어진 털들은 바닥에 안착했지만, 선 바깥으로 나간 털들은 허공에서 종적을 감췄다.

사라진 털들이 어디로 갔는지, 유렐은 알 수 없었다. 푸른색 실선 바깥은 상식을 벗어난 곳이었다.

바라라족의 심상세계가 구현된 공간.

담당자인 브라인의 안내 없이 실선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현실로 되돌아올 수 없는 미아가 될 것이다.

물론 귀환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담장자인 브라인이 약간의 수고를 들여 찾으면 되니까.

문제는 그 약간의 수고조차 귀찮아하는 게 브라인이었다. 기분이 좋을 때야 선을 벗어나자마자 잡아끌어 주지만, 재수 없으면 며칠을 캐비닛 사이에서 헤매야 한다.

유렐은 ‘기록보관서 이용지침’ 첫 번째 장을 떠올렸다.

-기록보관서 안에서 넘어질 거면 앞으로, 혹은 뒤로 넘어져라. 선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코가 깨지고 두개골이 깨지는 게 낫다. 단, 특무대령의 기분이 좋아 보이면 용기를 내어 텀블링해보자.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이용지침 책자에는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다.

“요즘 군식당 밥맛이 예전 같지 않아. 하븐 조리장은 이제 안 나오는 거야?”

“아흔이 넘었습니다. 조리기구를 쥘 힘도 없으시겠죠.”

“난 그 사람이 만들어준 밥이 좋았는데. 아쉬운 일이야.”

책상에 도착했다. 브라인이 의자에 철퍼덕 앉았다. 길게 뻗은 수염을 기계 손으로 쓱쓱 쓸면서 서류를 살폈다.

“조금만 기다려줘. 먼저 봐야 할 일이 있어.”

“천천히 하시죠.”

“심심하면 이쪽 일지는 봐도 돼. 내가 잠깐 열어줄 테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브라인의 붉은 눈이 아주 잠깐 검게 변했다. 오른쪽에 줄지어 선 캐비닛이 소리 없이 미끄러지더니 길을 만들어주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표시는 해뒀으니까 그 선 밖으로는 나가지 마. 오늘은 인간 찾으러 다니기 싫은 날이거든.”

“알겠습니다. 조심하도록 하죠.”

“그래, 그래. 유렐은 착한 아이니까 약속을 어기진 않겠지.”

착한 아이. 떨떠름하지만 대꾸할 말은 없었다. 바라라족 시선에서 보면 인간은 모두 아이일 테니까.

뒷짐을 진 채 캐비닛 사이를 누비다가 서류 하나를 꺼내 들었다. 휘갈긴 글씨체로 ‘오크족 주술사 관련 기록’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 봐도 괜찮은 거겠죠?”

유렐은 작게 말했다. 브라인은 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마 들었을 것이다. 토끼를 닮은 저 커다란 귀는 장식품이 아니니까.

“봐도 돼. 재미는 없지만.”

허락이 떨어졌다. 유렐은 폴더를 들추고 안을 살폈다. 특무대령의 말대로 흥미로운 정보는 아니었다.

대륙 곳곳에서 발견된 오크족 주술사의 이야기를 모아둔 건데, 어처구니없는 내용뿐이라 애들용 동화를 읽는 기분이었다.

물론 여기에 기술된 내용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실에 기반한 것일 테지만.

“대령님.”

“왜 불러.”

“대령님과 오크족 주술사. 누가 더 오래 살았습니까?”

“단일 개체로서의 수명을 말하는 거면 내가 오래 살았지. ‘우리’는 오래 사는 게 유일한 장점이자 단점이니까.”

우리.

바라라족을 칭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생명체가 아닌 정보의 집합으로서 비교하자면, 주술사 쪽이 훨씬 나이 들었지. 거긴 계승을 하니까.”

“계승이라면….”

“선대한테 모든 걸 이어받는 거야. 받고 또 받고. 근데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인격까지 물려받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지, 아니면 격리된 정보만 물려받아 자아를 유지하는지. 우리만큼이나 그 여자도 비밀이 많거든.”

특무대령이 이어서 말했다.

“나중에 그 초록눈을 만나게 된다면 물어봐. 내가 모르는 걸 가져온다면 유렐 너한테 재미난 것들을 알려줄 테니까.”

“기회가 되면 그래야겠군요.”

파일을 덮고 캐비닛을 닫았다. 때마침 브라인이 목소리를 냈다. 대충 정리됐으니까 용건을 말하라고.

유렐은 책상으로 다가가 브라인을 바라봤다.

“신상명세서를 확인하려 합니다. 이름은 ‘밀리언’. 요정의 안뜰 명의자입니다.”

“요정의 안뜰? 거기 음식 맛있지.”

브라인은 검지를 펼쳐 머리 위에서 휘적휘적 저었다. 양측에 늘어선 캐비닛이 퍼즐을 짜 맞추듯 움직였다.

정신없이 이동하던 캐비닛이 한순간 멈추고, 검은색 캐비닛 하나가 브라인 옆으로 왔다.

“어디 보자.”

캐비닛을 열어 안을 살피던 브라인이 파일 하나를 꺼내 넘겨주었다.

“저기 앉아서 봐.”

브라인이 손님용 의자를 가리켰다. 유렐은 파일을 들고 의자에 앉았다.

특무대령이 사유를 묻지 않고 문서를 넘겨줬다는 건 등급 제한이 걸려 있지 않다는 뜻이다.

열람이 자유롭다면 기밀이라 부를 만한 것도 없을 텐데.

헛걸음을 한 걸까, 유렐은 입맛을 다시며 안뜰 셰프의 신상명세서를 읽어내렸다.

이름 밀리언. 군생활을 마치고 둔으로 들어와 가게를 열었다. 군 시절 복무했던 지역은 안둔, 디에도, 카답 등등.

“안둔이라.”

혹독한 한파 속에서 적군과 싸워야 하는 최전방이 안둔이었다. 생환했다는 것만으로도 군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만한 곳이다.

세부 사항을 읽던 유렐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조리병이라니.”

퇴역 사유를 보니 가관이었다.

조리 중 사고로 인한 전역. 적군의 피를 뒤집어쓰고 전역한 게 아니라, 밥 짓다가 군을 떠난 것이다.

후방 병과의 중요성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조리 사고로 인한 퇴역은 웃기지 않는가?

퇴역 군인이 왜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가 됐는지 단번에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끝까지 살펴보았지만 이렇다 할 정보는 없었다. 특수감찰단 단장과의 접점 같은 건 아예 없겠군.

감찰단장이 요정의 안뜰을 도와준 건 그냥 변덕 때문이었을까?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니 이유를 예측하는 것도 어려웠다.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며 파일을 덮으려던 때였다.

종이가 한 장 더 있었다. 반으로 잘린 종이였다. 서류를 위로 넘기는 형식이라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유렐은 눈살을 찌푸렸다.

달갑지 않은 글자가 박혀 있었다.

-검열.

파일을 덮고 브라인에게 다가갔다.

“대령님. 뒤쪽에 검열된 서류가 있습니다만.”

“그렇겠지.”

“이것도 열람하고 싶습니다.”

“보고 싶다고?”

특무대령의 붉은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수분을 머금은 검갈색 코가 씰룩거리고, 수염도 같이 움직였다.

“유렐도 많이 컸네. 보안등급도 이제는 1등급이고.”

“열람 가능한 겁니까?”

“가능해. 대신 서명을 받을 거야. 열람인을 기록해야 하니까.”

유렐은 사인을 마치고 기다렸다. 브라인이 검은색 캐비닛 상단에서 파일 하나를 더 꺼냈다.

“읽을 거면 빨리 읽어. 나 슬슬 자야 할 시간이니까.”

“알겠습니다.”

선 자리에서 파일을 들췄다.

밀리언의 사진과 이름이 보이고, 그 아래 소속된 부대가 보였다.

중앙군 소속 4독립부대.

유렐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작게 말했다.

“마수 전담부.”

예상치 못한 것이 튀어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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