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유렐은 흰색 천으로 자신의 명패를 가볍게 문질렀다.
취조부장이란 타이틀이 나쁘진 않지만 계속 머물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지. 옅게 미소 지으며 명패를 내려놓았다. 책상 끝선에 맞춰 정돈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확정됐습니다.”
집무실로 들어온 부관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유렐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서류를 받았다.
“금일 13시에 공식 발표가 날 겁니다. 부장님께서 예상하신 명단대로 처분이 내려졌습니다.”
“이제야 끝이 났군. 자네도 수고했네.”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감이 단숨에 사라졌다. 둔을 옭아매던 사건이 마침내 종결된 것이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지?”
“헌트 중사가 11시 30분에 방문 예정입니다.”
“저번에 취소했던 그거군. 알겠네. 따로 보고할 사항 없다면 자네는 점심 먹고 퇴근하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군례를 올린 후 방을 빠져나가는 부관이었다. 유렐은 소파에 몸을 기댄 후 두 다리를 뻗어 테이블에 올렸다.
“가야 할 사람들이 갔군.”
모듈 탈취 미수 건의 책임을 지고 간부급 세 명이 옷을 벗었다. 현장책임자 두 명도 제적당했다.
모두가 예상했던 선에서 사건이 잘 마무리되었다.
“다 웃는데 한 사람만 뾰로통하겠군.”
유렐은 특수감찰단 단장을 떠올렸다. 둔의 행정처, 군부, 관리국 쪽 수장들은 활짝 웃고 있겠으나, 단장만큼은 심드렁한 얼굴로 사건을 종결했을 것이다.
“이후의 문제는 제 개인적인 시간을 들여 조사할 겁니다. 뭔가가 남아 있어요. 종양의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곪아서 터져버릴 테니, 터지기 전에 들춰내 봐야죠.”
사흘 전에 칼리고 단장이 찾아와 한 말이었다. 다들 덮지 못해 안달인 사건을, 유일하게 파헤치려 하고 있었다.
귓가에 단장의 웃음소리가 맴도는 것 같았다. 하루살이를 쫓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서류를 마저 읽었다.
딱딱하고 형식적인 서류인데, 보고 있으면 환하게 웃고 있는 디온 사령관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참 대단한 양반이었다. 정치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사건이었는데, 아무런 타격 없이 일을 마무리해 버렸다.
“총집사와 어떤 거래를 주고받았을지.”
이번 사건을 통해 디온 사령관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아주 약간이지만 의회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으니까.
이걸 빌미로 황가, 황제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정말 바람 잘 날 없는 둔이었다. 그래서 이 도시를 사랑하는 거지만.
유렐은 세부 사항을 읽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관이 따로 적어놓은 것인데, 엉뚱한 이름이 섞여 있었다.
“잠깐 들어오게.”
안으로 들어온 부관을 보며 말했다.
“자네가 따로 적어준 이거 말인데, 자세한 사유를 알고 있나?”
서류 밑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행정처 부처장 왈즈가 정직 처분을 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이번 건과 상관없는 사람일 텐데. 게다가 평판은 물론 실적도 좋은 친구였고.”
“특수감찰단 단장이 직접 내사를 시행했고, 그 결과 3개월의 정직 처분을 받았습니다.”
“내사? 이번 모듈 건과는 다른 일로?”
부관이 서류 한 장을 더 내밀었다.
“관심이 있으실 것 같아 따로 준비해 뒀습니다.”
“이래서 난 자네가 좋아. 수고했네.”
유렐은 새로 받은 서류를 찬찬히 읽었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온갖 트집을 잡는 특수감찰단이지만, 단장이 직접 손을 쓰는 건 드문 일이었다.
부처장이 정직을 당할 정도면 꽤 밉보였거나, 죄질이 안 좋다는 건데.
“관료 품위유지의무 위반.”
케케묵은 법률이 등장했다.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어기면 손가락질당하는 선에서 끝나는 그런 법.
지난 수십 년간 이 죄목으로 처벌받은 관료가 존재하긴 했었나?
3개월 정직이면 옷을 벗으라는 의미였다. 1개월은 교육, 2개월은 협박이지만 3개월은 돌이킬 수 없는 선언이었다.
정직 3개월 후에 기다리고 있는 건 파면뿐. 아마 당사자한테는 파면이란 두 글자가 이미 배달됐을 것이다. 남은 3개월, 아니 한 2주 동안 인수인계하다가 넥타이를 반납할 터였다.
행정처 차기 수장의 권력을 지닌 양반이, 고작 품위유지를 어겼다고 해서 목이 날아가다니.
의구심을 품은 채 계속 읽어내렸다.
수사 과정을 모두 공개하는, 아주 청렴하다고 광고하는 감찰단답게 주요 내용도 알기 쉽게 정리돼 있었다.
유렐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부처장 왈즈는 사적 친분을 위해 공권력을 사용했으며, 이는 관료로서 지켜야 할 품위를 손상한바….”
품위유지보단 공권력 남용에 초점을 맞춘 걸까.
하지만 공권력 남용이라 하기에도 좀 애매한 건이었다.
부처장이 한 일이라고는, 모듈 탈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특정 가게를 몇 번 찾아간 게 전부니까.
여기에 사심이 담겼다고 한들 정직 3개월을 내릴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유렐은 자료 중앙에 박힌 이름을 유심히 보았다.
‘요정의 안뜰.’ 모듈 탈취 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특정한 레스토랑이었다.
둔에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둔 최고의 식당.
유렐은 자료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문 옆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부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가 조사한 이거 말인데.”
“예, 말씀하시죠.”
“부처장이 요정의 안뜰을 들쑤신 이유가 뭔가? 사적 친분이라 적혀 있는 걸 보면 대충 짐작은 가는데.”
부관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부처장의 지인이 요정의 안뜰 셰프와 마찰이 있었다고. 부처장은 셰프를 골려줄 마음으로 조사를 명령한 것이었다.
“흔한 일이군.”
“예. 죄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일이죠.”
“근데 3개월 정직, 파면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왈즈, 이 친구가 감찰단장한테 침이라도 뱉은 건가?”
“그럴지도 모르죠.”
유렐은 살짝 웃은 후 방으로 돌아왔다. 정황을 파악했으나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 일로 행정처의, 그것도 둔 행정처의 부처장이 파면당하다니.
안뜰 셰프와 감찰단장.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는 건가?
왈즈가 사적 친분을 발휘해 안뜰을 건드렸듯, 감찰단장 역시 셰프를 위해 손을 쓴 것일까?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특수감찰단 단장의 일이라면 따로 조사해볼 만했다.
의외의 수확이 생길지도 모른다. 단장의 약점을 잡아낼 수 있다면 더더욱 좋고.
약점을 잡았다고 해서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치부를 알려주고 고칠 수 있게 유도할 것이다.
감찰단장에게 빚을 지우는 것만으로도 득이 될 테니까. 생각만으로도 흐뭇해지는 일이었다.
“부장님. 헌트 이등 중사가 찾아왔습니다.”
부관 말에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들여보내게.”
쥐고 있던 서류를 뒤집어서 책상에 내려놓았다. 잠시 후 헌트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식사는 했나?”
유렐은 책상에서 나와 소파를 가리켰다. 헌트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이따가 아내와 먹기로 했습니다.”
“부인과 점심이라. 애처가로군.”
유렐은 헌트의 눈을 바라봤다.
“점심 먹어야 할 사람을 오래 붙들어 둘 수도 없으니 본론으로 바로 넘어가지. 오늘은 나한테 선물을 주러 온 건가, 아니면 선물을 받으러 온 건가.”
“전 부장님께서 확신이 들 때까지 제공할 뿐입니다.”
헌트가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저번에 자네가 알려준 정보는 나름 유용했네. 총집사의 손자분과 인사를 나눴으니까.”
사소한 인연이 굵은 밧줄로 변하는 게 인생이었다. 헌트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유용했다니 다행이군요. 이번 것도 부장님께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헌트가 벗어뒀던 군모를 쓰면서 일어섰다.
“벌써 가려는 건가?”
“쓸데없이 부장님의 시간을 뺏을 순 없으니까요.”
“그게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를 빨리 만나고 싶은 거겠지.”
“하하, 그럴지도 모르죠.”
“조만간 내가 또 연락하겠네. 그때는 센터라인에 대해 얘기해 보자고.”
“전 부장님이 이끌어주시는 대로 가겠습니다.”
“부담스럽지만, 나쁘진 않군. 식사 맛있게 하게.”
헌트가 군례를 올리고 돌아섰다. 유렐은 헌트가 남기고 간 쪽지를 펼쳤다.
-잔뿌리 조사를 위해 ‘사다리 정무관’이 둔에 들어와 있을 확률이 매우 높음.
의회에게 스토아 요원이 있다면, 황제한테는 사다리 정무관이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베일에 감춰져 있어 행방을 알아내는 것조차 힘든 자들이었다.
유렐은 쪽지를 들고 책상으로 향했다. 타들어 가는 향초 끝에 쪽지를 가져다 댔다.
불이 번진 쪽지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창문 밖으로 던졌다. 검게 변한 종이가 바스러지며 대기로 흩어졌다.
“독립2군의 엘리트는 확실히 다르군.”
계획도시 둔에서 정보전을 담당하는 독립2군. 사다리 정무관의 위치를 대략적으로나마 알아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세나티아의 총집사가 둔에 있으니, 황제 역시 자신의 사람을 보냈겠지.
당연한 수순이라 오히려 안심됐다. 사다리 정무관을 특정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거기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사다리 정무관. 어떤 면상일지 보고 싶긴 해.”
유렐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둔 중심부로 향하는 마차 한 대를 눈으로 좇고 있을 때였다. 시야 바깥쪽에서 무엇인가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눈동자를 왼쪽으로 굴렸다. 둔의 성벽 밖, 아웃라인 서쪽에서 하늘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경로가 제멋대로군.”
얼마 전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하늘석의 항로가 바뀌었다고. 고도를 점점 낮추며 둔을 통과하는 하늘석이었다. 거리의 사람들이 죄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저 커다란 돌이 둔 중심부에 떨어지면 제법 볼만하겠어, 유렐은 실없는 미소를 짓다가 몸을 돌렸다.
“식사하러 가십니까?”
“아니. 자네가 준 자료에 대해 좀 더 알아보려고.”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야. 자네 보안등급으로는 안 되는 거니까. 얼른 점심 먹고 퇴근하게.”
“대기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필요한 일이 생기면 말씀하세요.”
“자넨 나보다 더 빨리 진급할 상이야. 아무튼 수고하게.”
제3별관을 빠져나와 중앙부로 향했다. 경비 중인 병사의 경례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부 지하에서 일어난 폭파 사건도 수습이 끝나서, 중앙부는 예전처럼 잔잔한 공기가 감돌았다.
군관들과 시선을 교환하며 3층으로 올랐다. 우측 복도 끝으로 가 접수원 앞에 섰다.
테가 두꺼운 안경을 낀 접수원이 명단을 살피며 말했다.
“예약하셨나요?”
“급히 찾을 게 있어서 왔네. 안에 특무대령님은 계신가?”
“식사하러 가셔서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
“기다리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아, 시간은 괜찮은 건가? 예약자가 밀렸다면 다음에 다시 오고.”
“점심 직후라 괜찮습니다. 다만, 식곤증 때문에 대령님께서 문을 잠가버릴 가능성이 있어요.”
“제멋대로인 분이니까. 일단 기다리겠네.”
디온 사령관조차 기다리게 하는 양반이니 불만을 표할 수는 없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대기석에 앉으니 접수원이 신문을 가져다줬다. 둘둘 말린 신문을 펼치고 기사를 읽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유렐은 신문을 내렸다. 특유의 두툼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반으로 접힌 귀를 살며시 흔들며 특무대령이 걸어오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특무대령을 향해 인사했다.
“급히 찾을 게 있어서 왔습니다. 브라인 특무대령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