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88화 (61/558)

제88화

“오늘도 늦으시나 보다.”

가하란은 담벼락 아래를 보며 말했다.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툴이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졸리면 들어가서 자도 돼.”

늘어지게 하품하던 툴이 몸을 일으켜 집으로 들어갔다. 종종 생각하는 거지만, 어쩌면 툴은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게 아닐까?

집으로 들어갔던 툴이 입에 둘둘 만 장갑을 물고 나왔다.

“못 알아듣는구나.”

가하란은 인상을 살짝 쓰면서 안 돼, 라고 말했다. 해가 저물어 골목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불이 꺼진 집도 드문드문 보였다. 야밤에 툴이 컹컹거리며 뛰어다니면 잔소리를 들을 것이다.

“가하란.”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쳐들었다. 웰턴이 고양이를 품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오늘도 올란트는 늦는 거야?”

“네. 그런 것 같아요.”

아빠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가하란은 골목 끝을 바라봤다. 희미한 불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등을 단 마차가 지나간 모양이다.

“나도 바람이나 쐬어야겠다.”

어느새 내려와 옆에 앉는 웰턴이었다.

“베베는요?”

“집에 놔두고 왔지. 데리고 나오면 또 발광할 테니까.”

“베베는 밖에서 길러야 할지도 몰라요. 고양이지만 좀 특이하잖아요.”

“한번 나갔다가 들어오면 한동안은 또 얌전해. 집이 천국이라는 걸 깨닫는 거지. 근데 고양이는 멍청해서 금방 또 까먹어. 그래서 다시 탈출을 감행하는 거고.”

“고양이는 똑똑하다고 들었어요.”

“똑똑한 건 툴 같은 개를 가리키는 거고. 우리 집 그놈은 똑똑한 거하고는 거리가 멀어.”

웰턴이 씩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간식이 들려 있었다. 얇게 민 빵 반죽을 구워낸 거였다. 오독오독 씹으면 제법 고소한 음식이다.

“잘 먹을게요.”

간식을 받아 씹을 때였다. 주변에 깔린 어둠이 한층 더 짙어지는 느낌이었다.

웰턴과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빛을 가리며 하늘석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

가하란은 눈을 깜빡였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하늘석이 이곳을 지나가다니.

“아저씨. 하늘석이 왜 여길 지나가죠?”

“그러게. 나도 여기 살면서 처음 보는 일이야.”

“게다가 좀 낮게 나는 것 같지 않나요? 평소보다 커 보이는데.”

“나도 그 생각 중이야.”

가하란은 중심을 잡으며 일어섰다. 하늘석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낮게 날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하늘석은 정교한 기계처럼 항상 같은 높이로, 똑같은 곳만 돌아다녔는데.

“저러다 떨어지는 건 아니겠죠?”

“설마.”

거대한 돌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멀어졌다. 달빛이 찾아들고 골목이 조금 밝아졌다.

가하란은 엄지손톱보다 작아진 하늘석을 바라봤다. 대체 뭐였을까?

“너무 깊게 고민하진 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변덕을 부린 걸지도 모르고.”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벼락에 걸터앉았다. 웰턴 말이 옳았다. 저건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구조를 파악하려고 애써 봤자 남는 건 없을 것이다.

애초에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고.

“아저씨. 그거 아세요? 하늘석에 용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대요.”

“용? 드래곤?”

“네.”

“난 용 말고 다른 게 있다고 들었는데.”

“다른 거요?”

웰턴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늘석에 관련된 건 사소한 것이라도 흥미가 생겼다.

“비구름과 번개를 만들어내는 기계. 그게 하늘석 안에 있어서 비를 만들어낸대.”

“…그건 아닐걸요. 비구름은 바람이 산을 타고 올라가서 만들어지는 거랬어요. 바람 안에는 물방울이 잔뜩 모여 있는데, 그게 하늘 위에서 무거워지면 떨어지는 거고요.”

“바람이 비가 돼서 떨어지는 것보단 비구름을 만드는 기계가 더 있어 보이지 않아?”

“그게 조금 더 멋있긴 하네요.”

웰턴이 다리를 꼬았다.

“하늘석에 관한 또 다른 얘기가 있는데, 이것도 들어볼래?”

“네!”

“성도에는 대학교가 있다는 거 알고 있지?”

“아빠가 말해줬어요. 세상 모든 걸 탐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맞아. 제국의 한 똑똑 하는 사람들은 전부 거기에 모여 있어. 이 아저씨의 친구 중 한 명도 거기에 있고.”

웰턴은 턱을 살짝 들었다. 얼굴에 자부심이 깃들었다.

“이 골목 태생 중에 그 녀석만큼 성공한 놈도 없지. 아무튼 그 친구가 하늘석에 대해서 얘기해준 게 있어.”

웰턴의 시선이 이제는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하늘석 쪽으로 향했다.

“성도 대학교에는 저 커다란 돌덩이만 죽을 때까지 연구하는 클랜이 따로 있대. 벌써 50년 가까이 이어져 오는 클랜이라니까 대단하지?”

“50년이나요?”

가하란은 손가락을 헤아렸다. 50년.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하늘석을 연구했다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백여 년 전부터 연구는 계속됐다고 하는데, 명맥이 이어진 건 내 친구가 있는 클랜뿐이래. 그럴 수밖에. 몇백 년, 어쩌면 몇천 년 동안 계속 하늘에 떠 있기만 한 돌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건 질리는 일이잖아? 게다가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맞아요. 직접 가볼 수도 없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야 하니까요. 저도 지칠 거예요.”

웰턴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서 하늘석을 연구하는 건 성도에서 괴짜들이나 하는 거래.”

“괴짜요? 아저씨 친구도 그러면 괴짜예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둥둥 떠다니는 돌덩이에 인생을 걸었으니 괴짜라고 볼 수 있지.”

웰턴은 간식을 입에 물며 말을 이었다.

“연구가 길어지다 보니까 자료가 엄청 많다고 해. 개중에는 사실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힘든 것도 많고. 그도 그럴 게, 그 누구도 직접 하늘석에 가서 진실을 확인해 본 적이 없으니까. 다들 땅에서 바라보고 ‘아마 그럴 거야’ 이렇게 예상할 뿐이지.”

웰턴이 손가락 네 개를 펼쳤다.

“40년 전. 클랜의 선임 연구원 중 한 명이 소리 소문도 없이 실종됐데.”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맞아.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대. 괴짜들의 모임이니까 그런 일이 종종 있었나 봐. 그런데 한 달이 넘도록 그 연구원이 모습을 비치지 않자, 그제야 동료들이 수소문을 시작한 거야.”

손날을 이마에 대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웰턴이었다.

“처음에는 가까웠던 동료 한 명이 주변을 뒤적거렸고, 며칠 지난 후에는 클랜원 대부분이 실종자를 찾기 시작했어.”

“말없이 떠나는 건 이해해도, 돌아오지 않는 건 이상했던 모양이에요.”

가하란은 웰턴 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호기심의 부피가 점점 늘어났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니까. 게다가 가족도 있었고. 며칠 정도는 말없이 사라질 수는 있어도 반드시 돌아올 거라 예상했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이 잠적하니까 다들 걱정한 거지.”

“사라진 분을 찾았나요?”

웰턴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금방 찾지는 못했어.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 다시 여름이 왔을 때였어. 클랜원들도 찾는 걸 포기하고 있을 때쯤 노트 한 권이 발견됐지.”

“사라진 연구원의 노트인가요?”

“정답.”

웰턴이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그 노트에는 하늘석에 가기 위한 별의별 방법이 다 적혀 있었어. 물론 클랜에서도 이미 한번씩 시도해본 것들이라 큰 의미는 없었는데, 마지막 장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해.”

웰턴이 손가락을 곧게 펴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드디어 하늘석에 갈 방법을 찾아냈다. 반짝이는 문으로 뛰어들어 그곳으로 갈 것이다. 내 모든 걸 증명하기 위해, 나는 하늘을 향해 위태로운 한 걸음을 내디딜 예정이다.’”

가하란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문으로 뛰어들어 그곳으로 갈 것이다. 실종된 연구원은 정말로 하늘석에 간 것일까?

비장한 얼굴로 말하던 웰턴이 누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으면 굉장히 낭만적이었을 거야.”

“뒷이야기가 있나요?”

“듣고 싶어?”

“안 좋을 것 같지만, 그래도 끝까지 듣고 싶어요.”

“하는 수 없지.”

웰턴이 담벼락에서 내려갔다. 발치에 놓인 돌멩이를 툭 차면서 말했다.

“노트가 발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죽은 연구원이 발견됐대.”

“하늘석에는….”

“갔다가 돌아온 건지, 아니면 가보지도 못하고 죽은 건지 알 수 없지.”

가하란은 담벼락을 움켜쥐며 말했다.

“전 그분이 하늘석에 다녀왔다고 믿을래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평생을 바친 일인데, 허무하게 끝났다면 뭔가 아쉽잖아.”

웰턴이 가하란을 보며 말했다.

“너무 우중충한 얘기였지?”

“아니에요. 전 아저씨가 해주는 얘기는 다 좋아요. 그리고 핀들론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세상에 기쁜 일만 있으면, 기쁘다는 것 자체가 사라질 거래요.”

“영감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았지.”

하늘석에 모든 걸 바친 연구원을 생각할 때였다. 위쪽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위태롭게 빨랫줄을 타고 있는 베베가 보였다.

“아니, 저건 또 어떻게 나왔어! 문 다 닫고 나왔는데.”

웰턴이 빨랫줄 아래서 양팔을 벌렸다. 건물 사이를 가로지른 빨랫줄 중앙에서, 고양이가 뛸 준비를 했다.

가하란도 벌떡 일어나 웰턴 옆으로 갔다. 고양이가 네 다리를 활짝 펴며 떨어졌다. 다행히 웰턴의 품 안으로 안착했다.

“너 때문에 내가 진짜.”

웰턴이 고양이 목덜미를 잡고 돌아섰다. 건물 입구로 걸어가던 웰턴이 잠시 멈춰 섰다.

“나중에 성도에 가게 되면 ‘멜멜 클랜’을 찾아가 봐. 아까 말한 연구원의 노트랑 연구원과 함께 발견된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니까. 내 이름을 대면 내 친구가 아주 친절하게 설명도 해줄 거고.”

“나중에 꼭 가볼게요.”

“하늘석 관련된 얘기가 몇 개 더 있는데, 그건 또 나중에 해줄게. 한 번에 다 하면 재미없으니까.”

아저씬 먼저 간다, 웰턴이 웃으면서 건물로 들어갔다. 가하란은 웰턴과 고양이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골목 끝을 바라봤다.

희미한 달빛이 어둠을 비집고 나온 사람을 비췄다. 가하란은 방긋 웃으며 골목 끝을 향해 뛰어갔다.

“아빠.”

“왜 나와 있어. 시간도 늦었는데.”

“잠깐 나와 있었어요. 툴하고 같이.”

뒤를 돌아봤다. 담벼락 밑에서 같이 기다리던 툴이 안 보였다. 집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아들한테 미안하네. 매일 이렇게 늦게 들어오고.”

“괜찮아요. 기다리는 거 하나도 안 지루해요. 거기다 오늘은 웰턴 아저씨가 재미난 얘기도 해줬어요.”

“웰턴 형이? 무슨 얘기를 해줬는데?”

“하늘석 이야기요.”

“하늘석이라. 나중에 아빠한테도 해줄래?”

“지금 얘기해 줄게요.”

아빠 손을 붙잡고 걸으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집으로 들어와 식탁에 앉을 때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성도에 가면 멜멜 클랜을 찾아가 보려고요.”

“하고 싶은 일이 또 하나 늘었네.”

“그러니까요. 맨날 늘기만 해요.”

“괜찮아. 꿈은 크면 클수록 좋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가하란은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올란트가 식탁 맞은편에 앉았다.

“하지만 꿈이 너무 늘기만 하면 지칠 수도 있지. 그러니 아빠가 우리 아들이 하고 싶었던 일 하나를 이뤄줄게.”

“정말요? 뭔데요?”

“모레, 아빠랑 거병을 보러 가자. 오래전에 한 약속인데 이제야 지킬 수 있게 됐어.”

가하란은 멍한 표정으로 아빠를 보다가 이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정말요? 진짜 거병을 볼 수 있어요?”

아빠는 대답 대신 진한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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