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앉게.”
올란트는 왼편에 놓인 유사 정령을 잠시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았다.
“합법적인 물건이니 너무 의심하진 말아 주게.”
멧시언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예정대로라면 저번 주에 봤어야 하지만, 자네들도 알다시피 일이 생겨서 만남을 미뤄야 했네.”
올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부 지하에서 일어난 폭발 때문에 여러 사람이 바빴을 것이다. 멧시언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고.
“감찰단이 연구팀에서 철수한 걸 보면 사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옆에 앉은 덴스가 말했다.
“곧 공식적인 발표가 나겠지. 예상했던 대로 조용히 마무리될 예정일세.”
“그나마 다행이군요.”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사용인이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올란트는 앞에 놓인 찻잔을 보며 고맙습니다, 라고 말했다.
“덴스한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네. 내가 본 자네는 욕심이 없어 보였거든.”
멧시언이 찻잔을 들며 이야기했다.
“소장님 말씀대로 예전의 저였다면 거절했을 겁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죠.”
“군부에서 부당한 취조를 당한 것이 원인이었나?”
“그런 일을 겪은 것까지는 괜찮았습니다. 만약 홀몸이었다면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여기고 넘어갔을 겁니다.”
말하면서 가하란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홀로 집 안에서 두려움에 떨었을 그 아이를.
“그런데 면회실에서 아들을 만나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가 너무나도 보잘것없더군요. 핏줄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할 정도로 허술했어요.”
“아비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일이로군.”
멧시언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영특한 아이라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보호가 필요하죠. 보호하려면 권력이든 재력이든 힘이 필요하고요. 그래서 덴스 선배에게 제안을 받았을 때 결심이 섰습니다. 순서를 어겨 눈칫밥을 먹더라도 일단 자리를 잡아야겠다고요.”
올란트는 대답을 마치고 멧시언을 바라보았다.
“관료사회에서 순서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 뒤에서 앞으로, 들어온 순서대로 차례차례. 그렇게 형성된 위계는 좀처럼 깨기 힘들지. 하지만 견줄 수 없는 성과를 낸다면 순서를 문제 삼는 이들도 입을 다물게 된다네. 순서보다도 줄을 잘 서는 것이 중요하니까. 올란트 자네라면 필시 그렇게 될 거고.”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줄타기에는 관심 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좋은 연구 환경과 높은 임금이니까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자네한테 정치를 바란 건 아니니까 오히려 반가운 소리군. 하지만 성과를 내면 드러나기 마련이고, 윗사람들은 그런 자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네.”
“최선을 다하겠지만, 성과를 못 낼 수도 있습니다.”
“난 자네가 뛰어난 결과물을 내놓으리라 기대하고 있네. 덴스와 함께 말이지.”
멧시언이 차를 들며 마저 이야기하자고 했다.
올란트는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내려다봤다. 투명한 유리잔 안에 꽃이 피고 있었다.
“요즘은 찻잎도 이런 식으로 모양을 내더군. 차가 우러나오면서 찻잎이 퍼지는데, 그게 마치 꽃봉오리가 펼쳐지는 것 같아 보는 맛이 있네.”
멧시언이 차를 마시며 말했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군요.”
“사치품이란 게 으레 그렇지. 우리가 평생 주무르는 기계도 어찌 보면 사치품 아니던가?”
거병과 사치품.
올란트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차를 마셨다.
“정제된 마나, 금적철을 비롯한 값비싼 광물. 거기에 숨만 내쉬어도 돈이 빠져나가는 인적자원. 대륙 최고의 사치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덴스가 멧시언의 말을 받았다.
“전쟁 말기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거병은 격납고 속에서 잠들어 있네.”
멧시언의 눈동자가 유사 정령으로 향했다.
“한 5년 정도 됐을 게야. 마지막으로 전장에서 거병이 움직인 것이. 그것도 연합왕국 측에서 먼저 내보냈기에 대응용으로 움직였을 뿐, 작전에 투입된 건 아니었지.”
“사실상 5년 전에 전쟁은 끝났죠. 그때부턴 사상자도 거의 없었다고 들었고요.”
올란트는 차를 마시며 두 사람의 얘기를 귀담아들었다.
“그렇지. 5년 전부터 지금까지, 거병은 행사용으로만 사용됐네. 사기증진용으로써 가끔 기동식을 가졌어. 그마저도 비용 문제 때문에 월 단위로 움직이던 걸 분기, 반기, 이제는 연 단위가 됐지. 거병 기동식에 맞춰 축제가 열리니 무슨 말을 더 하겠나.”
“평화의 시대에 돈 먹는 은빛 거인은 설자리가 없으니까요.”
덴스가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휘 저었다. 한데 뭉쳐서 피어올랐던 찻잎이 회오리치는 물살에 실려 형태를 잃어갔다.
“학자들은 이번 평화가 꽤 오래 지속될 거라 전망했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전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건 다 얻어냈으니, 이제 내실을 다질 때거든.”
멧시언이 올란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덴스가 말한 대로 평화의 시대에 거병이 낄 자리는 없지. 올란트, 자네가 생각하기에 향후 거병은 어찌 되리라 보는가?”
올란트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덴스 선배에게 들은 얘기를 기반으로 몇 가지만 얘기해 보겠습니다.”
올란트는 지난번 덴스의 집에서 들었던 말을 상기하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거병의 소형화를 추진 중이라 들었습니다.”
“그게 가장 큰 줄기기도 하지.”
“덴스 선배는 소형화된 거병이 전장에서 어느 정도의 효율을 발휘할지 기대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두 분의 대화를 들어보니 소형화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보게.”
올란트는 덴스를 힐긋 보았다. 선배는 눈웃음 지으며 차를 마실 뿐이었다.
“이번 연구건은 황실과 의회가 아닌 성도 행정국의 지원으로 이루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알렝 국장이 지지해주고 있지.”
“만일 전쟁 대비로 소형화를 준비 중이었다면 다른 곳에서도 지원을 받는 게 편하죠. 물론 비용 낭비라며 반대가 심하겠지만, 공식적으로 진행하는 편이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올란트는 말을 잠시 멈췄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능성을 점검한 뒤 타당한 것들을 추려냈다.
“영토 확장. 소형화한 거병의 사용처는 미개척지입니까?”
멧시언이 흡족한 얼굴로 덴스를 보았다.
“소장님. 아주 쓸 만한 일꾼이죠?”
“자네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봐서 알고 있네.”
의자에 기댄 멧시언이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은 이미 넓은 땅을 가졌네. 하지만 영토 분쟁은 제국 내에서 끊이질 않고 있어. 당연한 일일세. 기름진 땅은 한정돼 있으니까.”
멧시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떨어진 책상으로 향했다.
돌아온 멧시언 손에서는 제국 전역 지도가 들려 있었다. 지형이 세세하게 표현된 군사용품은 아니었다.
멧시언이 펜을 들었다.
“제국의 심장인 성도조차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미개척지가 기다리고 있지. 근방에 사는 소수 부족들의 안내를 받아 초입까지는 갈 수 있어도, 여전히 그 심부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몰라.”
붉은색 잉크가 묻은 펜촉이 지도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붉은 테두리가 전역 지도 곳곳에 생겼다.
몇몇 개는 올란트도 아는 미개척지였다. 적색 숲, 울음 산맥, 로카타 고원, 잔잔한 바람 사막.
“대륙을 양분한 제국조차 수많은 미개척지를 품고 사는 실정이지. 뭐, 연합왕국도 사정은 비슷하고.”
“이렇게 보니 정말 많군요.”
올란트는 지도를 살피며 말했다.
“몇몇 곳은 뛰어난 랍파들과 사냥꾼, 그리고 개척팀을 통해 안전루트가 마련됐네. 안전루트를 중심으로 개척사업도 진행 중이고. 하지만….”
멧시언이 다시 펜을 들었다. 붉은 테두리 바깥쪽에 빗금을 여러 차례 그었다.
“안전하다고 알려진 이쪽 지역에서 마수가 발견됐네.”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여러 곳에 줄을 그었다. 늘어나는 붉은 선을 보며 올란트는 눈을 좁혔다.
“최근 마수들이 목격된 곳일세. 예상 범위이긴 하지만 그래도 출몰 빈도가 높아졌어.”
“마수들이 미개척지에서 빠져나온 걸까요?”
“그럴 확률이 높긴 하지만,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볼 수도 있지.”
“…미개척지로 분류해야 할 지역이 늘어나고 있군요.”
멧시언이 펜을 놓았다.
“정확한 사실은 아무도 모르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올란트는 입 안에서 ‘마수’란 단어를 몇 번이나 굴려보았다.
‘몬스터’라 부르는 괴이한 생명체.
훈련받지 않은 인간은 마수를 상대할 수 없고, 설령 훈련을 받았다고 한들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심도 몇의 마수가 발견된 겁니까?”
“2에서 3일세.”
“미개척지로 분류할 수 있는 수준이군요.”
미개척지로 분류할 때 가장 먼저 고려되는 사항이 마수의 출현 빈도와 출현한 마수의 심도였다.
심도 뒤에 붙는 숫자가 높을수록 대항하기 어려운 마수였다.
심도 3이면 훈련을 받은 군인을 투입해야 토벌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심도 3 이상의 마수가 자주 출몰한다면, 그곳은 미개척지로 분류된다. 심도 4 이상의 마수가 발견되면 출현 빈도에 상관없이 바로 지정되고.
“‘잔뿌리’에 대해 알고 있겠지.”
멧시언의 질문에 올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잔뿌리의 돌출 빈도가 최근 늘고 있네.”
“마수가 늘어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요?”
“연구자들의 말에 따르면, 잔뿌리에서 나온 마나에 노출되면 마수가 된다고 하지만… 사실 확인은 어렵네. 정제되지 않은 마나에 닿는 순간 어찌 될지, 다들 알고 있으니까.”
뿌리는 여러 이름을 갖고 있었다.
생명의 원천, 마나의 길, 힘의 근원, 생과 소멸의 진원지.
지하 깊숙한 곳에서 흐르는 거대한 힘의 줄기가 때때로 지표면을 뚫고 나오는데 그걸 ‘잔뿌리’라 불렀다.
올란트는 어릴 때 학습한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멧시언의 말을 들었다.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네. 이런 적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 근방에 사는 시민들 입장에서는 생과 사가 달린 중요한 문제지.”
멧시언의 손가락이 붉은색 빗금 주변을 가리켰다. 그곳에 소규모 마을이 있는 듯했다.
“인간과 인간끼리의 전쟁은 끝났으니, 이제 다른 것과의 전쟁을 준비해야겠지.”
올란트는 지도를 보며 말했다.
“마수를 상대해 영토를 넓히는 사업이라면, 의회의 황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지 않습니까?”
이번 프로젝트는 의회와 황가 모르게 진행된다고 했다.
“말했다시피 이번 건은 알렝 국장이 뒤를 봐주고 있네. 자네가 정치에 관심 없다고 했지만,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올란트는 입을 살며시 다물었다. 단숨에 파악이 끝났다. 사실 알렝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던 사안이었다.
“개척지를 시민의 땅으로 만들 생각이시군요.”
“그건 최종 바람일세.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 아마 시끌벅적해지겠지.”
“영토를 가진 귀족들의 반발이 심할 텐데요.”
“믿는 구석이 전혀 없지는 않네.”
올란트는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있군요.”
“정치에 관심 없다면서 너무 잘 아는군. 어디서 배운 겐가?”
멧시언의 물음에 올란트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직까진 모든 게 구상 단계일세. 소형화가 이루어지고, 마수를 효율적으로 토벌 가능해진다면 그때 가서 정치적인 문제를 꺼내 들 수 있지. 지금은 개발이 우선이고.”
멧시언이 지도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