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86화 (59/558)

제86화

단장이 티스푼으로 커피를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네. 일단은 해결됐다고 봐야겠죠.”

“이번 사건의 배후가 어디인지도 밝혀졌나요?”

“아니요. 아쉽게도 거기까지 파고들지는 못했어요. 제국의 모든 물자가 오가는 이곳을 마비 상태로 계속 둘 수 없으니 일단락 지은 겁니다. 진범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죠.”

칼리고가 빈 잔을 내려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방금 말한 건 2급에 해당하는 사안이니, 어디 가서 발설하진 말고요.”

쉽게 툭 던진 말이 2급 기밀이라니. 밀레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촉이 이번 사건에서는 별다른 힘을 못 썼네요.”

“촉이요?”

“저는 직감, 촉, 육감. 이런 게 발달해 있거든요. 즐거운 사건으로 절 안내하는 그 친구들이, 이번에는 조용히 입을 닫고 있어요. 곤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 중이에요. 얼마나 큰 사건이 뒤에 기다리고 있을지.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우니 제 촉이 갈피를 못 잡는 거겠죠.”

기대라니. 둔이 뒤집힌 사건조차 칼리고 단장한테는 여흥에 불과한 모양이다.

“바루새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단장이 툭 던진 말이었다.

“그걸 어떻게….”

“첼 님께 들었어요.”

단숨에 이해됐다. 그래도 의외인 건 총집사가 그 이야기를 기억했다는 점이다.

“밀레나 양은 기대주거든요. 다들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죠.”

“그 정도는 아니에요.”

대답과 동시에 가하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작 사흘 만에 내 체스 실력을 따라잡고, 이제는 훌쩍 뛰어버린 친구.

우수하다는 말을 듣고 우쭐하기에는 세상에 재능 있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당장 엄마만 생각해도 숨이 턱 막혔다. 엄마의 위업을 따라가려면 대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밀레나 양은 시민들과 사귀는 데 있어 어색함이 없나 보네요.”

단장이 건너편에 있는 여관을 보며 말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하란과 제니가 생각나 괜히 미소가 지어진다.

“어머니의 영향이 커요.”

“역시나 자유로운 엔첸세의 피를 이어받았군요.”

칼리고가 목소리를 살짝 낮추었다.

“본토 쪽 생도들과 마찰이 있겠어요. 본격적으로 정치 입문하는 친구들도 있을 테니.”

“마찰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마냥 편한 것도 아니죠.”

“사람은 정치하는 동물이라 어쩔 수 없는 문제예요. 여기 휘둘리고 저기 휘둘리고. 골치 아픈 일이죠.”

정치는 넌덜머리 난다면서 씩 웃는 단장이었다.

밀레나는 잔을 움켜쥐었다.

특수감찰단 단장과 독대하는 건 두려우면서도 귀중한 경험이었다. 헛되이 놓칠 수 없는 기회. 용기를 조금 내보기로 했다.

“단장님.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전 질문하는 것보다 받는 걸 좋아합니다. 아니, 둘 다 좋아하긴 하죠.”

밀레나는 물을 조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저희 동기는 세 파벌로 나뉜 상태예요. 본토, 신흥, 시민.”

“어디든 그렇죠. 황가와 의회란 거대한 집단을 필두로 본토와 신흥, 시민이 대립 중이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말씀하셨다시피 정치권에 입문하는 동기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내부 분위기가 안 좋아졌어요. 최근 성도 거병관리국 인사 이동 건이 기폭제가 됐고요.”

“여러모로 시끄러웠던 일이니까요.”

“전 파벌 싸움에 흥미가 없어요. 지루하거든요. 어머니가 그랬듯이 저도 엔첸세의 이름을 내걸고 파벌 구도에서 한 걸음 벗어났어요.”

“중립을 선언하는 건 개인의 자유니까요. 문제 될 건 없죠. 하지만 밀레나 양은 좀 위태로울 수도 있어요.”

핵심을 짚어내는 말이었다.

“전 태도를 바꾸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처럼 제 자유를 누리고 싶고요. 하지만 동기가 그러더라고요. 엔첸세도 결국은 본토 귀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부정할 수는 없죠. 다시금 1등 귀족 회동이 열린다면 엔첸세 역시 부름을 받을 테니까요. 물론 필렌 님은 알아서들 하라며 얼굴도 안 비치시겠지만.”

엄마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강제성을 띤 제안조차 거절할 수 있는 것이 필렌 엔첸세니까.

“어머니의 부재가 길어지고 있어요. 거기에 내년이면 저 역시 좋든 싫든 ‘실버 룻’에 참석해야 하고요.”

“실버 룻.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3등 귀족 이상, 열 살에서 열아홉 살 사이의 젊은 귀족들이 모이는 거였죠? 주기는 2년이고.”

“예, 맞습니다.”

“아직도 이어지나 보네요.”

단장이 계속 얘기하라면서 손짓을 주었다.

“요즘 들어 계속 이런 생각이 들어요. 어머니 곁을 떠나서도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어머니가 만든 아늑한 쉼터에서 어리광만 부리는 건 아닐까.”

권력 다툼은 진부하고, 정치 싸움은 따분했다. 관심을 두어야 할 흥미로운 것들이 세상천지에 널렸는데, 재미도 없는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당분간은 이런 태도로 일관해도 괜찮을 것이다.

정치적 입지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해도 상관없을 것이며, 파벌 싸움에 참여하지 않아도 불이익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제동이 걸릴 것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지만, 아직 그럴 능력이 안 돼요. 엔첸세란 방패막이 없이, 어머니처럼 자유롭고 싶은데 도저히 감이 안 잡혀요.”

“이해합니다. 밀레나 양의 어머니는, 필렌 님은 아주 특수한 경우니까요. 그분처럼 산다는 게 쉽지 않죠.”

“어머니처럼 살아가고 싶지만 능력이 안 된다면, 결국 어느 한쪽을 택해야겠죠?”

단장이 스푼을 입에 물었다. 창밖을 보며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장난스럽게, 혹은 가볍게 받아들이고 쉽게 답해줄 줄 알았는데.

밀레나는 디저트를 조금 잘라 입에 넣었다. 처음 먹었을 때보다 단맛이 줄어들었다. 혀가 단맛에 적응한 걸까.

“보통 사람은 말이죠, 환경을 이겨내지 못해요. 환경을 이겨낸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게 힘든 일이거든요.”

단장이 티스푼을 내려놓았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자신이 처한 환경을 이겨낸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그리고 필렌 님 역시 환경을 이겨낸 사람 중 한 명이죠.”

“어머니는… 위대한 기사니까요.”

“위대한 기사. 맞아요, 위대하죠. 근데 그거 아세요? 위대하다고 해서 시작부터 위대했던 건 아니에요. 필렌 님은 굉장히 서투른 사람이었죠.”

“어머니가요?”

밀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이 이어지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제가 막 스무 살이 됐을 때 만난 필렌 님은 싫은 소리를 못 해 손해를 보는 사람이었어요.”

“정말요?”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사람이 순하면 그 순한 성격을 이용해 먹으려고 주변에 못된 놈들이 달라붙죠? 과거의 필렌 님이 그랬어요. 여기저기 휘둘렸죠.”

“상상이 안 돼요.”

“아른고개의 푸른 기사를 떠올리면 정말 믿기지 않는 이야기죠. 하지만 사실이에요. 정치적으로도 많이 이용당했죠. 당시 엔첸세는 지금처럼 자유롭지 못했고요.”

단장이 팔짱을 꼈다.

“하지만 필렌 님은 바뀌었어요. 당면한 문제와 본인이 처한 환경을 이겨내고, 지금의 엔첸세를 만들었죠.”

밀레나는 집중하며 단장의 입을 보았다.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했다.

“가만 보면 지금의 밀레나 양과 비슷한 처지였죠. 지닌 능력도 부족하고 주변 환경도 여의치 않고.”

“어머니는 어떻게 해결하신 거죠?”

단장이 눈에 힘을 주었다.

“알고 싶으신가요?”

“네.”

“좋아요. 제가 필렌 님한테 잔소리를 듣겠지만, 답을 구하는 어린 후배의 물음을 무시할 순 없죠.”

단장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가까이 오라는 눈짓을 했다. 밀레나는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얼굴을 내밀었다.

“필렌 님은 그 모든 문제를, 사랑의 힘으로 이겨 냈습니다.”

절대 알려져선 안 될 세상의 비밀을 말하듯, 단장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밀레나는 멍한 눈으로 의자에 기대는 단장을 보았다.

“네?”

“사랑의 힘.”

재차 말하는 단장이었다.

“제가 이해가 잘 안 돼서 그러는데요, 사랑의 힘이란 게….”

“말 그대로 사랑의 힘입니다. 밀레나 양의 아버지인 벤 님을 위해 필렌 님은 강해지셨죠.”

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대체 뭐지?

“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면 물어보세요. 방금 제가 말한 게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이란 걸 알게 될 테니.”

“저기, 사랑의 힘이라는 마법 같은 게 있나요?”

“마법이라면 마법이죠. 사람이 바뀌었으니까요. 당시의 필렌 님은 정말 대단했죠. 벤 님을 데려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했으니까요.”

“데, 데려와요?”

어감이 좀 이상했다.

밀레나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굴도 둥글둥글, 눈매도 둥글둥글, 심지어 전체적인 분위기마저 둥글둥글한 사람.

엄마한테 아버지에 대해 질문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엄마는 표정 변화 없이 크면 그때 얘기해 준다고 했다.

그 뒤로 아버지를 떠올린 적은 없었다. 유모를 통해 몇 번 아버지에 대해 들었지만, 그마저도 별 내용은 없었다.

잘 웃던 사람? 이 정도가 끝이었다.

스콜라 생도가 되어 귀족들 간 교류가 잦아졌음에도 엄마에 관한 얘기만 잔뜩 들었을 뿐, 그 누구도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즈음에 이렇게 생각했다. 시시할 정도로 재미없는 정략결혼의 상대였을 거라고.

그래서 아무도 기억 못 하고, 엄마조차 별다른 말을 안 한 거라고.

흔한 일이라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위대한 필렌 엔첸세의 딸이라는 점이 중요했으니까.

“아버지는….”

질문을 이어가려 할 때였다. 단장이 양손을 교차시키며 X 표시를 만들었다.

“여기까지만 하죠. 이다음 얘기는 필렌 님께 들으세요. 제가 모든 걸 다 말해버리면… 전 필렌 님한테 목숨을 구걸해야 하니까요.”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단호함이 느껴졌다. 어떤 물음에도 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아쉬웠으나 포기할 때였다.

물을 마시고 다시 단장을 보았다. 근데, 잠깐만. 뭐 하나 해결된 게 없지 않나?

“얼굴에 불만이 가득하네요. 해결책은 안 내놓고 궁금증만 키워놨으니 그럴 만해요.”

“아, 아니에요.”

“근데 전 해결책을 드렸어요. 사랑의 힘.”

눈이 씰룩거리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번 건 농담인 게 확실했다.

“농담 아니에요. 정말 진지하게 방법을 제시한 거예요. 사랑이란 게 꼭 남녀 간의 사랑을 뜻하는 건 아니잖아요? 목숨 바쳐 사랑할 수 있는 걸 만나게 되면, 밀레나 양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전 잘 모르겠어요.”

“언젠간 알게 될 거예요. 금방일 수도 있어요.”

“그럴까요?”

단장이 이마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이대로 끝내면 선배로서 면이 안 서니 살짝 팁을 드리죠. 한 걸음 물러서서 볼 수 없다면, 아예 진흙탕에 몸을 담가요.”

“본토, 신흥, 시민. 이 세 곳에 전부 가담하라는 건가요?”

“지금까지 어느 곳에도 참여하지 않았잖아요.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다 한 번씩 손을 잡아봐요.”

“그래도 될까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겁니다. 실버 룻에 다녀오고 나면 그땐 모든 행동에 기회비용이 따를 테니까요.”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전적인 수라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애들하고 놀려고 했는데, 일이 생겼으니 가봐야겠네요. 제니한테는 다음에 놀자고 전해주세요.”

“그럴게요.”

단장이 넥타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제가 한 말 잊지 마세요. 사랑의 힘. 이거 정말 위대하고 위험한 겁니다.”

밀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장을 보았다. 위대하고 위험하다? 너무 거창한 얘기 아닐까.

“정말이에요. 지금 ‘어떤 사람’의 사랑 문제가 제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으니까요.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그분이 사랑을 포기하고 공허함에 손을 내밀면….”

정말로 두렵다는 듯이 몸서리치는 단장이었다.

“아무튼 다음에 또 보죠. 전 사랑과 제국의 평화를 지키러 가볼 테니.”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카페를 나서는 단장이었다. 밀레나는 멀거니 바라보다가 조금 늦게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사랑의 힘?”

간지럽고, 웃음이 나오면서도 아리송한 말에 밀레나는 어깨를 으쓱거려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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