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청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주변 소음도 잘 들렸고, 앞에 앉은 기자가 하는 말도 잘 들렸다.
들렸는데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밀레나는 넥타이를 멀거니 바라봤다. 파란색, 흰색 빗금, 거기에 손 모양 핀.
세상에는 사기꾼이 많다. 몇 달 전에 이동 판사가 정리한 판례를 읽은 적이 있는데, 사기죄로 붙들린 자들이 절반을 넘었다.
물건값을 속이는 건 비일비재했고, 중간 상인을 자처하며 과한 수수료를 가져가는 사례도 있었다.
관료사칭죄 역시 판례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길드나 영지관리처의 사각을 파고들어 시민들의 금품을 갈취하는 범죄는 매년 끊이지 않고 있었다.
배포가 큰 사기꾼들은 귀족을 상대로 관료를 사칭하기도 했다.
속이는 놈은 많고, 속는 사람은 그보다 곱절로 많다.
밀레나는 넥타이에서 시선을 뗐다. 다른 직함을 댔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의심하며 신분을 증명할 물건을 보여 달라고 하거나, 기록보관서로 가서 신원을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천지에, 그것도 ‘특수감찰단 단장’을 사칭할 미친놈이 있을까?
차라리 행정국 국장을, 아니, 황제라고 말하는 게 좀 더 그럴싸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이 칼은 새로 나온 커피를 들이켜고 있었다. 몸에 피 대신 커피가 흘렀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발끝부터 한기가 올라왔다.
참호에서 눈을 맞으며 밤을 지새웠던 순간보다 지금이 더 추웠다.
상대방의 여유, 넥타이, 뒤를 쉽게 잡아내는 실력.
의자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건조해진 입술에 살짝 침을 바른 다음 커피 잔을 든 칼에게, 아니, 칼리고 단장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엔첸세의 이름을 받드는 밀레나가 칼리고 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뒷짐을 지는 군례 대신 귀족 예법에 따라 정식 인사를 올렸다. 보이지 않는 치맛자락을 살며시 잡았다가 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칼리고한테 옮기기까지, 무척이나 오래 걸렸다. 긴장돼서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불편하게 그러지 말고 얼른 앉으세요. 사람들도 쳐다봅니다.”
“아닙니다. 다시금 칼리고 님께 무례를 범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상대는 황가와 의회가 공인한 특수감찰단 단장이며, 개인으로 1등 귀족의 지위를 거머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엔첸세 역시 가벼운 이름이 아니나, 그건 어디까지나 엄마가 획득한 권위였다.
긴장한 채 칼리고를 바라봤다.
“제가 누군지도 몰랐고, 설령 누군지 알았다고 해도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밀레나 양도 아시겠지만 전 욕을 밥 대신 먹고 사니까요. 그런 거창한 사과는 오히려 부담스럽네요.”
“부담스럽게 만든 점, 정말로 사과드립니다.”
“말이 자꾸 겉도네요. 엔첸세는 좀 더 자유로운 이름이었는데. 아니면 필렌 님만 그렇고 밀레나 양은 본토 귀족의 그늘 아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렇죠? 그러니 앉으세요. 사람들의 관심이 더 쏠리기 전에. 제가 사실 부끄럼이 많아서 누가 막 쳐다보면 말을 더듬거리거든요.”
밀레나는 살짝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며 자리에 앉았다. 앉는 순간 전신의 힘이 탁 풀렸다.
“단것 좀 드시죠.”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 말이 혀끝에 올랐으나 밀레나는 내뱉지 않았다. 대신 “네.”라고 대답했다.
“여기 미쥬랑이 꽤 맛있어요. 벌꿀과 견과류.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이죠.”
칼리고가 손을 흔들며 종업원을 불렀다. 밀레나가 나서서 주문하려 했으나 칼리고가 눈짓으로 막아섰다.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단장은 맹한 눈으로 밖을 보며 커피를 연거푸 들이켰다.
가시방석도 이 의자보다는 편하리라.
“드세요.”
주문한 디저트가 나왔다. 밀레나는 군소리 없이 일단 먹었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단 과자였다. 앞에 단장이 있다는 것조차 잠깐 잊힐 정도로.
“어때요?”
“마, 맛있습니다.”
“맛있는 표정이 아닌데요.”
“…저한테는 좀 달아요.”
“그래요. 솔직한 게 좋은 거예요.”
이가 아릴 정도로 단 과자를 한입에 넣는 단장이었다.
“이제야 어깨에서 힘이 빠졌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어디서 일하는지 말하지 않을 걸 그랬어요.”
“아닙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장이 미쥬랑을 포크에 찍어 커피에 담갔다. 원래 저렇게 먹는 걸까, 아니면 식성이 특이한 걸까.
“혹시라도 제 신분이 의심된다면 따로 확인시켜 줄 수도 있어요.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둔에는 부하들이 들어와 있거든요. 한 명 불러서 제 확인서를 가져와 달라고 하죠.”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전 믿습니다.”
“멜레나 양은 참 착하네요. 이렇게 말뿐인 절 믿어주고.”
안 믿을 수가 없잖아요, 밀레나는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당장 테이블에 올려둔 저 넥타이. 황가의 상징과 의회의 증표로 사기를 친다면 최소 사형이었다.
“이런. 우연적인 만남이 일어났네요.”
칼리고가 카페 밖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밀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관료 복장에 푸른 넥타이를 한 남자가 가게 앞에 있었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눈이 부셔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가 가게로 들어왔다. 단장이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데옹. 고생이 많네. 게다가 이렇게 우연히 만나고, 운이 좋아.”
“운이 좋긴요. 찾아서 온 겁니다.”
데옹이라 불린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피곤함에 전 얼굴이지만, 보폭은 균일했다.
밀레나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사라는 걸.
“어떤 분 덕분에 제가 여기저기 시달리고 있어서요. 덕분에 고생 중이죠. 예에, 고생 중이고말고요.”
“그 삭막한 얼굴 좀 펴. 안 그래도 인상이 험악한데 그렇게 구기고 다니면 사람들이 무서워해. 감찰단 평판은 떨어트리지 말자고.”
“평판을 깎아 드시는 건 단장님의 특기잖아요.”
데옹이 커피를 빤히 쳐다봤다. 단장은 아깝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커피를 권유했다.
한 번 정도는 거절할 법한데, 데옹은 거침없이 잔에 손을 뻗고 커피를 들이켰다.
“좀 살 것 같네요.”
“쉬엄쉬엄해.”
“그런 말씀 마시고 일터로 복귀하시죠. 마무리 단계라 결재 서류가 또 쌓였어요.”
“다 해결하고 나왔는데 또?”
“군부, 거병관리국, 거병제조소, 제철소, 행정처. 끝마무리 단계니까 많을 수밖에요. 블린드가 착실하게 쌓아놓는 중이니 그만 노시고 돌아오시죠.”
데옹이 미쥬랑을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넣자마자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나쁘지 않네요. 오실 때 포장해 오시면 저희가 감사히 먹겠습니다.”
“나한테 돈 맡겨놨어?”
“돈은 안 맡겼지만, 목숨은 맡겨놨죠.”
단장과 얘기를 마친 데옹이 밀레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돌아섰다.
밀레나는 눈을 깜빡이며 떠나는 데옹을 보았다.
정말 의외였다. 소문으로 접한 감찰단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집단이며, 소속 단원 역시 냉혈한뿐이라고 했는데.
“예전에는 긴장하는 척이라도 했는데, 요즘에는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런 분위기를 요구한 게 저이긴 하지만 이럴 때면 괜히 그랬나 싶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미소만 지었다. 얼빠진 귀족의 전형적인 미소로 보이겠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밀레나 양.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되레 아무 생각도 안 나요.”
“그런 것 같아요.”
물 한 모금 마신 후에 말했다.
“단장님. 저한테 묻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 하셨죠?”
“맞아요. 정신이 없어서 정작 중요한 걸 안 묻고 제 얘기만 했네요.”
“어떤 게 궁금하신 건지….”
감찰단장이 따로 불러낼 정도면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밀레나 양.”
“예.”
“요즘 밥은 잘 먹나요?”
“네?”
“식사 말이에요. 입맛이 떨어졌다거나 그러진 않죠? 더위가 워낙 심했잖아요.”
무슨 의도일까. 예측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대답을 오래 미룰 수도 없으니 일단 대꾸했다.
“식사는 제때 하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좋아하는 음식은요?”
“예?”
“혹시 제 발음이 안 좋나요? 피곤하면 혀가 꼬이곤 하는데.”
“아니요. 단장님 발음은 정확합니다. 단지…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서.”
“아! 의도!”
단장이 박수를 두 번 쳤다. 놀랍다는 얼굴이었다.
“의도가 중요하죠. 그걸 먼저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칼리고가 수첩을 꺼냈다. 특수감찰단의 수첩이라 생각하니까 괜히 긴장된다.
“나중에 필렌 님을 만나게 되면 전해 드리려고요.”
“전해준다는 말씀은….”
“액면 그대로예요. 이게 참 억울한 게 사람들이 제 신분을 알고 나면 생각이 많아져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 하고, 이면을 찾아내려 하죠. 근데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밀레나 양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할 뿐이에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떠오르는 게 있었다. 단장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아주 어릴 적 나를 봤다고.
“제가 어릴 때 만난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죠?”
“맞아요. 아마 한 살이었을 거예요. 필렌 님 댁에서 유모 품에 안겨 있는 밀레나 양을 봤죠. 정말 귀여웠어요.”
기억할 수도 없는 옛일이었다. 그럼에도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머니와 친분이 있으셨군요.”
“엄청 친한 건 아니었어요. 필렌 님은 제가 말이 너무 많다고 매번 구박했거든요. 숨만 쉬어도 시끄럽다 하시고. 야박하신 분이었죠.”
단장이 생긋 웃었다.
“전혀 몰랐어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된 거죠. 아무튼 소소한 질문 좀 할게요.”
그 뒤로 이어진 질문은 정말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시시한 질문이었다.
대답하다 보니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리고, 자세도 편해졌다.
“나중에 필렌 님을 뵙게 된다면 이걸 빌미로 얘기를 해야겠어요.”
“어머니는 저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실 거예요.”
“역시 가까워도 모르는 게 있군요. 필렌 님께서 밀레나 양을 얼마나 아꼈는지, 전 봐서 압니다. 단지 표현을 좀 안 하셨을 뿐이죠. 성격이 워낙 호탕하시잖아요.”
호탕하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웃는 얼굴을 이제야 보네요. 필렌 님하고 많이 닮았어요.”
엄마와 닮았다는 말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좋으면서도 쉽사리 웃지 못했다.
“필렌 님을 꾀어낼 질문을 잔뜩 얻었으니 저도 뭔가 보상을 해야겠네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밀레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오고 가는 정이란 게 있어야죠. 뭘 말씀드리면 좋을까. 황제 침소에 연결된 비밀 계단은 어떠세요? 아니면 왕성에 있는 중앙연구실의 연구 자료 같은 건 흥미가 있나요?”
“아니요! 그런 건 듣고 싶지 않아요.”
들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알페시아’로 끌려갈 것이다.
“아쉽네요. 그러면 밀레나 양과 밀접한 정보 하나를 건네드리죠. 아까 부하가 한 말을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둔은 곧 보안 단계를 1단계로 낮출 겁니다.”
1단계면 아무 위협이 없는 상태를 뜻했다. 둔의 모든 시스템이 정상화된다는 소리였다.
“스콜라 생도들도 아주 바빠질 겁니다. 다들 거병기사를 목표로 하고 있겠죠?”
“예. 이곳에 견학 온 이유가 그거니까요.”
“아마 모레 정도면 우등 교관을 통해 이야기가 내려갈 겁니다. 준비 잘해두세요.”
“알겠습니다.”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1단계가 된다는 건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뜻이겠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