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당연한 사실은 강조되지 않는 법이다.
수많은 교전 규칙에서 척후의 중요성을 되풀이해 말하지 않는 것도, 부대 간의 유기적인 대응을 부각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철칙일수록 언급 횟수가 줄어든다.
적에게 등 뒤를 내주지 않을 것.
이 또한 스콜라 교육 과정에서 언급된 역사가 없다.
말하는 게 시간 낭비로 느껴질 만큼 당연한 것이니까.
그리고 지금, ‘당연한 것’이 비틀어져 버렸다.
밀레나는 이곳이 도심 한복판임을 감사했다. 아니었다면 분명 죽었을 테니까.
허무할 정도로 쉽게 뒤를 내주었다. 남자가 목소리를 낼 때까지, 등 뒤에 누가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훈련을 쉬었다고 해서 감각까지 무뎌진 건 아니었다. 일정 거리 내에 사람이 들어온다면 자다가도 경계할 수 있도록 혹독한 교육을 받아왔다.
위기감에 시야가 살짝 좁아졌다. 좁아진 시야로 남자만 노려볼 때였다.
“누나, 왜 그래?”
가하란의 목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밀레나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자세로 남자를 노려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무장한 상태였다면 아마 칼을 뽑아 들었을 것이다.
손아귀에 잔뜩 들어간 힘을 풀었다. 몸이 긴장 상태에서 벗어났다. 작게 숨을 내쉬면서 여관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저 때문에 아가씨께서 놀랐나 보네요. 하지만 경계할 필요 없어요. 저는 선량한 시민이자, 이곳에서 투숙 중인 손님이니까요.”
무해한 웃음과 여유로운 손동작.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인다.
길가에서 마주쳤다면 인상조차 남기지 못하고 지나쳤을 사람.
밀레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다잡고 말문을 열었다.
“뒤에 누가 있는지 몰랐어요. 놀라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거 미안합니다. 인기척이라도 냈어야 하는데.”
곱슬머리 남자가 방긋 웃었다.
선한 인상인데 묘하게 신경에 거슬린다. 왜지?
밀레나가 남자를 관찰할 때였다. 옆에 있던 제니가 말했다.
“언니. 은근히 겁이 많구나?”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밀레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니한테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배후를 잡힌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훈련을 받지 않은 아이한테 구구절절이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가하란은 미묘한 긴장감을 눈치챘는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누나.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야. 단지 저 남자가….”
말을 잇지 못했다. 제니가 “아저씨.” 하면서 남자에게 다가간 것이다.
“언니가 놀랐잖아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충고 고마워요. 다음부터는 손뼉 치면서 다가갈게요. 그러면 되겠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제니가 킥킥 웃었다. 아저씨라 부르는 저 남자와 꽤 친해 보였다.
“언니, 언니. 이 아저씨가 내가 말했던 기자 아저씨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저기 소개가 됐나 보네요.”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제니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얼마든지 알려줘도 돼요. 유명해져서 나쁠 게 뭐가 있겠어요. 유명해지면 좋은 거죠, 좋고 말고요.”
아이를 향해 높임말을 쓰는데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아마 저 남자는 상대가 누구든지 경어를 사용할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 때문에 생긴 버릇일 지도 모른다.
“제니 양이 먼저 소개했지만, 그래도 제 입으로 다시 인사하는 게 낫겠죠? 울프지에서 자그맣게 기사를 싣고 있는 ‘칼’이라고 합니다. 둔에서는 요즘 유통되지 않는 신문이라 모를 수도 있겠네요.”
울프지 기자 칼.
신원 정보를 기억하며 칼을 볼 때였다. 칼 옆에 붙어 있는 제니가 몸을 꼬며 키득키득 웃었다.
“언니, 들었어? 제니 양이래. 나도 제니 양이 된 거야.”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고풍스러운 호칭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민들 사이에서는 ‘군’과 ‘양’ 같은 경칭은 거의 안 쓰인다고 했지. 제니가 들뜬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울프에 오른 사설을 몇 번 읽었어요. 칼이라는 이름도 얼핏 본 것 같고요. 특간호 때도 기사를 쓰셨죠?”
밀레나는 칼의 눈을 보며 질문했다.
울프지 기자들 하면 뒤따르는 말이 있다.
겁 없는 기자들.
제국 정세를 비판하는 글귀나, 의회 최고 어른의 사적 행위를 비난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게 울프지였다.
“제 글을 읽어 주셨군요.”
“신랄한 비판 글이었죠. 지금도 기억해요.”
“비판만 하고 해결책은 못 내놓은 궁상맞은 글이었죠.”
“문제를 들춰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봐요.”
“간만에 듣는 칭찬이라 굉장히 부끄럽네요.”
싱글벙글 웃는 칼한테서 그 어떤 위험 요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경각심이 생겼다.
등 뒤를 빼앗긴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감시망을 비집고 들어와 태연히 말을 걸어온 남자. 잉크로 먹고사는 기자가 ‘스토아’의 요원처럼 기척을 숨긴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칼 씨. 실례되는 부탁이라는 걸 알지만….”
밀레나가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칼이 수첩을 꺼낸 뒤 그 안에서 은으로 된 얇은 명판을 빼 들었다.
“기자를 사칭하는 자들이 꽤 있다죠? 물론 울프지 기자를 사칭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죠. 눈칫밥을 살 테니까요. 아주 약간 위험하기도 하고.”
마음껏 보란 듯이 은으로 된 패를 내민다. 밀레나는 사양하지 않고 은색 패를 살폈다.
틀림없었다. 울프지 기자가 사용하는 명판이었다. 이전에도 본 적이 있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위조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원하신다면 다른 것도 보여드리죠. 참고로 이 명판에는 마법공학적 처리가 돼 있어서 실소유자가 붙잡으면….”
“붉은빛을 내는 거죠? 알고 있어요. 전에도 한번 본 적이 있거든요.”
“그렇다면 제 것도 한번 보여드릴까요? 이게 생각보다 밝게 빛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미약한 마나에, ‘심상세계’에 반응하는 건데 제법 볼만합니다. 기자들마다 색깔이 조금씩 달라서 하나하나 구경하는 맛도 있죠. 저 같은 경우는….”
말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멍하게 듣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요. 괜찮아요.”
계속 들었다가는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칼이 아쉽다는 얼굴로 명판을 거두어갔다.
“다음에라도 확인하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얼마든지 보여드릴 테니까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신분을 확인한 이상 노골적으로 경계할 수 없었다.
“밀레나 엔첸세예요.”
신원을 요구했으니 이쪽도 이름을 밝혀야 했다. 이름을 들은 칼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는 엔첸세는 한 곳뿐인데. 그곳의 영애시라면 부디 인터뷰가 가능할까요? 여쭙고 싶은 게 아주 많거든요.”
“기자님께 해드릴 말이 별로 없네요.”
“그러지 말고 잠깐 시간을 내주시죠.”
거절했는데도 칼이 포기하지 않았다. 귀족을 수도 없이 상대해봤을 노련한 기자가 보일 법한 태도는 아니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저에 대해 궁금한 점도 있으실 테니, 어떻습니까?”
밀레나는 잠시 고민한 후에 가하란과 제니를 보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줘. 이분과 얘기 좀 하고 올게.”
“같이 갈까?”
가하란이 물었다. 걱정하는 눈치였다. 제니야 싱글싱글 웃고 있지만.
“아니야. 별문제 없을 거야.”
칼을 따라 여관을 나섰다. 건너편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제가 사겠습니다. 마음껏 주문하세요.”
칼이 말했다.
“물이면 돼요.”
얻어먹을 생각은 없었다. 칼이 종업원에게 주문했다.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 석 잔을.
“제가 다 마실 거니 신경 쓰지 마시죠.”
“오래 얘기할 생각은 없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칼의 말은 사실이었다.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가 나왔는데, 칼은 받자마자 첫 잔을 비워냈다.
“안 뜨거워요?”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그리고 여긴 어느 정도 식혀서 나오거든요.”
칼은 대답하면서 추가로 나온 설탕을 잔에 들이부었다.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설탕값에 이번 달 급료는 반토막이 나겠어요. 이 하얀 가루가 왜 이렇게 비싼지.”
“공급이 어려우니까요.”
“정론입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 싸지겠죠. 소금처럼.”
밀레나는 물잔에 손을 대며 말했다.
“자리를 옮겼으니 다시 물을게요. 울프지 기자 맞나요?”
“명판을 다시 보여 드릴까요?”
“질문을 잘못했네요. 거추장스러운 건 싫으니 그냥 물을게요. 어떻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제 등 뒤에 선 거죠?”
칼이 두 번째 커피 잔을 들며 말했다.
“대단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조용히 다가가면 되니까요. 원래는 제니한테 장난칠 마음으로 다가간 건데, 본의 아니게 아가씨께 경각심을 심어버린 모양이네요.”
“말도 안 돼요.”
“왜 말이 안 되나요?”
“난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어요. 울프지 기자니까 스콜라 생도가 어떤 훈련을 받는지 아실 테죠?”
“알죠. 몇 번 참관도 했고요.”
참관했다고?
스콜라 훈련장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기자는 없을 텐데. 칼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여전히 태연했다. 거짓말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감각을 단련해도 모든 걸 알아채는 건 아닙니다. 자신보다 능숙한 사람한테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빈틈을 내보이게 되죠.”
“그쪽이 그렇다는 건가요?”
“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이해가 안 된다면 직접 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렇게 말한 칼이 포크를 움켜줬다. 똑똑히 보고 있었다. 포크가 테이블에서 떨어져 눈앞으로 오는 순간까지.
봤는데, 분명 보고 있는데 위기감이 한 박자 뒤늦게 찾아왔다.
칼이 손을 멈췄다. 밀레나가 반응하기 직전이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보고 있었는데 반응이 늦었다. 칼이 마음만 먹었다면, 저 포크가 망막을 뚫고 들어왔을 것이다.
입 안에 수분이 한순간에 말라버렸다.
“물 드세요. 목마를 테니.”
어느새 세 번째 커피잔을 들며 말하는 칼이었다. 밀레나는 칼한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을 마셨다.
대체 뭐였는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너무 훑지는 마세요. 제가 부끄럼이 많거든요.”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죠?”
“여러 가지 일을 하죠.”
“기자는 신분을 감추기 위한 연막인가요?”
“아니요. 그것도 엄연히 제가 사랑하는 일입니다. 저 정말 열심히 글을 쓰거든요.”
칼이 잔을 내려놓았다.
“물론 절 대표하는 일이 따로 있긴 합니다.”
칼이 늘어지게 하품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정말 무방비해 보인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칼이 멋쩍게 웃으며 볼을 살짝 때렸다.
“미안해요. 최근 며칠 동안 잠을 못 잤거든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정말 하소연하고 싶을 정도로 많아요. 게다가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도 있어서 정말 바쁘거든요. 세상에 일복이 터져도 이렇게 터질 수가 없어요.”
칼이 다시금 주문했다. 설탕 왕창 들어간 커피 네 잔.
“장난은 여기까지 하죠. 반가운 마음에 그랬어요. 아주 어릴 때 밀레나 양을 봤거든요.”
“날 봤다고요?”
“네. 정말 어릴 때였죠.”
칼이 무심하게, 정말 쓸데없는 물건인 것처럼 테이블에 무언가를 툭 던졌다. 푸른색 넥타이였다.
“다시 소개하죠. 특수감찰단 칼리고입니다. 귀족분들의 아픈 곳을 열심히 찌르고 다니는 선량한 시민이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