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제니는 입을 반쯤 벌렸다가 살며시 닫았다.
같이 추자고 말하려 했다. 끼워달라고 손을 내밀려고 했다.
하지만 속도를 높이며 좁은 거실을 경쾌하게 오가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말할 엄두가 안 났다.
밀레나와 같이 췄던 느긋한 춤이 아니었다. 거실이 정말 좁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고 동작도 컸다.
해보라고 시켜도 절대 못 할 것이다.
벽난로를 스치듯이 지나 서랍 앞에서 몸을 홱 꺾은 두 사람이, 창가를 향해 달리듯 나아갔다.
제니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넋 놓고 구경했다. 멋지다, 이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점이 들었다.
언니는 귀족이니까 잘 추는 게 당연했다. 근데 가하란은 왜 잘 추는 거지?
두 사람이 거실 중앙으로 돌아왔다. 밀레나가 손을 놓자, 가하란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기술은 그럭저럭 배웠네. 매너는 없지만.”
밀레나가 말했다. 가하란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며 해맑게 웃었다.
“그냥 누나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어. 난 잘 모르니까.”
“다음에 여자와 추게 된다면 일단 상대방 눈부터 봐. 춤만 생각하지 말고. 춤은 도구일 뿐이야. 중요한 건 교감이고.”
제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박수를 보냈다.
밀레나가 단아한 인사로 박수에 화답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우악스럽고 자기밖에 모르는 귀족과는 아예 달랐다.
“언니. 연습하면 언니랑 가하란처럼 빠르게 출 수 있을까?”
“며칠 연습하면 금방 할 수 있어.”
“나 가르쳐줄 수 있어?”
“지금 당장 약속할 수는 없어. 갑자기 바빠져서 여기 못 오게 될 수도 있거든.”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기분이 축 처진다. 이렇게 멋진 언니와 친해지게 됐는데, 다시 못 만날 수도 있다니.
“너무 실망하지는 마.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올게. 와서 너한테 춤도 알려주고.”
“진짜지? 약속하는 거다?”
제니는 밀레나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근데 제니, 너 여기에 계속 있어도 괜찮은 거야?”
가하란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아차 싶었다. 음식만 전해주고 오겠다고 아빠한테 말해놨는데.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아빠의 잔소리는 그렇다 치고 테리 오빠는 눈을 까뒤집으며 달려들 것이다.
잘못한 게 있으니 얌전히 혼나야 할 텐데, 벌써 침울해진다.
제니는 가하란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오빠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방법이 딱 하나 있었다.
“가하란. 나랑 같이 가자.”
“어?”
“오빠 잔소리 좀 막아줘. 이번 한 번만, 응?”
“나야 상관없지만….”
가하란이 밀레나를 바라봤다. 맞다, 언니는 가하란 손님으로 여길 찾아온 거지.
“언니. 혹시 많이 바빠?”
“나? 오늘은 한가해.”
“그러면 나랑 같이 우리 여관 구경 안 갈래?”
지금 돌아가면 언니와 헤어져야 했다. 듣고 싶은 얘기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많은데, 지금 이별하는 건 너무 아쉬웠다.
“지금 우리 여관에 재밌는 사람 되게 많아! 멀리서 온 사냥꾼 아저씨도 있고, 엄청 부자인 아저씨도 있어.”
“그다지 흥미가 안 생기는데.”
밀레나가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이대로라면 언니를 데려갈 수 없을 것이다.
“맞다, 한 명 더 있어! 며칠 전에 여관을 찾아온 아저씨인데, 모르는 게 없는 아저씨야. 말도 되게 재미있게 해. 뭐였더라? 무슨 신문 기자라고 했는데….”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동물이었던 거 같은데, 뭐였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생각이 났다.
“울프지 기자! 그 아저씨가 그랬어. 울프라는 신문에 글을 싣고 있다고.”
‘울프’라는 단어에 밀레나가 한 걸음 다가왔다.
“정말 그랬어? 자기가 울프지 기자라고?”
“거짓말 아니야. 정말 그랬어.”
“그쪽 기자라면 한번 만나보고 싶긴 한데.”
“정말? 그러면 같이 가자. 지금 여관에 있을 거야.”
…없을 수도 있지만. 뒷말은 아주 작게 말했다.
“같이 갈 거야?”
제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밀레나는 대답 대신 제니의 손을 잡았다.
“뭐 해. 얼른 안내해 봐.”
제니는 활짝 웃으며 앞장섰다.
* * *
“얼른 와!”
저 앞에서 손짓하는 제니였다.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제니는 말을 듣지 않았다. 저러다 넘어지면 눈가가 그렁그렁해질 텐데.
“보면 볼수록 귀엽네.”
옆에 있는 밀레나가 말했다.
“저러다가 갑자기 울 때도 있어. 눈물이 많은 애거든.”
“그만큼 잘 웃잖아. 그러면 된 거야.”
밀레나가 물웅덩이를 피하며 나아갔다. 골목 그늘진 곳에는 여전히 물웅덩이가 남아 있었다. 가하란도 발을 굴러 웅덩이를 넘었다.
“신문 기자가 없었어도 제니 따라서 여관에 가려고 했지?”
“당연한 걸 왜 물어.”
“근데 왜 안 가려는 척했어?”
“제니가 어떻게 반응하나 보고 싶었어. 근데 두 번은 못 놀리겠더라. 네 말대로 눈가가 금방 촉촉해지는데, 내가 당황할 뻔했잖아.”
밀레나의 대답을 들으며 가하란은 작게 웃었다.
“잘 우는 애지만, 쉽게 토라지거나 포기하진 않아. 오히려 울면서 악착같이 따라오는 게 제니야.”
“그래?”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나랑 테리 형이 다른 골목 애들이랑 달리기 시합을 하는 걸 제니가 본 거야.”
아, 테리는 제니 오빠야. 가하란은 설명을 덧붙였다.
“제니 성격이면 끼워달라고 했겠네.”
“맞아. 자기도 같이하겠다고 엄청나게 떼썼어. 근데 남자애들끼리 시합하는 거였거든? 물론 제니의 다리가 빨랐다면 참가시켰겠지만, 제니는 달리기가 느린 편이라서.”
가하란은 씩씩거리며 바라보던 당시의 제니를 상상했다.
“그 와중에 테리 형이 이렇게 말한 거야. ‘야, 너는 머리카락이 길어서 안 돼. 우리처럼 짧아야 속도를 내기 편하다고.’”
“놀리려고 한 말이겠네.”
“그렇지. 테리 형도 별생각 없이, 그냥 집에 가란 말로 했을 거야. 그리고 다음 날 무슨 일이 벌어졌게?”
그때였다. 앞서가던 제니가 또다시 빨리 오라며 보챘다.
제자리서 방방 뛰는데,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길이의 머리카락이 위아래로 촐랑거렸다.
밀레나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설마….”
“원래는 꽤 길었어. 근데 단숨에 잘라버려서 저렇게 됐지. 아, 지금은 꽤 자란 거야. 진짜 바짝 잘랐었거든.”
“의외로 거친 면이 있네.”
“그래서 어지간하면 제니한테 이상한 소리 안 해. 한다면 하는 애거든, 쟤는.”
“더더욱 마음에 든다.”
밀레나가 제니에게 뛰어갔다. 살갑게 손을 붙잡고 걷는 모습을 보면 오늘 처음 만난 게 맞나 싶을 정도다.
몇 년을 알고 지낸 사이 같았다. 아니, 친자매만큼이나 가까워 보였다.
가하란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작게 말했다.
“산페르 아저씨. 듣고 있죠?”
대답은 없지만 듣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제 눈을 가릴 건가요? 오늘만큼은 참아줬으면 해요. 구치 아저씨가 나타나도 오늘 한 번은 참아줘요.”
산페르가 왼쪽 눈 옆에 나타났다.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들어주시는 거죠?”
-저번에 내가 실수한 것도 있으니까 오늘은 얌전히 있을게.
다행이었다. 제니 옆에서 허둥지둥하면 괜한 걱정을 끼칠 테니까.
제니한테만큼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저번처럼 갑자기 정령세계로 끌려가는 일은 없겠죠?”
-그건 나도 알 수 없어. 네 눈은 완벽하게 뜨인 상태가 아니야. 불안정해. 그래서 예측하기 어렵지.
“완벽하게 뜨면 그땐 괜찮아지는 건가요?”
-아니. 오히려 지금보다 더 휘둘릴 수도 있어.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날 테니까.
가하란은 타챠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흘려보낼 건 흘려보내라. 모든 걸 이해하려 들지 마라. 그건 헛된 욕심이다.
“필요 없는 정보들을 잘 흘려보내야겠네요.”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야.
“나중에 그때가 되면 아저씨가 도와주실 거죠?”
-내가? 왜?
“안 도와주실 건가요?”
눈앞에서 헤엄치던 거북이 점점 흐릿해졌다.
-방금 그 말투는 세핀느와 판박이였어. 인간족한테는 이런 속담이 있다지? 피는 못 속인다고. 과연 틀린 말은 아니야.
정령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모습은 감췄으나 보다 선명해진 목소리가 머리를 파고들었다.
-그때까지 내가 네 곁에 있다면, 한 번 정도는 도와줄게. 그렇게 된다면 말이야.
“그걸로 충분해요.”
작게 웃으며 말을 끝냈다.
“가하란! 거기서 뭐 해!”
제니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여관 앞에 서 있는 제니와 밀레나가 보였다.
걸음을 서둘렀다. 지나가는 짐수레를 피해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하늘에 뭐라도 있었어?”
밀레나가 물었다. 가하란은 작게 거북이가 보여서, 라고 대답했다.
밀레나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가하란, 먼저 들어가. 오빠 있는지 좀 봐줘.”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운터에 서 있는 안소니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제니는?”
“뒤에 있어요.”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나 보군.”
“예.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테리 형은요?”
“지쳤는지 위로 올라갔다. 오늘 점심은 유난히 바빴거든.”
가하란은 밖에 있는 제니에게 손짓했다. 제니가 밀레나와 함께 들어왔다. 목을 빼고 주변을 살피던 제니가 안소니를 향해 말했다.
“아빠, 미안해.”
“약속한 건 지켜줬으면 하는데.”
“다음부턴 절대 안 잊을게.”
안소니가 제니를 잠시 바라보다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 그거면 됐다. 하지만 네 오빠한테는 좀 더 잘 말해야 할 거다. 단단히 화가 났으니까.”
제니가 주눅 든 얼굴로 물었다.
“오늘 많이 바빴어?”
“바빴지.”
“오빠는?”
안소니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제니가 큰일 났다, 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 있는 아이는….”
안소니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밀레나가 나섰다.
“밀레나 엔첸세예요. 제니 친구고요.”
가하란은 입을 반쯤 열었다가 닫았다. 예법에 따라 안소니를 먼저 소개하려 했는데, 이번엔 밀레나가 먼저 입을 연 것이다.
“올란트가 말했던 분이군요.”
“올란트 씨를 아세요?”
“오랜 지기입니다.”
밀레나가 주억거리며 말했다.
“어렵게 대할 필요 없어요. 놀러 온 거니까요.”
“그렇게 하죠.”
안소니는 별 감흥이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하긴, 아저씨라면 귀족을 수도 없이 상대해 봤을 것이다.
귀족들이 자주 찾는 여관은 아니지만, 가끔 귀족 거주지 쪽 시설이 가득 차면 이쪽으로 발길을 돌리니까.
“앞에 계신 어린 신사, 숙녀분. 출입구를 막고 계시면 곤란해요.”
등 뒤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가하란이 누구지, 하고 쳐다보려 할 때였다.
옆에 서 있던 밀레나가 불에 덴 것처럼 놀라더니, 자세를 낮추고 뒤로 물러섰다.
등 뒤를 확인하는 누나의 눈빛이 서늘했다.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누나, 왜 그래?”
걱정을 담아 말할 때였다. 입구에 서 있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저 때문에 아가씨께서 놀랐나 보네요. 하지만 경계할 필요 없어요. 저는 선량한 시민이자, 이곳에서 투숙 중인 손님이니까요.”
하핫, 경쾌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가하란은 남자를 올려다봤다.
큰 키를 가진 곱슬머리 남자가 진한 미소를 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