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82화 (55/558)

제82화

“언니! 이렇게 하는 게 맞아?”

“거기서 조금만 더 왼발을 뒤로 빼면 좋을 거 같은데.”

“이렇게?”

밀레나는 제니에게 다가가 자세를 고쳐주었다.

“그러고 잠시 있어야 해. 드레스 끝자락이 흔들리면 뒤에서 속닥거릴 수 있으니까 손도 고정하고.”

“이, 이 상태로 얼마나?”

“내가 카운티에한테 교육을 받을 땐 10분 정도 그러고 있었어.”

제니가 가상의 드레스 끝자락을 놓으며 몸을 폈다.

“어렵다. 언니는 이런 걸 어떻게 해?”

“하다 보면 돼.”

제니가 쪼르르 다가와 곁에 붙었다.

“언니, 언니. 파티에 가면 멋진 신사들이랑 춤출 수 있는 거야? 왕자님도 오고?”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책에서 봤어. 정확히는 본 건 아니고 가하란이 읽어준 걸 들었어. 난 아직 글자 읽는 게 서투르거든.”

밀레나는 살갑게 웃으며 제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난 지 두 시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애가 참 정겨웠다.

앙증맞게 언니, 하고 부르는 것도 귀엽고.

“연회 주최자의 성격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 모였다고 해서 항상 춤추는 건 아니고, 자리를 마련해줘야 그때 출 수 있어. 자유로운 분위기라면 누구나 다 중앙으로 가서 춰도 돼.”

“자유로운 분위기가 아니면?”

“그럴 땐 호스트가 미리 알려줘. 순서를 정해주거나 혹은 즉석에서 지목하기도 해. 정말 격식을 차리는 자리라면 사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준비된 사람들만 중앙에서 춤을 추게 되고.”

“다른 사람은 다 구경해?”

“각자 할 일 해. 얘기할 사람은 얘기하고, 마실 사람은 마시고. 단, 중앙에서 춤추는 사람이 그 모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면 집중해주는 게 예의긴 해.”

그 외에도 지켜야 할 룰이 몇 가지 더 있지만 지금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우리랑은 다르네. 우린 주말에 다 같이 춤춰. 옆 가게 헨렌 아줌마가 기타를 가져오고, 쿱 오빠가 룬바를 가져와. 밤이 되면 테이블을 치우고 다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 거야.”

제니가 일어서서 가볍게 좌우로 움직였다. 팔을 제멋대로 흔들며 처음 듣는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크게 뛰면서 손을 활짝 펼치기도 하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움직이기도 했다.

정형화된 순서가 없는, 그야말로 마음 내키는 대로 추는 춤이었다.

카운티에가 봤다면 그런 경박한 행동은 그만두라며 호통을 쳤을 것이다.

거실을 한바탕 뛰어놀던 제니가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어때?”

“잘 추네. 느낌 있어.”

“그렇지? 아빠도 내가 제일 잘 춘다고 했어. 오빠는 보는 눈이 없어서 오줌 마려운 강아지 같다고 하는데, 진짜 어이가 없어.”

밀레나는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겨우 참아냈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언니는 어떻게 춰?”

간절한 눈빛에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밀레나는 조금만 보여주겠다고 말하며 일어섰다.

“연회장에서 춤을 출 땐 기본적으로 남녀가 짝을 이뤄. 혼자서 추는 경우는 없어.”

“혼자서 추면 안 돼?”

“예외가 있을 수는 있지만, 짝을 지어 추는 게 일반적이야.”

밀레나는 오른손을 어깨높이까지 들고 왼손을 허리선에 가져다 댔다.

“리드는 보통 춤을 권한 사람이 해. 그래서 보통 남자가 하게 되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한테 추자고 하면, 내가 이끌어야 하는 거네?”

“그렇지.”

왼발을 가볍게 당기며 움직였다. 질리도록 들은 느린 템포의 곡을 떠올렸다. 몸에 인이 박인 박자에 따라 바닥에 스치듯이 발을 끌었다.

그렇게 거실을 몇 바퀴 돈 다음 제니 앞에 섰다.

“이런 느낌이야.”

“언니! 어떻게 한 거야? 발이 땅에서 안 떨어졌어.”

“그렇게 보일 뿐이야. 살짝 떨어지긴 해. 발을 지면에서 완전히 떼면 미숙하단 소리를 들으니까 조심해야 하고.”

제니가 동작을 따라 했다. 발꿈치를 살짝 들고 발을 끄는데, 얼마 못 가 기우뚱거렸다.

“어렵다.”

“손 줘봐. 원래 혼자 하면 어려워. 내가 도와줄게.”

그래도 얘보다는 키가 커서 다행이네, 밀레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올해가 가기 전에 딱 5cm만 더 자랐으면.

“언니. 내가 공주 해도 돼?”

“그래. 아까 알려준 인사부터 해볼래?”

제니가 불안한 자세로 인사를 마쳤다. 어설프지만 누가 볼 것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허리에 손 얹고 손을 비스듬히 튼 다음 내 손을 잡아.”

얼추 자세는 잡혔다. 밀레나는 눈짓을 준 다음 오른발을 밀었다.

“어렵지는 않을 거야. 느린 템포니까.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이 정도 속도에 맞춰서 시계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면 돼.”

곧잘 따라오던 제니가 중간에 삐끗했다. 밀레나는 무너지는 제니 몸을 받쳐준 다음 스텝을 이어 나갔다.

거실을 한 바퀴 돈 다음 중앙에 멈춰 섰다.

“이러면 기본은 된 거야.”

“…어렵다.”

“처음치고는 잘한 거야.”

맞잡은 손을 놓았다. 뒤로 물러선 제니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난 이런 춤은 평생 못 출 거 같아.”

“꼭 배울 필요는 없으니까. 나도 익히기만 했지, 춰본 적은 몇 번 없어. 그리고 잘 춘 거니까 실망하지 말고.”

말을 마친 밀레나는 현관 쪽을 쓱 바라보았다.

“근데 가하란 얘는 언제 돌아오는 거야?”

“좀 걸릴 거야. 벤 할아버지가 도와달라고 한 거니까.”

가하란이 제니를 데려오고 몇 분 안 지났을 때였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가하란을 찾았다.

가하란은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원래 이 골목 사람들이 가하란을 많이 찾아?”

“어. 걔가 심부름이란 심부름은 다 해주거든.”

“너무 착해빠진 거 아냐?”

“꼭 그런 건 아니야. 서로서로 돕는 거니까. 올란트 아저씨가 한동안 안 보였을 때, 벤 할아버지가 이 집 지붕을 수리해 주셨어. 비 엄청나게 왔었잖아.”

“그랬지.”

“가하란은 그래. 받았으면 못해도 받은 만큼은 반드시 돌려주거든.”

“그 점은 나랑 비슷하네.”

제니가 빤히 바라본다.

“언니도 그래?”

“안 갚으면 불편하거든. 가하란은 불편해서가 아니라 고마운 마음에 갚는 것 같지만.”

“그러면 언니도 착한 거네.”

“글쎄.”

밀레나는 제니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왠지 버릇될 것 같았다. 툴을 만지작거리던 습관이 손에 남아서 그런가.

제니가 고개를 살짝 들더니 헤벌쭉 웃었다.

“나 언니랑 계속 놀아도 돼?”

“나랑 노는 거 재미있어?”

“엄청 재미있어. 오빠랑 노는 것보다 훨씬!”

“평소에는 어떻게 노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녀. 오빠랑 가하란은 그걸 모험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떠돌아다니는 거야. 근데 나름 재미는 있어.”

말하던 제니가 돌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가끔 날 따돌려. 저번에도 나 몰래 시장 구경을 갔고. 하여간 남자애들은 자기 생각밖에 안 해.”

제니의 손가락이 서랍 위에 있는 체스판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번에 체스도 같이 했는데, 나랑 오빠 둘 다 포기했어. 가하란이 낸 문제를 하나도 못 풀었거든. 너무 어려워.”

그 뒤로도 제니는 쉬지 않고 말했다. 설명이 제법 상세해서 마치 함께 뛰어논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제니한테는 둘도 없는 친구네. 가하란이랑 너희 오빠는.”

“맞아.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야. 언니도 물론 친해. 아니, 친해져도 되는 거지?”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제니가 금방 울상을 지었다. 밀레나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농담이야. 나도 제니가 좋아.”

사교장에서 본 또래 애들과는 쉽게 가까워질 수 없었는데, 이곳에서 만난 애들은 신분 격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통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스콜라 동기들끼리도 이렇게 편히 지내면 될 텐데.

여전히 서로를 감시하고 평가하는 본토와 신흥, 그리고 시민 애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불현듯 숙소에서 쉬지 않고 이곳을 찾는 이유가 체스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긴 재미있었다. 하나하나가 새롭고 웃게 만든다.

물론 단편적인 감상일지도 모른다. 낯설기에 흥미롭고, 이곳도 익숙해지면 숙소와 다를 바 없이 지루해질지도 모른다.

아니지. 체스만큼은 질리지 않으려나?

요 며칠 사이 가하란의 실력은 이제 수를 읽어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과 대국하는 기분이었다.

체스 실력이라는 게 이렇게 단기간에 느는 거였나?

짐작건대 앞으로 며칠만 더 지나면 대국이 아니라 지도를 받아야 하리라. 지금도 반쯤은 지도대국이기도 하고.

“미안해. 오래 걸렸지.”

가하란이 돌아왔다. 양손에 큼지막한 보따리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 도와주고 돌아오는 길에 베베하고 눈이 마주쳤어.”

“베베라면, 그때 내가 잡았던 고양이?”

밀레나는 통통했던 고양이를 떠올렸다.

“맞아. 웰턴 아저씨가 잠깐 문을 열었는데 그 틈을 타서 도망친 거 같더라고. 날 보자마자 도망치는데….”

가하란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고양이 털이 잔뜩 묻은 옷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수고가 많네.”

“미안. 누나 내버려 두고 가서.”

“미안할 게 뭐 있어. 덕분에 제니하고 신나게 놀았으니까 괜찮아.”

제니가 “언니” 하며 품에 안겼다. 그 모습을 본 가하란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벌써 그렇게 친해진 거야?”

“제니를 내 동생 삼으려고. 너무 귀엽지 않아?”

“그렇게 귀엽지는….”

가하란이 도중이 입을 다물었다. 슬쩍 내려다보니 제니가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밀레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 언니한테 춤 배웠다. 부럽지?”

제니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춤?”

밀레나는 가하란의 시선을 받으며 대꾸했다.

“간단한 동작 몇 개 알려줬어. 제니가 소질이 있더라. 알려주는 대로 곧잘 하고.”

“들었어? 나 소질 있대.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춤출 때 까불지 마. 오빠한테도 이 말 꼭 해줄 거야.”

제니가 거실 중앙에서 자세를 잡았다. 엉성하게 허리를 뺀 채 다리를 움직인다. 나무토막을 실로 연결해놓은 것처럼 삐거덕거리지만, 제니의 얼굴은 자신만만했다.

한 바퀴 돈 제니가 가하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때? 넌 이런 거 못 하지?”

가하란은 어깨만 으쓱거렸다.

밀레나는 가하란의 표정을 뜯어보았다. 혹시 춤도 배운 건가?

“가하란. 너 아버지한테 춤 배웠지?”

“조금. 알아두면 언젠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라면서.”

“그래?”

“제대로 배운 건 아니야. 그냥 아빠랑 놀면서 잠깐 따라 해본 게 전부야.”

“나랑 한번 춰볼래?”

체스 실력은 발군인데, 춤은 과연 어떨까? 괜히 궁금해져서 먼저 제안해 봤다.

“잘 못하는데.”

“잘하는 걸 바라지 않아. 그냥 노는 거야. 체스처럼.”

밀레나는 거실 중앙에서 가하란을 바라보았다. 귀 뒤쪽을 매만지던 가하란이 앞으로 걸어왔다.

첫 동작을 설명해주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가하란이 왼손을 뻗었다.

눈높이보다 조금 낮은 위치. 밀레나의 키를 고려한 좋은 리드 자리였다.

밀레나는 옅게 미소 지으며 손을 붙잡았다. 부드럽게 틀어쥐고 당기는 손길에 망설임이 없었다.

춤까지 완벽한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신호도 주지 않은 채 가하란이 휙 움직였다. 느린 템포도 아니었다. 경쾌한 스텝. 예전에 성도에서 유행했다던 빠른 박자였다.

밀레나는 잠시 주춤거렸지만 금방 중심을 잡았다. 가하란은 진행 방향만 바라본 채 바삐 걸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서툴고 엉성하다. 자세는 좋으나 배려심이 전혀 없다. 파트너는 생각지 않고 자기 동작에만 열중이었다.

초심자의 춤.

체스를 둘 때와 다르게 친근한 모습이었다. 웃음이 나온다. 다 잘하는 건 아니구나.

“리드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밀레나는 손목을 살짝 꺾었다. 리드를 넘겨받고 중심을 당겨왔다.

가하란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즐겁다는 듯이 걸음을 움직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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