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이후 일정이 어떻게 되십니까?”
카페 문 앞에서 칼리고가 물었다.
“앞으로의 일정은 단장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보안 단계가 평시로 돌아간다면 스콜라 생도들 견학 일정에 맞춰 움직일 것이고, 아니라면 숙소에서 가만히 하늘만 보고 있어야겠죠.”
“그러고 보니 스콜라 생도들이 와 있었군요. 제국의 인재들을 무의미하게 붙들어 둘 순 없으니 제가 일 처리를 빠르게 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고마울 따름이죠.”
첼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하늘을 쳐다봤다. 쨍쨍한 태양을 가로지르며 새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문득 스콜라 생도들과 대면했을 당시가 떠올랐다.
“바루새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바루새요? 처음 듣는군요.”
“저도 얼마 전에 알게 됐습니다. 밀레나 엔첸세 양이 제법 재밌는 얘기를 해줬죠.”
단장이 흥미를 보였다. 첼은 점점 멀어져 구름에 흡수되듯 사라진 새를 좇으며 말했다.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새인데, 일정 주기마다 새 한 마리가 몸에 불을 두르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몸에 불을 두르고요?”
“네. 마법인지 체내 기름을 태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밤중에 자신을 불사르는 거죠.”
“이유가 뭐죠?”
첼은 고개를 내리며 단장을 보았다.
“그 불빛을 보고 바루새의 먹잇감과 천적이 몰려든다고 합니다. 불빛 아래 모여든 동물들은 불빛에 흥분해 서로를 물어뜯고 죽이죠. 바루새는 높은 곳에서 그걸 지켜보다가 모여든 동물이 시체가 되면 내려와 만찬을 즐기는 겁니다.”
몸을 불살라 먹잇감과 천적을 모으는 바루새와 뜻을 이뤘다며 폭사해버린 진범.
별개의 사건이자 상관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주목 그 자체가 목적일 수도 있겠군요. 점점 더 재미있어집니다.”
“너무 귀담아듣지는 마세요. 그냥 생각나서 말해드린 거니.”
“총집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인데 흘려들을 순 없죠. 그나저나 밀레나 엔첸세면, 그 엔첸세의 딸이 맞는 거겠죠?”
“예. 그 엔첸세의 여아입니다.”
“봐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네요. 나중에 필렌 씨를 보게 되면 딸의 소식 정도는 전해줘야 하니.”
첼은 지팡이를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필렌 님과 친분이 있으셨나요?”
“친분이랄 것까지는 아니고, 아는 분을 통해서 몇 번 만났죠. 첼 님께서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누구죠?”
“‘나리아’ 씨요.”
첼은 아, 하고 작게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리운 이름이었다. 추억이 된 이름이기도 하고. 동시에 씁쓸한 맛이 배어 나오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랬군요.”
“첼 님께서도 사과파이 연맹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들어봤을 뿐만 아니라 몇 번 맛도 봤습니다.”
“산처럼 쌓인 파이를 직접 목격하셨군요?”
“그건 아닙니다. 전 나리아 님께서 파이 만들기에 익숙해진 다음 조금 맛봤을 뿐이죠. 그 과정에서 피실험자가 된 황제 폐하나, 총수님의 얘기는 건너 건너 전해 들었고요.”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의도적인 게 아니었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 그런 분이었지.
“참 많은 분과 친분을 나누셨군요. 나리아 님은.”
“원체 밝았으니까요. 누구나 다 좋아하고 사랑했죠.”
과거를 되짚듯 먼 곳을 보던 단장이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과거에서 허덕일 정도로 여유롭진 않으니까요. 나중에 시간 되면, 정말 여유로워지면 그때 마음껏 추억해야겠습니다.”
단장은 유쾌한 웃음을 담아 인사한 후 휘적휘적 걸어갔다. 멀리서 지켜보던 하브와 루카가 다가왔다.
첼은 하브에게 손을 내밀어 모자를 넘겨받았다.
“저분이 특수감찰단 단장이시군요.”
하브가 말했다.
“알아는 두되 가까워질 생각은 말게. 워낙 수다스러운 사람이라 가까워지면 골치가 아프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고는 선생님의 표정이 밝습니다.”
“그렇게 보이나?”
첼은 작게 웃으며 모자를 눌러썼다.
“판결권은 저 친구 손에 쥐여 줬으니 잠깐의 여유나 즐겨야겠군. 루카, 근방에 괜찮은 식당을 알고 있나? 단걸 조금 먹었더니 오히려 허기가 지는군.”
“안내하겠습니다.”
루카가 앞장섰다.
첼은 단장이 걸어간 거리를 힐긋 바라본 후 걸음을 뗐다.
* * *
“저기, 누나.”
가하란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밀레나를 보며 말했다.
“왜.”
밀레나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대꾸했다.
“누나가 오는 건 정말 좋은데, 이렇게 자주 와도 괜찮은 거야? 스콜라 생도는 훈련이 많다고 들었는데.”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어떤 일 때문에 지금 굉장히 한가해. 그나마 잡혀 있던 교육도 갑자기 취소됐거든. 장교들과 오찬도 했겠다 문제가 다 해결됐는가 싶더니 갑자기 지하실에서….”
날 선 목소리로 말하던 밀레나가 고개를 홱 들었다.
“나 방금 뭐라고 했어?”
“어떤 문제 때문에 일정이 취소됐다고 했어.”
“그 외에 이상한 말은 안 했지?”
“어.”
지하실이란 말을 들었지만, 그 정도는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그러면 됐어. 기밀 유지도 상당히 귀찮아.”
밀레나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 체스 보드로 향했다.
가하란은 입을 꾹 다문 밀레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발치에 엎드려 있는 툴에게 손을 내밀었다.
누나가 집에서 자고 간 그날 이후, 누나는 매일같이 집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좋았다. 아빠도 없는 쓸쓸한 집에 활기가 돌았으니까.
“이거, 이렇게 두는 건 어때?”
침묵을 깬 밀레나가 체스판을 가리켰다. 가하란은 툴을 쓰다듬으며 체스판을 보았다.
진형을 확인하고 계산에 들어갔다. 확실한 수를 내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여길 틀어쥐면 이다음부터 어려워질 것 같아.”
“보여줘 봐.”
가하란은 기물을 재빨리 움직였다. 아홉 번째 수를 둘 때 밀레나가 아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되겠네. 왜 이 간단한 걸 못 봤지?”
“너무 오래돼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러니까 누나, 나가서 노는 건….”
“잠깐만. 이번 게임만 마무리하고.”
가하란은 단어 사용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싶었다. ‘이번 게임만’이 아니었다. 벌써 네 판째였다.
체스는 분명 즐거운 게임이었다.
집중해서 생각지 못한 수를 발견했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상대의 의중을 꿰뚫었을 때의 전율은 자다가도 생각날 정도였다.
하지만 즐거운 것도 며칠째, 그것도 같은 상대와 반복하면 질리기 마련이었다.
누나는 정말 체스를 사랑하는구나, 가하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씨가 좋았다. 여름이 물러가며 드리운 가을 하늘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날은 모험을 떠나야 했다.
둔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아직 못 가본 골목이 수도 없이 많았다.
바람은 시원하고, 습하지도 않은 날씨. 신나게 뛰어놀라고 하늘이 허락한 그런 날씨였다.
그런데… 오늘도 체스판 앞에 붙들렸다. 툴도 나가서 뛰어놀고 싶은지 계속 꼬리를 흔들며 현관 쪽을 봤다.
그때였다. 툴이 벌떡 일어서더니 현관으로 뛰어갔다. 참지 못하고 혼자 놀러 나가는 걸까?
부러움을 담아 바라보고 있는데, 툴이 열어둔 현관문 앞에 얌전히 자리를 틀었다.
엉덩이를 깔고 앉은 저 모습이 무얼 뜻하는지, 가하란은 알고 있었다.
“누나, 잠깐만.”
“왜? 나 조금만 더 생각해볼게.”
“그게 아니라 누가 오고 있어.”
“누가 온다고?”
가하란은 의자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 툴이 헥헥거리며 바라보고 있는 곳에 제니가 있었다.
“가하란!”
제니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온다. 양손으로 움켜쥔 바구니가 좌우로 출렁거렸다.
반갑게 맞이하려다가 시선이 집 안으로 향했다.
이걸 어쩌지?
누나가 격식을 따지는 귀족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예의 없게 구는 걸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코앞으로 온 제니를 일단 붙들었다.
“안에 들어가자. 이거 무거워.”
가하란은 바구니를 넘겨받은 다음 말했다.
“안에 손님이 계셔.”
“손님? 누구?”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그래?”
“귀족.”
나쁜 사람은 아니나 그래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도 곁들였다.
“귀족이 안에 있다고? 왜? 어째서?”
제니는 놀라움 반, 호기심 반이 담긴 눈으로 연신 집을 바라봤다.
“어쩌다 보니 친해지게 됐어.”
“나한테는 왜 말 안 했어.”
“그것도 어쩌다 보니까. 아, 맞다. 안에 있는 누나가 연극 초대권 준 거야.”
“정말?”
제니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안에 들어가서 만나도 돼? 나 귀족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 나쁜 사람도 아니라며.”
“일단 내가 누나한테 물어볼게.”
바구니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은?”
밀레나가 말했다. 체스판은 어느새 정리해놓은 상태였다.
“밖에 있어. 내 친구야.”
“왜 밖에 세워둬.”
“누나한테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아빠한테 들은 얘기도 있고.”
밀레나가 입을 씰룩거리다가 작게 숨을 토해냈다.
“내 의견을 먼저 물어본 건 잘했어. 다른 귀족들한테는 그렇게 해야 하니까. 하지만 나하고 있을 땐 눈치 안 봐도 돼. 입에 발린 친구가 아니라, 너하고는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아니면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아니! 나도 누나랑 진짜 친하다고 생각해.”
밀레나가 빙긋 웃었다.
“뭐 해. 얼른 네 친구 안 데리고 오고. 근데 내가 있으면 불편하려나? 오늘은 이만 갈까?”
가하란은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아니야. 내 친구도 누나 보고 싶어 해. 걔가 귀족한테 관심이 많거든. 아가씨들이 입는 드레스나, 행동 같은 것도 궁금해하고. 자기도 배우고 싶은 눈치야.”
“여자애구나? 얼른 들어오라고 해.”
허락이 떨어졌다.
가하란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제니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굴던 제니가 막상 오라고 하니 우물쭈물했다.
“잠깐만. 이대로 가도 돼? 나 옷 이상하지 않아? 일할 때 입는 거라 별로인 거 같아. 갈아입고 올까? 그게 좋지?”
“평소에도 그러고 다니잖아.”
“넌 뭘 몰라!”
“그래서 안 들어갈 거야? 누나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고 있다고?”
제니가 비키라면서 가하란을 밀쳤다. 가하란은 귀 뒤쪽을 매만지며 집으로 들어가는 제니를 봤다.
“같이 가.”
뒤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제니는 쭈뼛거리며 거실로 걸어가다가 돌연 몸을 돌리더니 가하란 뒤쪽에 숨었다.
“먼저 가.”
테리 형 앞에서는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구는 애인데, 가하란은 픽 웃으면서 제니를 데리고 들어갔다.
“누나. 내 친구야. 이름은 제니.”
밀레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가하란은 지난번에 배운 예법을 기억하며 입을 열었다.
“제니야, 네가 먼저 인사하면 돼.”
“이, 인사? 어떻게? 나 잘 몰라.”
대화를 들었는지 밀레나가 답해주었다.
“편하게 인사하면 돼. 가문명이 있다면 가문명을 포함한 이름을 말하면 돼. 스스로 정한 중간이름이나 지인들이 붙여준 애칭은 정식 소개 후에 따로 말하면 되고.”
설명을 들은 제니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가하란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목소리가 되게 예쁘다.”
“그래?”
“나랑은 달라.”
제니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아, 안녕하세요. 제니예요. 그… 루드 여관에서 일하고 있어요! 되게 좋은 곳이에요.”
밀레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어 걸음 다가와 제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밀레나 엔첸세야. 일단 친구의 친구 정도로 설명하면 되려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