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웨켄, 빌리보, 에브린.”
이름을 되뇌며 수첩을 꺼내 드는 단장이었다.
“당사자들과 얘기는 끝내셨겠죠?”
“정리는 다 해뒀습니다.”
첼은 느긋하게 차를 즐겼다. 감찰단도 불만이 없을 명단이었다. 의회는 받아들일 것이고, 황제도 트집 잡지 않을 적절한 인물들.
“사건 당일 현장에 있던 책임자와 이전에 물품 관리 담당자, 거기에 경비대 팀장. 역시 사령관님의 안목은 대단하시네요. 아주 적당한 사람들이에요. 내쳐도 정치적으로 문제 될 게 없으면서도 책임을 질 수 있는 급들이니. 사령관님에게는 타격이 없겠죠.”
“그 선에서 이번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면 의회와 황가, 두 곳 모두 만족할 겁니다.”
단장이 수첩을 덮었다.
“그렇기야 하겠죠. 사령관님은 중립을 지킨 채 보신할 수 있고, 황제와 신흥 귀족 측은 약간의 피해로 마무리. 거기에 의회는 소소한 득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 겁니다.”
칼리고가 생크림이 듬뿍 발린 케이크를 크게 떠 입에 넣었다.
“성도에서 소식을 접하고 이곳으로 오는 동안 가설을 몇 개 세웠습니다. 요즘 튤립전쟁 때문에 성도가 시끄럽잖아요? 표면적으로야 잘 마무리됐다고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여전히 냉전 중이고.”
드시죠, 단장이 케이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첼은 단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조금만 잘라서 입에 넣었다.
단장이 입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성도 관리국에 파격적인 인사이동이 있었고요. 본토 귀족과 의회분들한테는 충격이 컸을 거예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군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때마침 둔 거병관리국에 문제가 터졌습니다. 그것도 신흥 귀족이 틀어쥐고 있는 관리국에서요. 듣자마자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자작극이라 판단하셨겠죠.”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단장이었다.
“재미없는 권력 다툼의 일환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며 왔습니다. 모듈 탈취는 기발하긴 하지만 이목을 끌기 위한 수단일 뿐, 별 의미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와서 살펴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단장의 손이 움직였다. 조각 케이크를 양분한 다음 앞접시 두 개에 각각 담아냈다.
“왼쪽이 황제와 신흥, 그리고 오른쪽이 의회와 본토입니다. 만약 이번 사건이 두 파벌 중 한 곳에 의해 획책된 거라면, 이렇게 어설프게 끝나선 안 될 일이죠.”
포크를 양손에 든 단장이 동시에 케이크를 찍었다.
“아르드헨 황제의 작품이라기엔 규모가 너무 작아요. 명분을 얻자마자 아잔탄스를 날려버린 양반이 고작 밀반출 시도 정도에서 끝낼 리 없죠. 하려면 거병 한 기 정도는 폭파하고 시작했을 겁니다.”
황제의 이름을 길가에 버려둔 물건처럼 내뱉고, ‘양반’이라는 불경한 호칭까지 사용했으나 별 감흥은 없었다.
특수감찰단 단장은 본래 그런 사람이니까. 언행에 제약을 두고 얌전 떠는 인간이었다면 관료들이 두려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첼은 계속해 보라는 의미를 담아 단장을 바라봤다.
“그렇다고 의회, 세나티아 혹은 가트델의 작품이라 볼 수도 없죠. 마무리가 어설프거든요. 마침 앞에 계신 김에 질문 하나 드리죠. 만약 세나티아 측에서 이번 일을 계획했다면, 이렇게 마무리 지었을까요?”
“만약 의회에서 이번 일을 주도했다면 광신도 같은 걸 범인으로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둔의 관리국을 의회 소유로 만들기 위한 보다 확실한 방법을 사용했겠죠.”
칼리고가 웃으면서 잔을 들었다.
“황제와 의회. 두 곳이 둔을 탐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 삼키려고 노력하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삼자의 개입, 이름 모를 사교(邪敎)의 등장을 생각해봐야 하는데….”
말끝을 흐리는 단장이었다. 첼이 대신 말문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치고는 준비가 너무 잘돼 있다는 게 문제겠죠.”
둔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들어 문제를 일으켰다.
범행에 직접 가담한 자들은 하나같이 범행 목적을 모른 채 돈을 받고 움직인 허수아비였다.
실체를 파악할 자그마한 단서조차 남기지 않고, 유일한 연결점인 진범은 자수해서 같은 소리만 늘어놓다가 폭사해 버렸다.
“사교가 창궐해 문제를 일으킨 건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유넨 1등 귀족 살해 사건, 오드랍 마을 전소 사건, 이스틴 스물네 번의 실종 등등.”
유명한 사건들을 나열하는 단장이었다. 아마 이름뿐만 아니라 사건 개요, 진상, 조사 과정, 결말까지 상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칼리고란 인간은 그러고도 남을 테니.
“각기 다른 문제를 일으킨 사교지만, 공통된 점이 하나 있었죠. 바로 자신들의 이념을 드러내는 겁니다. 소리를 지르든, 몸에 새기든, 피로 그리든 다양한 방법으로 광고를 하죠. 그래야 다른 손님들을 자기 종교로 포섭할 수 있으니까요.”
“신도가 늘지 않는 종교는 쇠퇴할 뿐이니까요.”
첼은 종업원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돌아서는 종업원을 단장이 붙들며 말했다.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도 가능하냐고.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미소 지으며 돌아섰다.
“평소에는 단걸 잘 안 먹는데, 일할 때는 입에 달고 삽니다. 습관 같은 거죠.”
단장의 눈동자가 가게 중앙에 박혀 있는 기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성교회, 그중에서도 중앙 성당의 상징물이 걸려 있었다.
“사교도가 실존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놈들은 둔의 감시망을 피해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했어요. 이것만으로도 놀랍죠. 물론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탈취는 못 하고 미수에 그쳤으나,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마저도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겁니다.”
“노골적이긴 했죠. 완벽한 계획을 수립했으면서 마침표를 엉성하게 찍었으니.”
단장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일에는 목적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소리 소문 없이 둔에 침습할 정도로 뛰어난 지휘계통과 능력을 지닌 사교가 이번 일을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요?”
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죠.”
“예! 바로 그겁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자신들의 이념을 설파한 것도 아니고, 고위층에 무언가를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우리 곁에 찾아와 괴상한 말만 늘어놓고 죽었어요. 행동에는 득실이 따라야 하는데, 이번 사건은 그 원칙에서 벗어나 있죠.”
칼리고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보기 드문 장면이라 첼은 즐겁게 관람했다.
사건의 중요도와 별개로 칼리고란 인간이 고심하는 것 자체는 상당히 재미있었으니까.
황제 폐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룬 채 고민하는 칼리고를 구경하러 왔을 것이다.
“불필요한 가정 없이 가장 단순한 게 정답이란 말도 있지만, 이번 건은 너무나도 오묘합니다.”
단장이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비로소 할 일을 마쳤으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죽고 기다릴 뿐이다.’ 이게 범인의 유언입니다. 골치 아프죠? 정황을 들여다봐도 그들이 얻은 실익이 없는데, 그자는 할 일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무엇 하나 명확한 것 없는 사건.
이대로 마무리되면 의회도 타격이 없고 올란트도 무사할 테니 나쁘지 않은 결말이었다.
하지만 단장은 불만을 품을 것이다. 앞에 있는 남자는 사건 해결보다는 사건 자체에 흥미를 느끼고 몰입하니까.
“뭐, 이건 개인적으로 알아볼 일이니, 이번 건을 마무리하는 데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겁니다.”
칼리고가 수첩을 품에 넣었다.
“물론 대충 마무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조금 더 살펴보고 그럼에도 혐의점이 없다면 첼 님께서 제시한 합의안을 채택하죠. 시시껄렁한 모듈 건을 빨리 마무리해야, 정체 모를 사교의 뒤를 쫓을 수 있을 테니까요.”
“부디 잘 마무리되길 기원하겠습니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살짝 경직된 분위기가 풀렸다. 일 얘기는 어느 정도 마무리 지었으니 잡설을 꺼낼 때였다.
“올란트를 기억하십니까?”
커피 향을 맡으며 말했다. 제법 괜찮은 향이었다.
“기억하죠.”
“지금 둔에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조사서를 보다가 발견했거든요. 첼 님께서 이번 일에 관여하신 이유 중 하나일 테고요. 지분은 작겠지만.”
칼리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커피를 연이어 마셨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다며, 씩 웃는다.
“참고인으로 만나실 예정이겠죠?”
“한 번은 봐야죠.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기술자로 살고 있을 줄이야. 전 총집사님의 뒤를 이을 거라 확신했거든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 아이가 제 뒤를 이을 거라고.”
단장의 눈동자가 위쪽으로 향했다.
“제가 사실 사람을 잘 기억 못 합니다. 흥밋거리 위주로 기억하다 보니 평이한 인상은 망각 저편으로 날아가 버리거든요.”
말은 저렇게 해도 만난 사람을 전부 기억할 것이다. 단지 떠올리지 않을 뿐.
“그런 면에서 올란트 그 아이는 아주 제대로 기억하고 있죠. 탐나는 인재였으니까요. 총집사님께선 모르시겠지만, 제가 그 친구한테 살짝 권하기도 했습니다. 좀 더 크면 감찰단에 들어오라고. 그게 벌써 15년 전이네요. 저도 이십대의 파릇파릇한 시절이었죠.”
“그런 제안을 저 몰래 하셨군요.”
첼은 웃으면서 말했다. 손자를 칭찬하는데 기분 나쁠 리 없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단장의 칭찬이었다.
“그때만 해도 자기는 가문의 일을 이어야 한다고 했죠. 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권했고, 마침내 성과를 냈었죠.”
“어떤 성과를 냈었나요?”
“체스 단판으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겠다고 했어요. 만약 제가 이기면 감찰단에 들어오겠다고 했고요.”
“허허, 완곡한 거절이었는데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당시에는 몰랐죠. 저도 나름 체스 실력에 자신이 있었기에 좋다고 했고요.”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아시면서. 그때 이겼으면 제 옆에 손자분이 있었겠죠. 세 판을 내리 졌습니다. 한 판 지고서 너무 억울하더라고요. 그래서 사정사정해서 두 판을 더 했는데, 결과는 다르지 않았죠.”
칼리고는 한 방 먹었다는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습니다. 준 공과 동등하게 겨룰 수 있는 실력이라는 걸. 나 참,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대공한테 체스로 덤빈 꼴 아닙니까? 전 지는 게임은 절대 안 하는 성격인데.”
말을 끝낸 단장이 뒤쪽을 흘깃 보았다. 하브와 루카가 앉아 있는 곳이었다.
“첼 님과 더 얘기하고 싶지만, 기다리는 저 친구들이 안쓰러워서 그러질 못하겠네요.”
“열정적인 친구들이죠.”
“저희 부하들도 저 친구들의 열정을 반의반만큼만 닮았으면 좋겠네요. 요즘에는 머리들이 굵어져서 뭐만 시키면 토를 답니다. 은혜도 모르는 것들.”
농담조로 말하던 단장이 기지개를 켠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 건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얼른 마무리 짓고 전 정체 모를 사교도나 파봐야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혼자 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해서요.”
첼도 자리에서 일어나 단장과 악수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 올란트 그 아이… 아니지. 이제는 올란트 씨라고 해야겠네요. 결혼해서 아이가 있더라고요?”
“증손자가 하나 생겼죠.”
“이미 만나보신 모양입니다. 게다가 마음에 드신 것 같고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나이에 비해 제법 영리합니다.”
“엄청 영특한가 봅니다. 첼 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핏줄이라 좋게 보는 거죠.”
단장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봐야겠네요. 요즘 감찰단에 일손이 부족하거든요.”
“그 아이도 아마 거절할 겁니다.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아이거든요.”
“잘 구슬리면 또 모를 일이죠. 아무튼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음엔 차보다는 술 한잔하시죠. 차 마시면서 얘기했더니 몇 마디 못 했네요.”
“……다음에도 차가 좋겠군요.”
첼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