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79화 (52/558)

제79화

“조사 인원은 최대한 줄이고. 글쎄, 좁아서 다 들어갈 수가 없다니까 그러네.”

“웨일 클랜에서 마법사가 왔습니다.”

“안쪽으로 모셔!”

현장 관리를 맡은 군관을 필두로 사람들이 지하로 내려갔다.

유렐은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마나 파장이 남기고 간 어지럼증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드세요.”

물이 담긴 컵이 시야를 뚫고 불쑥 들어왔다. 유렐은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칼리고 단장이 미소 짓고 있었다.

“마실 기분이 아닙니다.”

“마실 기분이 아니더라도 마셔요. 속이 좀 가라앉을 겁니다.”

못 미더운 눈으로 바라보자, 단장이 손을 가볍게 튕겼다. 하는 수 없이 컵을 받았다. 물을 마시고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일이 점점 재미있어지네요.”

단장이 옆에 앉았다.

“재미있습니까?”

“예.”

한 소리 하려다가 말았다. 이 남자와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손해였으니까.

“아마 조사해도 건질 만한 게 없을 겁니다. 나오기 전에 제가 다 훑어봤으니까요.”

단장이 말했다.

유렐은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단장은 태연한 얼굴로 폭발한 시체에 다가갔다. 장갑도 안 낀 손으로 살덩이를 푹 찔러 보더니, 성한 내장이 없다며 장기 일부를 들춰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기괴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짓이겨진 살점을 맨손으로 헤집다니. 터져버린 범인의 몸보다 칼리고가 더 징그러워 보였다.

유렐은 고개를 털었다. 생각을 되새김질하는 것만으로도 신물이 올라왔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가버렸어요. 닭 쫓던 개 신세도 이것보단 낫겠죠.”

“그나마 다행이죠. 혼자 얌전히 터져서 죽었으니.”

유렐은 컵에 남은 물을 입에 털어 넣었다. 단장의 조언대로 어지럼증이 가시고 있었다.

“인명피해가 없는 건 다행이지만, 사건 자체로만 보면 더 복잡해졌죠.”

단장이 말했다. 유렐은 쓴웃음을 지었다. 감찰단장의 말대로 사건이 복잡해졌다.

배후를 캐내지 못한 채 진범이 죽어버린 것도 문제지만, 혼란을 가중시킨 문제는 따로 있었다.

“왜 혼자 폭사했을까요?”

단장이 지하실 입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알 수 없죠.”

이게 문제였다. 왜 하필 혼자 죽었을까.

“최초 심문 때는 누가 참석했습니까?”

“저 혼자 했습니다. 위험요소가 남아 있으니까요.”

“의외로 원리원칙은 지키시는군요. 부하에게 떠넘길 법한데.”

“어차피 알고 있을 테지만, 전 욕심이 많습니다. 몸을 사리면 위로 올라갈 수 없죠.”

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심문에서는 사령관 혹은 고위계층이 참석했겠죠?”

“맞습니다. 세 차례 참석하셨죠.”

“그때 예고 없이 폭사했다면 둔 군부에 막대한 피해를 줬을 텐데, 왜 안 그랬을까요?”

유렐은 뒷목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둘 중 하나겠죠. 첫 번째. 폭발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제가 맞혀 보죠. 노리던 목표가 따로 있었다.”

눈 오는 날 풀어놓은 강아지처럼 신이 나 보였다. 유렐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첫 번째 가설은 신빙성이 떨어지죠. 왜냐하면 우리가 직접 봤으니까요.”

단장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범인은 터지기 직전, 확실한 징조를 보여줬다. 격하게 웃고 소리를 질러 무언가 일어날 것임을 암시했다.

예상대로 그 직후 범인의 몸이 빛나며 폭발했다. 만약 범인이 침묵한 채, 혹은 자백하겠다는 말로 꼬드긴 후에 자폭했다면?

“우리를 왜 살려 줬을까요? 범인은 폭발을 컨트롤할 수 있었어요. 아니, 최소한 언제 터질지 알고 있었죠. 알고 있었으니 그렇게 웃으면서 우리에게 경고했겠죠.”

“그걸 경고라 부를 수 있습니까?”

“경고가 아닌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있나요? 일단 전 떠오르는 게 없군요.”

취조부장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칼리고가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질문해왔다.

입 안이 깔깔해진다. 유렐은 잠시 고민하다가 얕은 한숨을 섞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우릴 살리기 위해 경고했다고 치죠. 그거 외에는 마땅히 떠오르는 것도 없으니.”

“메신저로 남기려는 의도였을까요, 아니면 그 순간 터졌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요.”

팔짱을 끼며 고민하던 단장이 핫, 하고 웃었다.

“이 역시 알 수 없군요. 진실은 몸뚱이와 함께 소실됐으니까요. 그렇다면 두 번째 이유를 잠깐 살펴보죠.”

단장이 회중시계를 꺼냈다. 유렐도 힐긋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오후 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늘 총집사님께서 방문 예정이었죠?”

“예.”

“혹시 총집사님께서….”

유렐은 단장이 무얼 질문할지 금방 알아챘다.

“총집사님께선 이미 두 차례 범인과의 대면을 마쳤습니다.”

“총집사님이 목적이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군요. 사령관 포함 수뇌부도, 총집사도 목적이 아니었다라.”

단장이 손가락을 까닥거리다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특수감찰단은 단장이 직접 만든 수첩을 사용한다고.

시선을 느꼈는지 단장이 수첩을 보여줬다.

“마음에 드십니까? 이걸 만드는 데 시간을 꽤 들였습니다. 커버부터 속지까지, 아주 세심하게 검토했거든요. 원하신다면 제가 선물로….”

“됐습니다. 그걸 들고 다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상상하기도 싫군요.”

“다들 애정 어린 눈으로 취조부장님을 바라보겠죠.”

“애정이 아니라 적의겠죠. 감찰단과 내통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듬뿍 담아서 볼 테니까.”

“그것도 나름 즐겁지 않나요?”

오늘 하루만 ‘미친’ 이 소리를 입에 몇 번 담았을까. 유렐은 손을 휘휘 저었다. 관심 끄고 있을 테니 일 보라는 뜻을 담아서.

펜을 바삐 움직이던 단장이 멈칫하며 먼 곳을 바라봤다. 유렐도 시선을 옮겼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노신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첼 총집사. 유렐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다.”

“로비부터 소란스럽더니 내려오니 아주 시장통이군요. 군부에선 보기 드문 광경입니다.”

첼이 모자를 벗었다. 뒤따르던 수행원이 모자를 넘겨받았다.

유렐은 젊은 수행원을 슬쩍 보았다. 하브. 세나티아 가의 차기 총집사로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면목 없습니다.”

일단 사과부터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늙은이가 알 수 있을까요?”

유렐은 시간순으로 사건을 정리해 말했다.

“자폭이라. 과격한 수단을 썼군요.”

“막았어야 했는데 미처 그러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게 있죠. 그보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뒤에 계신 분도 무사해서 다행이고요.”

첼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있던 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첼 님께서 걱정해 주시다니. 감동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네요.”

“눈물까지야. 근데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건가요?”

“예. 아주 멀쩡합니다.”

“저런. 아쉽군요.”

“어디 한 곳 부러지는 게 나았을까요?”

“부러지는 것보단 잘리는 편이 좀 더 나았을 겁니다.”

하하하, 서로를 보며 웃는 두 사람이었다. 방금 대화로 알게 되었다. 첼과 칼리고. 둘의 친분이 꽤 두텁다는 걸.

유렐은 시야 밖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최근 독립부대에서 사령관실 직속으로 부서 이동을 한 루카였다. 여전히 첼을 보필하고 있는 건가?

“볼일들 보게. 필요하면 내가 찾을 테니.”

하브와 루카가 묵례를 올리며 물러났다.

유렐은 휴게실로 안내하려 했으나 첼이 거절했다.

“용건이 사라졌으니 오래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사정도 들었으니 정리가 되면 다시 오도록 하죠.”

“마무리되는 대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단장을 바라봤다.

“칼리고 단장님. 간만에 차 한잔 어떻습니까?”

“총집사님께서 사주는 차를 거절할 순 없죠. 군부 앞 거리에 괜찮은 가게가 있습니다. 거기로 가시죠.”

단장이 앞장섰다.

특수감찰단 단장과 세나티아 가의 총집사.

유렐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두 사람 틈에 끼고 싶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제국 정세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중요할 테니까.

“말씀 나누시죠. 전 여기 있겠습니다.”

“취조부장님도 같이 가시죠.”

첼이 말했다. 눈치 없는 척하고 따라가고 싶었지만, 욕심을 간신히 눌러 담았다.

낄 자리, 안 낄 자리도 분간 못 하는 머저리가 될 순 없었다.

“나중에 제가 따로 대접하겠습니다.”

군례를 올리고 뒤로 물러섰다. 첼이 눈웃음 지으며 턱을 살며시 당겼다.

“조만간 또 찾아가겠습니다.”

단장이 멀어지면서 인사했다. 유렐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됐습니다.”

* * *

“이번 여름은 정말 끔찍했어요. 아드렌니 호수가 바닥을 드러낼 정도였으니 말 다 했죠. 거기서 뱃놀이하는 게 귀족들 연례행사인데, 올해는 다들 근처에서 술만 마시고 있더라고요.”

“덥긴 더웠죠.”

대답하는 사이 종업원이 차를 가져왔다. 첼은 찻잔을 들며 반대편 가게의 테라스를 보았다. 하브와 루카가 이쪽을 살피다가 슬그머니 다른 곳은 본다.

걱정 말라고 해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위치라는 건가. 그 마음을 알기에 구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올해는 ‘콘네’에 있는 큰 호수로 다들 몰려갈 것 같습니다.”

칼리고가 포크로 포도를 찍으며 말했다.

“콘네에 있는 호수라.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낮에는 푸른빛, 밤에는 초록빛으로 빛나는 신비로운 호수였죠.”

“예. 아름답기로 유명한 호수죠. 동시에 자살자가 많기로 유명한 호수기도 하고요.”

“관광지에 죽으러 가는 사람들은 원래 많았으니까요.”

“그러게요. 저도 그래서 이번 휴가 때는 콘네로 가볼 생각입니다. 둔에서 일을 끝내고 나면 걱정을 훌훌 털어버리고 호수를 구경하는 거죠.”

“휴가라. 단장님께 어울리지 않는 단어군요.”

“저도 노는 거 좋아합니다.”

“노는 거보다 일하는 걸 좀 더 좋아할 뿐이겠죠?”

단장이 방긋 웃었다.

“역시! 총집사님께선 절 잘 아시는군요. 말이 통하는 상대와 대화한다는 건 축복이나 다름없습니다. 둔에 와서 두 번째로 말이 통하는 분을 만나 너무나도 기쁘네요.”

“두 번째요?”

“예. 두 번째요.”

“다른 손님이 있었나 보군요. 제가 아는 사람입니까?”

“아마 아실 겁니다. 아니, 모르는 척하셔야 할지도 몰라요. 궁금하시더라도 조사하진 마세요. 그분은 유순하시나 쓰는 검에는 자비가 없거든요.”

“그거 조심해야겠군요.”

장난스러운 말투라도 칼리고 입을 통해 나왔다면 새겨들어야 했다.

첼은 정체 모를 손님에 관한 걸 머릿속에서 지웠다. 알아봤자 득 될 게 없을 테니 무시하는 게 좋았다.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감찰단장 앞에서 돌려 말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아직 봐야 할 게 더 남았지만, 중간 결론을 내리자면 큰일은 없을 겁니다. 모듈 실물이 사라진 게 아니니까요.”

“듣고 싶던 대답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할 순 없습니다. 일이 터졌으면 누군가는 감당해야죠.”

“그 또한 옳은 말이죠.”

단장이 찻잔을 들었다.

“말씀하시죠. 디온 님과 첼 님, 두 분께서는 이번 사건을 어느 선에서 정리하고 싶으신 겁니까?”

과연, 첼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단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말이 통하는 상대와 대화하는 건 축복받은 일이었다.

“과한 요구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서두를 뗐으니 이제 조율할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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