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저 뒤에 계신 분이 이번 일을 계획하셨다죠?”
칼리고 단장이 범인을 보며 물었다. 유렐은 옆으로 비켜서며 대답했다.
“알지 못합니다. 주동자 중 하나인지, 아니면 단순한 심부름꾼인지조차 파악 못 했죠.”
자신의 무능함을 들춰내는 것 같아 입맛이 썼지만, 특수감찰단 단장 앞에서 거짓 보고를 올릴 수 없었다.
거짓으로 모면해봤자 이 남자는 언젠가 진실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니 아는 건 아는 대로,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정확하게 말해야 했다.
“저희 애들이 올린 보고서와 군부에서 사전에 작성한 기록을 다 읽어 봤습니다. 사교도의 소행일 수도 있다죠?”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확실한 건 아닙니다. 아니, 차라리 정신 나간 이교도들의 짓이었으면 안심이 되겠군요.”
유렐은 히죽 웃는 범인을 노려봤다.
“저분하고 대화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안 된다고 하면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요.”
얄미운 인간이었다. 유렐은 작게 마음대로 하시죠, 라고 대꾸했다.
단장이 의자를 살며시 들어 범인 앞에 내려놓았다.
“안녕하세요?”
단장이 범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런. 손발이 묶여 있어서 악수를 못 하는군요. 죄송합니다.”
멋쩍게 웃으며 사과하는 단장이었다. 놀리는 건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알 길은 없었다.
유렐은 부관에게 눈짓을 주었다. 부관이 밖으로 나가 취조실 문을 닫았다.
“내보내실 필요는 없는데.”
“손님이 오실 예정이라 미리 올려보낸 겁니다.”
“손님이라. 첼 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알면서 물어보는 건 그만두시죠.”
“아는 것과 사실은 다른 거죠. 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걸 좋아합니다. 확실하단 믿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거든요.”
유렐은 입을 다물며 팔짱을 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칼리고와 범인을 바라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능력만큼은 무시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단장이라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보고서를 보니 이름도, 목적도, 출신도 적혀 있지 않던데. 입이 무거우신 분인가 봐요.”
“자수하고 나서 같은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 말을 지겹도록 들었죠.”
단장이 깍지를 끼며 말했다.
“‘톱니바퀴가 마지막 역할을 위해 이곳에 왔다. 나는 나의 본분을 다했으니 이제 기다릴 뿐이다’. 이게 맞나요?”
“맞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알아낸 건 그게 전부였죠.”
“그 말씀은….”
단장이 고개를 틀며 유렐에게 시선을 주었다.
“‘비로소 할 일을 마쳤으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죽길 기다릴 뿐이다’. 단장님이 오시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달라졌군요.”
“미리 말씀드리는 거지만 오늘 수뇌부가 모이는 행사 같은 건 없습니다.”
“사령관님이나 각 처의 수장만을 노린 조직적인 테러가 벌어질 수도 있죠. 물론 그럴 가능성은 작지만.”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조금 모자라지만, 그래도 쓸 만한 제 부하들이 둔 곳곳을 살피는 중이니까요. 조짐이 보였다면 제 귀에 들어왔을 겁니다.”
단장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범인의 얼굴부터 어깨, 가슴, 배를 거쳐 발가락까지 이곳저곳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몸이 성한 데가 없네요. 인권조항은 잘 지키고 계신 거죠?”
“여기에 끌려온 자한테 인권이란 없습니다. 아실 텐데요.”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목숨 붙여 놓은 김에 밥도 잘 먹이면 좋죠.”
그렇게 말하던 단장이 범인의 새끼발가락을 위로 확 꺾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으드득, 뼈가 분질러지는 소리와 함께 거죽도 찢겨나갔다.
범인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으아아악, 최조실을 가득 채우는 비명에 유렐은 눈을 찌푸렸다.
“신경 계통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네요. 가끔 있거든요. 통각을 상실한 사람이. 고통을 모르는 인간도 아닌데 자수를 하다니. 놀라워요.”
범인이 꺽꺽거리며 침을 흘렸다. 유렐은 너덜너덜해진 범인의 새끼발가락을 보았다.
취조부장으로서 수많은 고문을 봐오고, 직접 해봤기에 알 수 있다. 저 인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반대쪽 새끼발가락에 손을 얹는 단장이었다.
“혼절하지 않네요. 정신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몸에 뭔 짓을 해놓은 건지.”
“사지를 절단해도 입을 안 열 겁니다. 잘라서 알아낼 수 있었다면 우리가 진즉에 했을 테죠.”
유렐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확인차 해본 겁니다, 확인차.”
말과 동시에 또다시 새끼발가락이 꺾였다. 이번엔 조용했다. 범인은 몸만 들썩거릴 뿐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 같지는 않네요. ‘스토아’의 요원에게 자문을 구하고 싶지만 시간이 별로 없으니 넘기기로 하고.”
칼리고가 범인에게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다.
“체취 말고도 특이한 향이 도네요. 안구 상태와 목 뒤쪽 발진으로 보건대 약을 쓰셨나 봅니다.”
“썼지만 소득은 없었습니다. 잘 참아내더군요.”
“‘케아’에서 만든 약조차 소용이 없다라. 올해 들어 들은 말 중에 가장 놀라운 말이군요. 아니, 두 번째로 놀라운 말이라고 정정해야겠어요. 첫 번째는 둔에서 오랜만에 만난 분이 하신 말인데… 혹시 궁금하신가요?”
유렐은 단장의 눈빛을 흘려보내며 말했다.
“그쪽 개인사는 알 바 아닙니다.”
“단장님에서 이젠 그쪽이 됐네요.”
“아, 미안합니다. 말이 헛나갔네요.”
“사람은 그럴 때가 있죠. 그래도 괜찮아요. 말했다시피 호칭은 상관하지 않으니까.”
면상에 대고 개새끼라고 하면 속이 좀 시원하려나? 잠깐 유혹에 빠졌으나 유렐은 정신 차리고 표정을 관리했다.
“그보다 약의 출처가 케아였다니.”
“모르고 계셨나요?”
“알 필요가 없으니까요. 성능만 확실하면 누가 만들었건 문제가 될 게 없으니.”
성도에 자리한 싱크탱크 중 가장 은밀하다고 알려진 게 케아였다.
전쟁 중 인간을 대상으로 한 온갖 실험이 자행됐다고 들었는데, 전쟁이 끝난 지금도 별의별 실험이 계속되는 모양이다.
“지당하신 말씀이네요. 성능만 확실하면 출처는 문제 될 게 없다. 기억해 둘게요. 근데, 성능이 어떤지 체험은 해보셨나요?”
미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단장이었다. 체험을 해? 유렐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그걸 굳이 체험해봐야 합니까? 먹여보면 아는걸.”
“먹여보는 것만으로는 불확실하죠. 먹어봐야 그 고통이 어느 정도 수준이지 확실하게 알 수 있고요.”
설마, 유렐은 벌레가 입 안으로 기어들어 온 듯한 혐오감을 느끼며 물었다.
“먹어본 겁니까? 그 약을?”
“물론이죠. 감찰단 일이란 게 마냥 고상한 것이 아니라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거든요. 붙잡혀서 고문당할지도 모르는데, 미리미리 경험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유렐은 약을 먹고 몸부림치던 범인을 떠올렸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그 약을 직접 먹어봤다니.
“취조부장님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드셔보세요. 어쨌든 죽지는 않으니까요.”
“전 됐습니다.”
“아쉽네요. 특별한 경험이 될 텐데.”
퉁퉁, 또다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유렐은 단장을 바라봤다.
“제 부하가 온 모양입니다. 들여보내도 될까요?”
“그러시죠. 어차피 멋대로 하실 분이니.”
단장이 직접 문을 열었다. 밖에 있는 건 피곤해 보이는 남자였다.
“관리국 1차 보고서 완성됐습니다. 제조소와 제철소도 곧 정리해서 올릴 테니, 제발 제때 와서 좀 보세요. 또 일 미루지 마시고.”
남자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상관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가관이었다.
군부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개판이군, 유렐은 속으로 생각하며 두 사람을 지켜봤다.
“데옹. 왜 그렇게 까칠해.”
단장이 말했다. 데옹. 유렐은 남자의 이름을 기억하며 대화를 들었다.
“보름 넘게 쉬지 않고 달려서 여기 왔고, 쉬지 못한 채로 조사했고, 눈도 못 붙이고 정리했습니다. 체력이 한계라고요.”
“아니야. 너는 할 수 있어. 내가 뽑은 애들은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
“아무튼 전 할 일 했으니까 쉬러 가겠습니다.”
단장이 씩 웃었다.
“블린드하고 행정처 좀 가봐.”
“예? 거긴 2팀 담당이잖아요.”
“넌 어느 팀에도 속해 있지 않잖아. 아무튼 가서 애들 좀 도와줘.”
데옹이란 남자는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돌아섰다. 단장이 손을 탁탁 털며 문을 닫았다.
“저희 애들이 투덜투덜해도 해야 할 일은 참 잘해요.”
단장이 의자를 구석으로 치웠다.
“심문은 여기까지 하죠.”
“그만둔다고요? 물어본 것도 없지 않습니까.”
“들을 수 없는 인간한테 묻는 건 시간 낭비니까요. 전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요.”
칼리고가 범인 뒤로 걸어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전 둔의 취조부가 얼마나 유능한지 알고 있습니다. 부장님께서 아무것도 못 캐냈다면 그건 능력 부족이 아니라 대상이 잘못됐다는 뜻이죠.”
“대상이 잘못됐다?”
“이자는 아는 게 없을 겁니다. 수없이 되풀이한 그 문장만 받들고 여기 온 거겠죠.”
“그자는 비로소 일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무언가 바뀌었고, 사건이 터질 겁니다. 알고 있는 게 있을 겁니다.”
“어느 정도는 있겠죠. 근데 그걸 우리가 알 방법이 없어요. 포기할 건 포기해야죠.”
단장이 범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필이면 오늘 범인이 말을 바꿨습니다. 변수가 참 많죠? 정해진 날이라서 그런 건지, 제가 방문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둔과 상관없는 곳에서 뭔 일이 터지고 있는 건지. 정보가 부족해요. 부족한 정보로 괜한 망상은 하지 말자고요. 확실한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단장이 상체를 숙였다.
범인의 귀에 대고 말을 꺼냈다.
“지금은 당신들이 이겼어요. 우린 알아낸 게 없고, 당신은 흡족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겠죠. 하지만 승리란 게 영원하진 않더라고요. 저는 참 지독한 인간이에요. 흥미로운 사건을 발견하면 물어뜯고 놓질 않죠. 그리고 지금, 당신네가 일으킨 사건이 내 흥미를 자극했어요.”
말을 마친 단장이 넥타이를 풀었다.
“주술이나 마법의 흔적은 여전히 발견된 게 없죠?”
유렐은 코앞으로 다가온 단장을 보며 말했다.
“없습니다. 클랜 측에서 마법사를 더 보내준다고 했으나 성과를 기대하긴 힘들 것 같고요. 주술과 영매 쪽도 조사를 이어가고 있지만 역시나 가시적인 결과물은 없습니다.”
“마법, 주술, 사령술. 뭐 하나 통일된 게 없으니까. 마법이야 그나마 마법공학으로 어찌어찌 보편화했다지만 나머진 개인적이고 특수하니.”
“마법의 수는 마법사의 수만큼 다양하니 알아내는 건 힘들겠죠.”
“심상세계를 들여다보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한 사람이 몇 없으니 힘들고. 일단 목숨만 붙여 놓으시죠. 죽는 게 꿈이라는데 꿈을 이뤄줄 수는 없으니까.”
단장이 넥타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보셨다시피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서요.”
“그러시죠.”
단장이 문을 열 때였다. 고개를 처박고 있던 범인이 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죽고 기다릴 뿐이다! 그때가 오면!”
광기에 찬 얼굴이었다. 그 순간, 단장이 유렐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나가요!”
이유는 묻지 않았다.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 범인의 몸이 하얀빛을 내며 갈라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쇠문을 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속을 뒤트는 마나 파장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유렐은 어지럼증을 느끼며 벽에 손을 댔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고 단장을 보았다.
단장은 눈만 씰룩일 뿐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단장이 문을 열었다.
유렐도 정신을 차리고 취조실 안을 들여다봤다.
“이것 참 화려하네요.”
상체가 터져 나간 범인의 몸을 보며 단장이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