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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77화 (50/558)

제77화

“인사 받아준다고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유렐은 의자를 끌어당겼다. 신경을 긁는 마찰음이 취조실 안을 가득 채웠다.

의자에 앉아 포박된 범인을 봤다.

가족의 얼굴보다 이놈의 얼굴을 더 많이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이름을 말해줄 건가?”

챙겨온 샌드위치를 한입 물었다. 층층이 쌓은 햄을 보란 듯이 씹었다. 소스가 범인 얼굴에 살짝 튀었다.

유렐은 포장지로 범인의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뭐라도 말하고 편해지는 게 어때? 그래, 이름. 이름부터 시작하자고. 이름을 말하면 편하게 재워줄게. 도중에 깨우지도 않고 말이야.”

수면욕은 인간이 참아낼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건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 의지로 버텨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눈앞의 범인은 지독한 집념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나흘만 안 재워도 반쯤 미쳐 버린다. 헛소리하고, 헛것을 보다가 결국 모든 걸 털어놓는다.

“이봐. 우리 이제 좀 친해지자고. 너나 나나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는 불쌍한 인생이잖아. 안 그런가?”

범인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흔들림이 전혀 없다. 이 정도로 확고한 인간은 처음이었다.

광신도들도 몇 번 상대해 봤으나 굶기고, 잠을 안 재우면 다들 백기를 흔들었다. 신앙에 미쳤다고 해도 결국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니까.

근데 앞에 있는 이놈은 대체 뭐지?

보름 하고도 며칠이 지났다. 인간이라면 버텨낼 수 없는 시간이었다.

범인의 눈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지방이 말라 볼이 홀쭉해지고, 눈가가 움푹 파였으나 눈동자만큼은 싱싱했다.

넌덜머리 나는 싱싱함이다.

턱이 뻐근해졌다. 유렐은 아래턱을 좌우로 비틀었다. 이놈과 마주하고 있으면 속이 타들어 간다.

“오늘도 그 입을 다물고 있을 건가?”

질문을 던지고 얼마간 기다렸다. 범인의 바싹 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톱니바퀴가 마지막 역할을 위해 이곳에 왔다. 나는 나의 본분을 다했으니 이제 기다릴 뿐이다.”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

“그래, 그렇게 나오시겠지.”

범인은 앵무새처럼 저 말만 되풀이했다. 자수한 그 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범인의 입에서 다른 단어가 나온 적은 없었다.

유렐은 뒤를 힐긋 보며 손짓했다. 부관이 약을 가져왔다.

“그럼 나도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검은 환약을 본 범인이 몸부림쳤다. 쇠못으로 고정해둔 의자가 살짝 움직였다.

“알잖아. 네가 그렇게 발악한다고 해서 우리가 멈추진 않아. 약이 싫으면 말을 하면 돼.”

부관이 범인의 목에 팔을 감고 머리를 고정시켰다. 유렐은 장갑 낀 손으로 범인의 입을 벌린 다음, 그대로 손을 집어넣었다.

“몇 번 해봐서 알잖아. 백날 물어봐야 이 장갑은 안 뚫려. 네 이빨만 나갈 뿐이야.”

비틀어 연 범인의 입에 약을 집어넣었다. 물도 약간 흘려 넣었다. 응고된 약이 금방 녹아내리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서로 피곤한 관계야, 그렇지?”

손을 털고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 침을 질질 흘리던 범인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즉효성 약은 오늘도 제 성능을 발휘했다. 범인의 눈동자에 실핏줄이 피어오르고 입가에 거품이 맺혔다.

약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주는지, 유렐은 알지 못했다. 인두로 입 안을 쑤시는 게 차라리 인도적이라는 말을 얼핏 들었을 뿐.

몸부림이 멎었다. 유렐은 부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양동이에 든 물이 범인의 정수리로 쏟아졌다.

유렐은 발을 살짝 들었다. 새로 맞춘 군화에 핏물이 닿는 건 피하고 싶었다. 밑창이 젖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사람들이 참 기발해. 후유증이 안 남는 이런 약을 개발해 내잖아? 살점을 저미는 고통이 몸을 때리는데, 죽지는 않아. 이런 게 마법이지. 안 그런가?”

부관이 범인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범인 얼굴 전체에 경련이 일고 있었다.

유렐은 범인의 눈빛을 확인했다. 잘게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의지에 찬 눈동자가 보였다.

녀석은 여전히 신념을 붙들고 있었다.

“놔주게.”

부관이 손을 뗐다. 범인이 고개를 처박고 격하게 숨을 토해냈다.

“일주일 전부터 계속 생각했던 거지만, 인간이 맞긴 한 거야? 그 껍데기를 벗기면 안에 기계장치가 들어 있는 건 아니고? 어떻게 버틸 수가 있는 건지. 이젠 경이로울 지경이야.”

거칠게 기침하던 범인이 다시금 말했다.

“톱니바퀴가 마지막 역할을 위해 이곳에….”

유렐은 오른발을 들어 범인의 턱을 휘갈겼다. 잡티 하나 없던 군화에 핏물이 묻었다.

“에헤이, 이 친구야. 이거 보여? 맞춘 지 얼마 안 된 군화에 더러운 게 묻었잖아. 그러게 왜 쓸데없이 아가리를 열어서 내 소중한 군화를….”

천으로 군화를 쓱쓱 닦았다.

“이대로 죽는 게 네 역할이야? 고작 그걸 위해서 자수한 거고? 이 친구야.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해. 그쪽이 섬기는 신도 네 노력에 감복해서 구원이든 축복이든 다 들어줄 거라고. 그러니까 얘기 좀 하자, 응?”

군화를 닦던 천으로 범인의 얼굴을 훔쳤다. 범인의 턱이 살며시 움직였다.

“톱니바퀴가 마지막 역할을 위해 이곳에 왔다.”

똑같은 말을 기계처럼 또 되풀이하는군. 질려서 이젠 손도 대기 싫었다. 유렐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댈 때였다.

“…비로소 할 일을 마쳤으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죽길 기다릴 뿐이다.”

문구가 바뀌었다. 유렐은 서둘러 범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방금 뭐라고 했어.”

범인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입꼬리가 서서히 들리더니, 이내 완연한 미소를 그려냈다.

섬뜩했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 불안감에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이봐, 대체 뭘 기다린다는 거야. 어?”

보름 넘게 무표정으로 버티던 놈이 갑자기 웃었다. 이건 전조였다. 시야 밖에서, 아직 알아채지 못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다.

“이 개새끼야! 말해! 말하라고!”

뺨을 후리며 범인을 흔들었다. 입에 맺힌 징그러운 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유렐은 부관을 바라보았다.

“오늘 특별한 행사가 있나? 둔 수뇌부가 모이는 행사 같은 거 말이야.”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무슨 일이 터졌다는 보고는?”

“전무합니다.”

유렐은 범인을 노려봤다.

“미친 새끼지만 헛소리할 새끼는 아니야. 둔의 경계망을 뚫고 들어온 광신도 놈들이 뭔가 꾸미고 있어.”

대체 무엇일까. 비로소 일을 마쳤다니? 바깥 상황도, 시간도 알 수 없는 이 장소에서 녀석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자네는 일단 수석부관에게 연락을….”

유렐은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분명 바깥에서….

퉁퉁, 다시금 노크 소리가 났다. 두꺼운 쇠문을 누군가가 두들기고 있었다.

이곳은 취조실 최심부. 최고 수준의 보안등급이 요구되는 둔 군부의 시설이었다.

취조부장인 자신의 허가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디온 사령관뿐이었다.

“부관. 총집사 말고 방문 예정인 손님이 있었나?”

“없습니다.”

“사령관님께서 노크하실 일은 없겠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을 두들기고 있는 놈은 누구인가?

부관이 문고리를 잡았다.

쇠 갈리는 소리를 내며 비스듬히 열린 문 너머에 낯선 남자가 있었다.

자기주장이 강한 곱슬머리에 큰 키.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 상이었다.

어설프게 맨 넥타이가 아니었다면 호신용 단검을 뽑아 들었을 것이다.

유렐은 입술을 꾹 붙이며 긴장한 채 남자를 살폈다.

얼굴도 모른다, 어디 소속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에 맨 넥타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고 있었다.

황가의 일꾼임을 상징하는 푸른색과 흰색 수실로 새긴 빗금. 중앙에는 반듯하게 모은 손 모양의 넥타이핀이 꽂혀 있었다.

저 손 모양 핀은 의회의 상징 중 하나.

황가의 색과 의회의 상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제국 전역을 뒤져봐도 딱 한 군데였다.

“이것 참, 바쁘신 와중에 죄송하게 됐습니다. 시간이 어정쩡하죠? 예정대로라면 둔 시내를 관광하다가 시간에 딱 맞춰서 오려고 했는데,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좀 늦게 왔네요.”

빠르게 말을 쏟아내며 아주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였다.

유렐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남자와 거리를 두었다.

차라리 적국의 첩자와 어깨동무하며 술을 마시고 말지, 이 남자와 가까워지고 싶진 않았다.

“취조부장이신 유렐 님이시고, 이쪽은 부관이신 베이혼 님 맞으시죠? 제가 틀렸다면 눈치 보지 마시고 말씀해 주세요. 틀린 건 얼른얼른 고쳐야 하니까요. 그래요, 틀린 걸 내버려 두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죠. 안 그렇습니까? 제때제때 고치면 손바닥으로 막아낼 일을, 괜찮겠지 하고 내버려 두면 여러 사람이 피 보게 되잖아요. 하핫, 물론 지금 둔의 상황을 빗대어 말한 건 아닙니다. 전 여러분들이 아주 우수하고 훌륭한 군인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이번 사건은….”

유렐은 한 걸음 내밀었다. 말을 섞고 싶지 않았으나, 내버려 두면 종일 혼자 떠들 것 같았다.

“알고 계시고 말씀까지 하셨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는 해야겠죠. 취조부장 유렐입니다.”

유렐은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범인의 타액과 피가 잔뜩 묻은 장갑이 유달리 번들거렸다.

남자가 장갑을 빤히 보더니 웃으며 손을 붙잡았다.

“반갑습니다. 관료들께서 언제나 반겨주고, 사랑하고, 아껴주는 특수감찰단 단장 칼리고입니다. 호칭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야, 너, 이 새끼, 그 새끼. 죽일 놈도 많이 들어서 괜찮고요.”

“단장님이라 부르죠.”

“젠틀하시네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타 부서 모 귀족분께서는 절 향해 ‘부모가 먼저 죽일 새끼’라고 했거든요. 참, 씁쓸한 일입니다. 그렇죠?”

손을 격하게 흔들며 말하는 칼리고 단장이었다.

유렐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뺐다. 두툼한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손이 바스러질 것처럼 아팠다.

장갑 낀 손을 뒤로 감추며 말했다.

“오신다는 연락을 못 받았습니다만.”

단장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미처 말하지 못했네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얻어낸 특권 중 하나가 언제, 어디든 원할 때 갈 수 있는 거니까요. 그게 의회의 회의실이든, 황제의 침소든 상관없이.”

미친 소리 같지만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권한을 손에 쥐여준 것이 황제와 의회 최고 어른들이었다.

미친놈에게 보검을 하사한 것이다.

“일단 나가시죠. 사령관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아니요. 전 여기가 좋습니다. 이 음침함이 마음을 진정케 하네요. 고향에 돌아온 기분입니다.”

단장이 방긋 웃었다.

“둔은 행운의 도시라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네요. 예상치 못한 반가운 분도 만났고, 또 이런 흥미로운 사건도 접하고.”

예상치 못한 반가운 분?

칼리고 단장이 반갑게 맞이할 인사가 둔에 있었던가? 아니, 애초에 저 인간과 친하게 지낼 인간이 존재는 하고?

“그래도 일단 사령관님을 먼저 뵙는 것이….”

단장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유렐 부장님. 절 신경 써 주시는 건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만날 사람은 제가 정합니다. 사령관님은 조금 이따가 뵙는 걸로 하죠. 디온 사령관님께선 넓은 아량으로 제 행동을 이해해 주실 겁니다. 아니면 어쩔 수 없고요.”

어쩔 수 없다.

이 한마디가 칼리고란 인간을 대변하는 문장이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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